
“인적 드문 외진 공터에 겨울비는 내리고/ 대형천막 가설무대, 국내 최고이자 유일한 서커스단의 세계적인 묘기는/ 이렇게 환상적이고 아슬아슬하게 시작되지 매일// (…)// 그다음엔 몰라/ 곡예사에게 내일 일은 모르는 거야/ 사랑 같은 건 필요 없어, 스무 살/ 사랑, 아니 필요할지도 모르지// 삶도 겨울들판처럼 비워둘 수 있으면 좋겠어/ 낡고 초라하게 시드는 꽃도 나름 아름답잖아/ 떠돌면서 날마다 피고 지는 꽃/ 하루의 꽃”(‘세기의 서커스’ 부분)
지금 이곳, 여기의 삶이 숨막히고 답답할수록 겨울 들판의 쓸쓸한 여백과 찰나의 아름다움에 더 끌릴 수밖에 없을 테다. 서커스단이라는 소재 또한 북방의 삶은 아니지만 일상과는 떨어진 속성을 지니다 보니, 시인의 속마음을 살피기 위해선 지금 이곳에 대한 관찰이 더 필요하다.
“더듬이를 있는 대로 늘어뜨린/ 등 굽은 은백의 달팽이 한 마리/ (…)/ ㄱ자로 허리를 꺾은 노파가 사력을 대해 끄는/ 폐지 더미를 가득 실은 손수레/ (…)/ 그네는 안다, 속도와 풍경을 압도하는/ 느림과 멈춤의 힘을”(‘달팽이’ 부분)
도로를 가로지르며 수레를 끄는 늙은 노파, 달팽이. 이 풍경을 바라보는 시인의 시선은 연민으로 가득하다. 따지고 보면 이번 시집을 관통하는 힘도 바로 이 연민에서 발원하는지도 모른다.
“지도에 없는 길 하나를 만났다/ 엉엉 울며 치미는 눈물을 삼키고 도시로 떠난/ 지나간 사람들의 그림자 가득해/ 이제는 하루 종일 오는 이도 가는 이도 드문/ 한때는 차부였을지도 모를 빈 버스 정류소// …// 지도에도 없는 길이 끝나는 그곳에/ 누구도 허물 수 없는 집 한 채 온전히 짓고 돌아왔다”(‘지도에 없는 집’ 부분)

곽효환의 시들은 대체로 서사적인 가독성을 지니고 있는데 특히 사람 이야기에 이르면 빛을 발한다. 그중에서도 폐암 선고를 받고 삶을 정리하던 이청준 선생과의 만남을 기록한 시편 한 토막은 많이 아프다.
“그날 이후/ 몇 번을 망설이다 그의 집을 찾았다/ 초여름, 남색 털모자를 반듯이 눌러쓴 그는/ 이제 약을 끊었다고 선언하듯 말했다/ 평생 거짓 이야기로 세상을 현혹한 죄와 벌에 순응키로 했다고// …// 요즈음은 헤어지는 일을 한다고 했다/ 누구를 만나든/ 내 마음에서 그를, 그 마음에서 나를 지우는/ 상처 없이 그러나 단호하게”(‘아직 연습이 필요하다-이청준 선생께’ 부분)
조용호 선임기자 jhoy@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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