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핍과 상처, 배신과 견딤의 서사‘빼곡’
김규나(42)의 첫 소설집 ‘칼’(뿔)은 우선 표지가 아주 도발적이어서 단박에 눈길을 끈다. 표지에는 코발트블루 빛깔의 짧은 원피스 차림 여자가 허벅지를 아슬아슬하게 깊숙이 드러낸 채 환한 창가에 앉아 허공을 응시하고 있다. 관능을 자극하는 한편으로 금방 부서져 버릴 것 같은 불안감이 동시에 느껴진다. 표지가 예고하는 것처럼 단편소설 11편이 수록된 이 소설집에는 결핍과 상처, 배신과 견딤의 서사들이 빼곡하게 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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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소설집을 펴낸 김규나씨. 그는 “소설을 쓰기 전에는 내가 왜 이 세상에 온 것인지 정말 그 의미를 알지 못했다”면서 “나를 표현할 수 있어서 지금 너무 행복하다”고 말했다. |
남자는 오케스트라의 수석 바이올리니스트. 정기연주회 중간에 남자의 바이올린 현이 끊어져 버렸다. 그보다 2주 전에는 이미 생의 첫 번째 줄이 끊어진 터였다. 평소 삶을 완벽하게 조율하면서 산다고 믿었던 남자이기에 그 충격은 더 클 수밖에 없었을 테다. 아내가 답답함을 호소하며 다른 남자를 구한 뒤 이혼을 요구한 것이다. 현을 조율하는 일보다 생을 조율하는 일이 훨씬 더 난해하고 힘든 일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여자의 아버지는 의료사고를 낸 뒤 모든 것을 포기한 채 요양소에서 힘든 나날을 보내고, 그녀의 어머니는 이미 어렸을 때 부녀 곁을 떠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으로 치부되는 대상이다. “가죽을 벗겨낸 들짐승처럼” 아버지는 “사랑과 용서, 희망과 동정, 심지어 위선 허세조차” 놓아버렸다. 여자가 어렵사리 의사가 되어 굳이 사체를 부검하는 일을 자원한 이유도 아버지의 상처 때문이었다. 이들 두 남녀가 결핍과 상처를 메우는 방식은 뜨겁게 죽을 듯이 서로 몸을 탐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갈증을 더 깊게 만드는 찰나의 허망한 몸짓임을 그들도 모르진 않았다.

‘내 남자의 꿈’에 등장하는 남녀도 덫에 걸린 무기력한 존재들이긴 마찬가지다. 이혼 후 칩거하며 살던 여자가 겉으론 다 가졌지만 기실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남자와 만난다. 그들의 육체적 만남은 찰나의 위안을 주지만 서로 빈 곳을 채워줄 수 없다. 이번 소설집에는 이 밖에도 ‘달 컴포지션 7’, ‘뿌따뽕빠리의 귀환’, ‘코카스칵티를 위한 플롤로그’, ‘거울의 방’, ‘북어’, ‘테트리스 2009’, ‘퍼플레인’, ‘바이칼에 길을 묻다’ 등이 수록됐다. 정교한 문장과 깊은 정한이 돋보이는 소설집이다.
조용호 선임기자 jhoy@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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