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북도 충주에서 제천 방향으로 난 굽이길을 차로 한 시간쯤 달렸을까. 한적한 산골마을 제천시 덕산면 도전리 삼거리에 위치한 이국적 풍경의 카페가 눈에 띈다. ‘누리마을 빵 카페’라고 쓰인 곳의 문을 열고 들어서자 나그네의 호기심은 더욱 커진다. 갓 20대에 들어섰을 법한 청년 바리스타가 커피를 내리고, 피부색이 다른 30대 여성이 계산과 서빙을 거든다.
![]() |
◇누리마을 빵 카페를 배경으로 포즈를 취한 한석주 간디교육연구소장. “꿈꾸지 않으면 사는 게 아니다”는 그는 충북 제천시 덕산면을 교육, 경제, 문화가 살아 숨쉬는 농촌공동체로 만드는 게 삶의 큰 목표다. |
제천 간디교육연구소 한석주(44) 소장은 “대안학교인 간디학교 출신 바리스타가 타이에서 이곳으로 이주해 온 파파이씨에게 커피 내리는 법을 가르쳐 주고 있는 겁니다. 제빵실에선 베트남 출신 여성들이 파티셰들에게서 빵과 케이크 만드는 일을 배우고 있죠”라고 말한다.
몇년이 지나면 이 여성들이 카페의 주역이 될 것이라고 자신한다. 조명·음향시설은 누구나 간단한 문화공연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것이란다. 그제서야 고개가 끄덕여진다.
조선시대 3대 약령시장을 형성했을 만큼 약초 재배로 유명한 덕산면도 여느 농촌처럼 다문화가정의 비중이 커지고 있다. 인근 수산·한수면에 필리핀·베트남·타이·중국 출신 결혼이주여성 35명과 그들의 자녀들이 마을 주민들과 함께 살고 있다.
5년 전 대안학교인 제천 간디학교 교사로 처음 이곳에 발을 디딘 한 소장은 늘어나는 다문화가정을 보면서 농촌공동체의 문제에 주목하게 됐다.
그가 2007년 세운 간디교육연구소가 결혼이주여성과 자녀들, 마을 주민들이 이해하고 소통하는 구심점이라면, 올해 7월 문을 연 ‘누리마을 빵 카페’는 이곳을 경제·문화까지 긴밀하게 연결된 공동체로 성숙시키기 위한 노력의 결실이다.
밀과 효소, 잼, 우유, 음료 등을 직접 생산·판매하는 동시에 결혼 이주여성들의 일자리를 만들고, 마을 주민들에게 소통과 문화의 공간을 제공해 주는 것이 카페의 주 역할이다.
#‘꿈꾸지 않으면 사는 게 아니다’…미련없이 던진 교편
한 소장은 7년 전만 해도 서울 강남의 사립중학교 역사 교사였다. 그러다 2003년 10년간 잡아왔던 교편을 손에서 놓았다. ‘행복한 사람’과 ‘행복한 관계’를 만든다는 교육철학과 어긋난 교육을 하고 있다는 자괴감이 그를 괴롭혔다.
“아이들 삶에 필요한 역사를 가르치는 것과 시험을 잘 보도록 요점을 잡아주는 교육을 해야 한다는 요구 사이에서 고민이 많았습니다. 문득 ‘내가 입시교육의 구조적 모순에 일조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죠.”
대안학교 활동은 그렇게 ‘행복한 교육의 가능성’에 대한 고민에서 출발했다.
서울 마포 성미산학교와 경기도 성남 이우학교에 발을 담갔다가 2005년 제천 간디학교의 양희창 교장을 만났다.
‘꿈꾸지 않으면 사는 게 아니라고 별헤는 맘으로 없는 길 가려 하네. 사랑하지 않으면 사는 게 아니라고 설레는 마음으로 낯선 길 가려 하네’로 시작되는 교가에서처럼 입시가 아닌 다른 가치를 좇는 간디학교의 교육철학에 마음이 움직였다.
한 소장은 2년 동안 사랑과 자발성, 공동체성이라는 간디학교 교육철학을 중·고등 6년 통합과정에 반영하는 데 정성을 쏟았다. 스스로 학습하는 법을 체득하는 주 4시간의 프로젝트 학습, 1년에 한달 학교 밖에서 배우는 ‘움직이는 학교’ 등이 주요 과목이다.
국어·영어·수학 과목은 단 1학기만 필수일 뿐 나머지는 선택이다. 농사와 옷 만들기, 음식 만들기, 기타 건강에 관한 교육이 이 학교의 주요 필수과목이다. 교칙을 정하거나 징계를 할 때에는 교사 24명과 학생 120명이 똑같이 1인1표를 가지고 투표를 통해 결정한다.

농촌지역에서 풀뿌리 교육공동체를 만들겠다는 꿈이 영글어가던 무렵, 한 소장의 시선은 학교를 넘어선 ‘마을공동체’로 확대됐다.
“지역 자체를 배움터로 만들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제가 어렸을 적 살았던 마을처럼 공적부조시스템 아래서 아이들이 자란다면 그게 새로운 삶의 모델이 될 것으로 본 거죠.”
그런 고민 속에서 2007년 마을에 방과후 공부방을 만든 한 소장은 새로운 문제와 마주쳤다.
결혼이주여성과 그 자녀들의 문제였다. 그는 “2020년이면 농촌 초등학생 절반이 다문화가정 아이들이 될 것이라는데, 이들이 농촌공동체에서 진정한 마을 구성원, 일꾼이 되도록 돕는 것이 핵심”이라고 말한다.
마을 보건소 건물에 간디교육연구소 산하 ‘누리 어울림 센터’를 만들어 도서관과 배움터, 어린이집 등으로 꾸몄다. 특히 만 0∼3세의 다문화가정 아이들을 돌보는 데 힘을 썼다. 이 시기 언어발달이 지능발달과 밀접하게 맞물려 있고, 아이를 마음 놓고 맡겨야 엄마들이 일을 할 수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초등학생들은 방과후 공부방과 작은도서관에서 외국어와 미술 등을 익히고, 숙제와 놀이도 함께 해결한다.
배움터는 결혼이주여성과 마을사람들이 배움을 주고받는 학습공간이다. 결혼이주여성에게 우리말을 가르치는 한글교실과 음악·미술·목공예 등을 통한 자기치유교실 등도 열린다.
때로는 이들이 남편들을 앉혀 놓고 모국의 언어와 문화를 가르치기도 한다. 2008년에는 몇몇 부부들이 3박4일간 제주도로 뒤늦은 신혼여행을 가서 서로의 상처를 보듬었다.
결혼이주여성에게 한국사회로 편입하기만을 강요할 게 아니라 마을 구성원들이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면서 잘 어울리고 소통하는 문화를 만들자는 게 배움터 설립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이곳은 결혼이주여성들의 일터이자 자기계발의 장도 된다. 어린이집 교사로 활동하거나 마을 주민과 학생들에게 자기 모국어를 가르친다. 장이 서는 매달 4, 14, 24일엔 재래시장 한켠에 다문화음식 부스를 차려놓고 월남쌈과 쌀국수, 중국 만두 등 각국의 음식을 만들어 손님들에게 내놓는다.
한 소장은 “이 여성들에게 아내·엄마의 역할만 주고, 그들의 자아는 무시하는 왜곡된 시선을 극복하는 게 가장 중요하면서 어려운 문제”라고 털어놨다.
한 소장의 시선은 이제 더 먼 곳으로 향해 있다. 덕산면을 교육·경제·문화가 긴밀하게 연결된 농촌공동체로 꾸리는 일이다.
그는 “지역 농산물을 지역 내에서 소비하는 자체 경제순환이 이뤄져야 한다”면서 “카페의 경우 이윤이 적어도 이를 통해 일자리를 만들고, 지역민들이 안전한 먹거리를 소비하는 공간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도시가구와의 연계를 통해 수익을 올리는 것도 한 소장의 고민이다.
전국 각지의 후원이 큰 도움이 되고 있지만, 공동체를 꾸려가기에는 벅차다. 한 소장은 “우리 세대는 ‘너만은 도시에 가서 살아라’라는 이야기를 듣고 자랐다”면서 “이제는 농촌에 사는 것이 혜택이라는 것을 느낄 정도로 대안적인 삶의 모델을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제천=유태영 기자 anarchyn@segye.com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