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 때문에 극장가가 울상을 짓고 있는 와중에도 <방자전>은 인기몰이를 하고 있다. 개봉한 지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아 극장에서 내려오는 영화들이 수두룩한 가운데 6월 초 개봉을 한 <방자전>은 한 달 가까이 당당하게 상영 중이다. 그렇다면 <방자전>의 인기 요소는 무엇일까.
<방자전>은 <춘향전>에 감칠맛 나는 양념 조연인 바로 그 방자를 주인공으로 한 이야기이다. <춘향전>이 영상으로 옮겨진 적은 셀 수 없이 여러 번이지만 매번 가장 큰 관심은 러브씬 그리고 노출 수위였다. <방자전> 또한 개봉 전에는 춘향 역을 맡은 조여정의 ‘노출’에 많은 시선들이 집중되었다. 그러나 <방자전>은 어디까지나 ‘방자’의 이야기가 아니던가! 원작은 물론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에서도 언제나 ‘개그’를 담당하던 역할에서 방자하게도 주인공의 자리를 차지한 방자만의 매력을 찾아보도록 하자.
풋내기 도령과 능수능란한 장모

원작에서 춘향이와 이몽룡은 16살, 동갑내기 이팔청춘의 선남선녀로 등장한다. 아무리 조선시대의 사회적 구조 자체가 ‘청년기’가 없었다고는 하지만 얼마나 어린가! 그래도 춘향이는 엄마의 적극적인 협조 하에 미모를 밑천삼아 신분상승이라는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기보다 어렵고 까다로운 목표 하에 이몽룡과 만나지만 그저 춘향이를 한 번 품어보는 것 외에 다른 복잡한 생각을 하기도 싫어하고 할 줄도 모르는 이몽룡은 말 그대로 아직 풋내기 ‘도령’에 불과하다.
사정이 이러하니 열심히 유혹을 하고, 부부가 되겠다는 ‘서약서’를 받아내도 영 미덥지가 않다. 그렇다. 몽룡은 춘향에게 몸을 백번, 천 번을 섞고 정을 아무리 도탑게 쌓는다 하더라도 언제라도 끊어질 수 있는 가느다란 동아줄 같은 가능성일 뿐 확실히 믿을만한 ‘낭군’은 아니다. 만약 춘향이 열정에 달뜬 잠자리의 맹세만 철썩 같이 믿고 기다리는 순진하다 못해 백치같은 여자였다면 확실히 매력이 떨어졌을 것이다. 다행히 춘향이에게는 절대 남자에게 ‘손해’는 보지 않게 해줄 든든한 엄마 ‘월매’가 있었다. 그녀는 딸을 위해 악다구니를 쓰고, 욕을 먹을 지라도 결코 춘향이가 남자 때문에 ‘손해’보고 우는 일은 없도록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가며 딸을 지킨다. 비록 그것이 자존심이나 품위를 지키는 것과는 다소 거리가 멀어도 월매는 개의치 않을 것이다.
연륜과 힘 그리고 섬세함
<방자전>에서 이몽룡과 방자는 한날, 한시에 춘향과 만난다. 춘향의 어미인 월매가 운영하는 술집에서 춘향은 다른 기생들 속에서 군계일학처럼 등장해 노래를 부르며 몽룡을 유혹한다. 방자는 몸종의 신분으로 몽룡과 함께 그 자리에 있다가 한 눈에 춘향에게 반한다. 왜? 너무 예쁘니까. 그때 방자는 서른이 훌쩍 넘은 나이로 열여섯 살 춘향이나 이도령보다 나이가 2배나 많다. 하지만 가족도 없고, 사랑 같은 것은 제대로 해 본 적도 없는 탓에 수줍음을 느낀다. 이를테면 방자에게 춘향은 뒤늦게 찾아온 열병 같은 첫사랑인지도 모르겠다.
그 후 방자는 춘향이에게 무례하게 구는, 힘 좀 쓰는 남자를 힘으로 제압하는 한편 몽룡과 춘향이 산으로 나들이를 갈 때면 각종 소풍에 필요한 일체의 짐들을 번쩍 짊어지고 가서는 섬세한 손놀림으로 노련하게 고기를 굽는다. 방자의 고기 굽는 솜씨는 먹어보기도 전, 냄새만으로도 잘 구워졌다는 것을 알 수 있을 만큼 일품이다. 고기 잘 굽는 남자라니, 게다가 궂은일을 귀찮아하지 않는 남자라니, 무거운 짐을 번쩍 들어 올리는 남자라니 오늘날에 보아도 좋은 남편으로써 귀감이 될 만한 자질들이다.
게다가 춘향의 신발이 방자는 물에 빠지자 앞뒤 재지 않고 몸을 날려 건져온다. 물에 젖은 그의 몸은 노동으로 다져진 잔잔한 근육들이 다부지게 어우러져 자연스럽게 눈길을 끈다. 조선 시대에 양반 남성들이 몸매 관리를 위해 운동을 따로 했을 리 만무하다. 몰에 젖은 방자의 몸에서는 하인이 끌어주는 당나귀를 타는 것이 유일한 운동인 이도령과 전혀 다른 남성미가 물씬 풍긴다. 이러니 먼저 꼬리를 친 것은 춘향인데 멋있어 보이고 싶은 순간마다 제대로 선수를 놓친 이도령은 속이 바짝바짝 탈 수 밖에 없다.
무리한 욕심을 버리고 편안한 매력으로 다가서다

방자는 춘향이에게 반한 이후로 시간이 날 때마다 같이 방을 쓰는 식객 마영감으로부터 여자를 사로잡는 비법을 열심히 전수받는다. 그리고 하나를 배울 때마다 기회를 놓치지 않고 바로 실전에 들어간다. 작업의 기술은 진심과 만났을 때, 가장 맹렬하게 발휘되는 법인지라 성공률을 매우 높다. 무엇보다 실전에 요긴한 마영감의 기술은 이몽룡이 혼자 궁리하며 밀고 당기는 기술과 차원과 거리가 다르다. 아, 가련한 이몽룡이여.
게다가 이몽룡이 가장 내세울만한 ‘양반 신분’ 역시 춘향과의 로맨스에는 방해물이다. 물론 그 신분 덕분에 이몽룡은 춘향의 관심을 얻고, 유혹의 대상이 되었지만 몽룡에게 신분의 차이란 사랑을 불타오르게 하는 구실을 하지 못한다. 춘향에게도 신분은 몽룡을 통해 넘고 싶은 벽일 뿐이다. 하지만 방자의 신분은 춘향에게 다가서는데 있어서 ‘벽’이 아니라 ‘벽을 허무는 역할’을 한다.
몽룡 앞에서 춘향은 팽팽하게 긴장한 모습으로 요조숙녀가 되려 애쓰지만 신분이 비슷한 방자하고 있을 때면 한결 편안해진다. 몽룡과 있을 때 방자에게 하대를 하던 춘향은 방자와 둘이 있을 땐 자연스럽게 반말을 주고받는다. 비슷한 신분이지만 방자는 춘향이 자신에게 하대를 할 때는 존댓말로, 또 10살 차이도 훨씬 넘는 자신에게 반말을 할 때는 반말로 그저 가만히 받아준다.
이렇게 상대방을 배려하는 ‘편안하고 부담 없는 인물’이야 말로 연애 고수에게 있어 꼭 필요한 ‘보험’같은 존재가 아니던가. 자신의 연적이기도 하지만 사랑하는 춘향이의 목표인 이몽룡이라는 존재가 있을 때, 방자는 결코 무리하게 들이대지 않는다. 대신 방자는 욕심을 버리고 틈새를 놓치지 않음으로써 양다리를 걸치는 춘향의 마음을 슬며시 차지한다.
사업수완을 발휘해 경제력을 확보하다
몽룡이 과거를 보기 위해 한양으로 떠난 뒤 남원에 남은 방자는 넘지 못할 신분의 벽을 억지로 부수기보다 자신의 위치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선택한다. 그는 장사를 해서 돈을 번다. 비록 소속은 여전히 몽룡의 아버지인 이대감 집 ‘종’이지만 그는 주인집에 돈을 지불하고 종살이를 면제받는다. 24시간 풀타임 노동에서 벗어난 방자는 한없이 자신을 낮출 줄 아는 자세와 힘쓰는 궂은일도 마다하지 않은 덕분에 차츰 ‘종’ 티를 벗는다. 역시 ‘돈’의 힘은 예나 지금이나 비슷한 면에서는 한 없이 비슷하다. 양반은 상업에 종사할 수 없지만 상놈이라는 신분을 지닌 방자는 자유롭게 부를 축적한다.
또한 월매는 방자의 사업을 은근히 돕는다. 하나 뿐인 딸내미의 ‘목표남’은 물론 ‘보험남’까지 챙기는 수완이 참으로 대단하다. 이런 어미 덕분에 춘향은 이몽룡과의 결혼에 끝까지 매달려 보거나 아니면 자신을 살뜰하게 아껴줄 방자와 맺어지거나 어느 쪽을 선택하더라도 ‘손해’를 최소화 할 수 있다. 만약 몽룡이 과거에 합격하지 못해 결혼을 하더라도 별 볼일 없을 경우, 춘향이 방자를 선택한다 해도 그가 가진 것 하나 없는 몸종과 혼인하는 신세는 면할 수 있다. 월매가 방자를 도운 것은 딸이 신분을 취하지 못할 바에야 돈 많은 남자의 아내로 떵떵거리며 살길 바라는 간절함 때문이다.
남자의 매력 중 90%를 차지하는 헤어스타일
<방자전>에서 명품 조연 연기를 펼친 오달수가 연기한 마영감이 남긴 명언 중에 “남자가 10이라면 그중 9가 머리다.”라는 말이 있다. 아무리 구질구질한 상황에 처해 있더라도 언제 ‘그녀’를 만날지 모르니 머리를 좀 빗으라는 충고와 함께 던진 말이었다. 완전히 동감한다. 원단 자체로 자체발광하며 신분을 표현해주는 비단옷을 걸칠 수 없다면 머리 스타일로 정정 당당하게 승부할 수밖에 없다.
그러고 보니 때에 따라 또 상황에 따라 화려한 갓부터 찌그러진 갓을 비롯해 관모까지 머리스타일에 다양하게 ‘소품’을 사용한 이도령과 달리 방자는 춘향이를 만날 때면 늘 하나의 헤어스타일만을 고집해왔다. 갓을 쓸 수도, 관모를 쓸 수도 없는 방자에게 어쩌면 최대한 멋있고 폼 나게 상투를 틀어 올린 헤어스타일은 자존심 혹은 자신감 그 자체일 수도 있으리라. 어쨌든 소품을 도움을 일체 받지 않았던 방자의 헤어스타일 또한 눈여겨 볼만 하다.
최신 유행하는 남자 상투 스타일이 따로 없었을 텐데 잔머리를 자연스럽게 늘어뜨리거나 동백기름을 발라 깔끔하게 정돈한 방자의 헤어스타일은 비슷한 직업에 종사하는 여느 종놈들이나 상인들과는 확실히 다르다. 아마도 얼굴 때문일 수도 있다. <방자전>의 방자는 <춘향전>을 주제로 한 작품 중에서 유일하게 이몽룡보다 잘 생긴 남자이다.
하지만 <방자전>의 방자에게서 발견한 것은 그와 같은 캐릭터의 남성은 오늘날에 더욱 필요하고, 유용하며 수요가치가 높을 것이라는 점이다. 한 여자만 바라보는 순정에, 가사노동 만능에 부지런하고 경제적인 능력도 뛰어나고, 촘촘한 잔 근육질의 몸매에 남부럽지 않은 주먹에, 자기 여자 고생하는 꼴을 죽어도 못 보는 남자라니, 이런 방자라면 이도령보다 못생겼다 하더라도 경쟁력은 충분하다. <추노> 이후로 서서히 빛을 발하기 시작한 ‘상놈’의 매력은 가장 익숙한 캐릭터인 방자를 통해 시대를 초월하는 중이다.
꽃미남 애호 칼럼니스트 조민기 gorah99@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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