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는 임지현(51) 한양대 사학과 교수가 보는 민족주의의 약점 중 하나다. 학계에서 임 교수는 ‘트랜스내셔널 히스토리(탈민족·초국가 역사)’ 전문가로 통한다. 학계의 이런 인식에는 임 교수가 지난 10년 동안 보여준 보폭의 영향이 크다. 그는 10년 전부터 ‘우리 안의 파시즘’으로 학계에 키워드를 제시했다. 이어 ‘독재에 대한 대중의 동의’로 ‘대중독재’가 이뤄졌다는 이론 틀을 정립했다. 이후 내놓은 게 트랜스내셔널이다. ‘대중독재’, ‘민족주의는 반역이다’, ‘우리 안의 파시즘’ 등 그의 저서들은 하나같이 시선을 끈다. 제목 자체가 당대의 패러다임으로 등장한 경우도 있었다. 논란은 있었지만 그의 학문적 역량이 그만큼 묵직한 덕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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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지현 교수는 “민족의 아름다움이나 정의만을 선별해 강조하고 기억하게 하는 천편일률적인 과거 방식의 역사 인식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강조한다. 임 교수는 “기존의 역사 인식으로는 21세기 우리와 인류에게 닥친 문제를 해결하기가 쉽지 않다”며 “삶의 문제를 논하지 않는 역사 교과서를 내던지고, 지금 이곳의 역사부터 창조하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설명한다. 송원영 기자 |
‘국민국가’와 ‘민족주의’에 대해 지속적으로 ‘의문 부호’를 표시해 온 그의 저술을 접하다 보면 양심과 소신을 갖춘 학자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가 정치를 했다면 ‘강단 있는 소신파 정치인’이 되지 않았을까. 정치 입문은 학자인 그에게 욕이 될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일본에서 연구년을 보내고 있는 임 교수가 최근 학회 참석차 잠시 귀국했다. 신간 ‘새로운 세대를 위한 세계사 편지’를 내놓은 직후였다. 그가 소장으로 있는 한양대 비교역사문화연구소에서 짧은 시간 만나 사진을 찍었다. 이후 시간을 내서 그간의 연구 성과를 되새겨보고, 궁금한 점을 모았다. 임 교수의 설명을 듣기 위해 그를 이메일로 다시 찾았다.
임 교수는 “트랜스내셔널 히스토리는 국가 사이를 횡단하며 관통하는 시선”이라며 “기본적으로 ‘내셔널한(국민국가적)’ 실체를 인정하고 이를 바탕으로 역사를 해석하려고 한다는 점에서 일종의 ‘역사학적 지향성’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서구에서 ‘트랜스내셔널 히스토리’가 등장한 때는 1970년대. ‘제2차 세계대전’으로 상징되는 민족주의적 역사관에 대한 반성으로 시작했다. 트랜스내셔널리즘이 인문사회학계 전반으로 널리 퍼진 때는 1990년대였다. 트랜스내셔널 히스토리가 현재의 인종·민족 갈등을 해결하는 키워드가 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임 교수의 신간 ‘…세계사 편지’에는 트랜스내셔널리즘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는 신간을 내놓고는 “국사와 세계사 교과서를 찢어버리라”고 조언한다. 교과서는 대체로 ‘만들어진 역사’이기 때문이다. 그가 보기에 주입식 역사 교육과 국가에 충성하는 국민을 양성하는데 목적을 둔 교과서는 잘못된 것이다. 신간은 10년 전 잡지 ‘우리 교육’에 연재한 역사에세이를 모태로 삼았다. 잡지에서는 중학생 딸이 수신 대상이었으나, 신간에서는 에드워드 사이드·한나 아렌트·박정희·김일성 등이 수신인으로 등장한다.
“민주화가 되었다고 해도 국가와 민족을 거의 유일한 역사적 행위 주체로 기술하는 역사 교육은 고쳐지지 않고 있어요. 민족주의를 강요하다시피하는 고정 관념 가득한 역사 교과서에 문제가 많습니다. 이를 넘어서야 합니다. 개인의 삶을 인간답고 가치 있게 하는 게 교육이잖아요. 그러기 위해서는 민족주의의 주술에 갇힌 우리를 보다 자유롭게 해야 합니다.”
# “풍요한 오류가 건조한 진실보다 소중하다”
지금까지의 역사 공부를 거부하고 ‘나의 역사’를 만들자는 사학자 임지현의 제안은 오래됐지만 신선하다. 물론 국민의 입장에서는 이런 주장이 낯설 수도 있다. 동서양의 차이를 설명하고, 식민주의와 민족주의 등의 틀로 역사를 분석해 온 대다수 독자에게는 말이다. 그러나 국경을 넘어선 시각에서 보자면 다른 생각이 들 수도 있다. 말하자면 이렇다.
일본에서는 진리처럼 평가되는 역사가 한국에서는 거짓이 되고, 동북공정을 놓고 한국과 중국은 여전히 불편해 한다. 역사를 놓고 맞선 이런 어려움은 동아시아에서만 나타나는 현상도 아니다. 프랑스와 영국은 노르망디사를 놓고 힘든 싸움을 하고 있다. 어떻게 보면 이러한 다툼은 지루한 싸움일 뿐이다. 세계 각국의 역사 교육이 국가·민족 간 갈등을 부추겨 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트랜스내셔널 히스토리’에 주목하게 된다. 이는 민족주의와 일국사 중심의 세계관이 갖는 약점을 극복하게 한다. 임 교수는 “(트랜스내셔널 히스토리는) 남북문제, 동북공정, 독도문제 등의 역사 갈등을 푸는 실마리가 될 수 있다”며 “이 차원에서 동아시아 역사는 물론 세계사에 대한 시각 변화도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그러면서 “자신과 상관도 없는 먼 과거를 파헤치기보다는 우선 네가 서 있는 곳을 파헤치라”고 강조한다.
“동양과 서양이라는 구분은 서구가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만들어낸 ‘상상의 지리’입니다. 이데올로기보다 더 강력하고 근원적인 틀이었지요. 국경을 초월하고 이분법적 시각을 청산하면 20세기 불길한 역사관과 끝을 볼 수 있어요. 파시즘·식민주의·홀로코스트 등 20세기 역사 유산과 결별할 수 있습니다.”
역사적 재료도 정부의 의도에 따라 얼마든지 오용될 수 있다는 증거는 많다. 임 교수가 사례로 든 것은 알퐁스 도데의 ‘마지막 수업’. 이 글은 독일에 점령당한 알자스 지역의 초등학교에서 프랑스어로 진행되는 마지막 수업을 그린 짧은 소설이다. 임 교수는 “어린애들에게 모국어에 대한 사랑을 불러일으키기에 딱 좋은 교재”라며 “일본 제국주의의 일본어 교과서에도 수록됐던 교재다”고 설명한다. 임 교수는 “알퐁스 도데는 프랑스에서 그리 유명한 인물도 아니고, 그의 아들은 극우파 조직의 중요한 활동가였다”고 덧붙인다.
# 역사 교육에 정치성은 배제돼야
그렇다면 역사 교육은 어떻게 시킬 것인가. “역사를 설명하고 전달하는 주체는 정부 기관이어서는 안 된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정부의 역사 교육은 정치성이 드러날 소지가 다분하기 때문이다. 임 교수는 “역사 연구는 공적인 위원회가 주도하고 정부는 지원만 해야 한다”며 “정부가 직접 나서면 역사 연구가 정치 상황에 따라 좌우되고, 즉흥적인 경향을 드러낼 수 있다”고 설명한다. 그는 단적인 예로 역사 분쟁을 연구하는 동북아역사재단의 사례를 들었다. 노무현 정부 때 설립된 동북아역사재단은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면서 지원 축소설이 나왔다. 하지만 일본 극우파가 독도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자, 정부는 재단 산하에 독도연구소를 만들면서 지원을 강화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다시 잠잠하다.
주입식 역사 교육에 반대하는 임 교수의 다음 발걸음은 ‘로자 룩셈부르크 평전’과 ‘희생자의식 민족주의’로 향하고 있다. ‘…세계사 편지’를 편집한 최세정 휴머니스트 편집장은 “임 교수의 역사 인물에 대한 연구와 관심은 기나긴 여정과도 같다”며 “로자 룩셈부르크 평전은 또 하나의 이정표일 수 있다”고 설명했다. ‘희생자의식 민족주의’의 의미도 간단치 않다. 이 책은 민족주의 강화의 한 요인으로 ‘역사적 희생자’라는 집단적 자기 인식을 다룬다. 배경은 전후 한국·일본·독일·폴란드·이스라엘 사회다. ‘우리 안의 파시즘’, ‘대중독재’, ‘트랜스내셔널리즘’ 등으로 이어진 그의 학문 궤적은 또 다른 곳으로 이어질지 모른다. 학자를 넘어 일반인에게도 관심의 테두리로 등장한 그의 동선과 보폭이 궁금한 이유다.
박종현 기자 bali@segye.com
■임지현 교수는…
한양대학교 사학과 교수. 한양대 비교역사문화연구소 소장. 1959년 서울 출생. 서강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의 대학원에서 논문 ‘마르크스, 엥겔스와 민족문제’로 박사학위 취득. 폴란드 바르샤바 대학, 영국 포츠머스 대학, 영국 글래모건 대학, 미국 하버드 대학 옌칭연구소, 국제일본문화센터 등에서 연구. 한국 사회의 본질주의적 역사 인식에 문제를 제기해 왔다. 만들어진 역사로서의 민족주의와 국사의 해체를 주장하며 학계의 주목을 받아왔다.
●저서
‘새로운 세대를 위한 세계사 편지’ ‘마르크스, 엥겔스와 민족문제’ ‘바르샤바에서 보낸 편지’ ‘민족주의는 반역이다’ ‘오만과 편견’ ‘이념의 속살’ ‘국사의 신화를 넘어서’ 등.
한양대학교 사학과 교수. 한양대 비교역사문화연구소 소장. 1959년 서울 출생. 서강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의 대학원에서 논문 ‘마르크스, 엥겔스와 민족문제’로 박사학위 취득. 폴란드 바르샤바 대학, 영국 포츠머스 대학, 영국 글래모건 대학, 미국 하버드 대학 옌칭연구소, 국제일본문화센터 등에서 연구. 한국 사회의 본질주의적 역사 인식에 문제를 제기해 왔다. 만들어진 역사로서의 민족주의와 국사의 해체를 주장하며 학계의 주목을 받아왔다.
●저서
‘새로운 세대를 위한 세계사 편지’ ‘마르크스, 엥겔스와 민족문제’ ‘바르샤바에서 보낸 편지’ ‘민족주의는 반역이다’ ‘오만과 편견’ ‘이념의 속살’ ‘국사의 신화를 넘어서’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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