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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호 장군 “한국 조종사들 딱 하루 훈련받고 F-51 몰아”

관련이슈 6·25전쟁 발발 60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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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심 하나로 적진으로… 눈대중으로 폭탄 투하
3일 만에 서울 함락은 남북 전력상 당연한 결과
지금도 싸우고 있는 한국전쟁… 항상 대비해야
지난 21일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 내 군사편찬연구소 자문위원장실에서는 특별한 만남이 있었다. 위원장인 김동호(79) 공군 예비역 소장이 손자뻘 되는 심준보(22·건국대 3년)·박혜영(20·여·성균관대 2년)씨와 60년 전 한반도에서 일어난 비극적인 전쟁과 남북관계, 천안함 사태 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참전 세대와 신세대가 국가의 존재, 국민의 책임 등에 대해 교감을 나눈 시간이었다. 김 장군은 “전쟁은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기 때문에 항상 대비해야 한다”며 “요즘 젊은 세대는 물론 국민 누구나 내 나라는 내가 지킨다는 생각을 명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동호 예비역 공군소장(가운데)이 6·25 발발 60주년을 앞둔 지난 21일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 내 참전자 명비 앞에서 대학생 심준보·박혜영씨에게 6·25전쟁과 남북 관계 등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종덕 기자
심준보 : 6·25전쟁 발발 60주년이 됐습니다. 6·25를 맞은 소회가 어떠하신지요.

김동호 장군 : 한국전쟁은 끝나지 않은, 아직도 싸우고 있는 전쟁이지. 60년이면 회갑인데 오랫동안 정전 상황이 계속돼 안타까워. 북한은 아직도 전쟁 강박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 같아 애처롭고. 특히 올해는 천안함 사건 등 남북관계에 엄청난 파국이 일고 있는데 갈등 상황이 빨리 종식돼야 해. 남과 북이 힘을 합쳐 통일이 이른 시간 내에 이뤄지기를 간절하게 바랄 뿐이지.

◇김동호 공군 예비역 소장
심 : 전쟁 직전 하신 일이 무엇인지요.

김 장군 : 전쟁 당시 19살로 대전중 6학년이었지. 전쟁이 일어나자 젊은이의 임무는 나라를 지키는 일이라고 결심하고 1950년 말에 입대했어. 어릴 때부터 하늘을 좋아해서 공군에 자원 입대했지.

박혜영 : 직접 전투에도 참여하셨나요.

김 장군 : 입대해서 전투조종사 훈련을 받고 강원도 강릉 비행장에 배속됐어. 적이 언제 도발할지 모르기 때문에 항상 긴장해야 했고 전쟁 상황이라는 것을 피부로 실감했던 날들이었지. 그런데 1953년 7월 휴전협정이 조인되는 바람에 직접 전투에 참여하지는 않게 됐어.

심 : 전쟁 당시 국군의 전력은 어떠했나요.

김 장군 : 전쟁 당시 국군은 군대라고 할 수 없을 정도였지. 남한은 미 군정이 끝난 48년까지 제대로 무장을 하지 못했으니까. 당시에는 경찰이 치안을 담당하는 주체였고 국군은 이를 지원하는 수준에 불과했어. 국군의 전신인 조선경비대 전체 인력이 7만∼8만명이었어요. 미국은 국군에 전투 장비를 지원할 경우 전쟁을 일으킬 수 있고, 그렇게 되면 수습이 불가능할 것으로 판단해서 무기 지원을 꺼렸어. 한데 북한은 38선으로 분단되자마자 소련의 지원을 받아 ‘붉은 군대’를 양성했고 전쟁 발발 당시에는 엄청난 전력을 확보한 상태였어. 전쟁 시작 3일 만에 서울이 함락된 것은 남과 북의 전력상 당연한 결과였지.
◇박혜영 성균관대 2년
박 : 당시 공군 전력 역시 궁금합니다.

김 장군 : 육군, 해군도 열악했지만 공군은 사실상 없었다고 해도 무방해. 당시 공군 전체 인원이 1800여명에 불과했고, 전투기 한대 없이 미군이 양도해준 경비행기, 준전투기가 20여대뿐이었지. 그러니 전쟁 초기에 공군은 전투에 참여하지 못했고 연락 기능만 했어요. 이런 상황에서도 공군은 전쟁이 발발하자 사제 폭탄 320여발을 지원받아 조종사 2명이 비행을 감행, 눈대중으로 적진에 폭탄을 투하하기도 했지.

심 : 당시 훈련은 제대로 받았나요. 변변한 비행기조차 없어 일본에 가서 훈련을 받았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김 장군 : 맞아. 공군은 미국으로부터 성능 좋은 전투기를 받았지만 훈련이 되지 않아 전투에 돌입할 수 없었지. 그래서 조종사들이 6월29일 일본에 있는 미 공군기지로 가서 딱 하루 훈련을 받고, 당시 최신예 전투기인 F-51(무스탕)을 몰고 전투에 참여했어. 이는 기네스북에 등재돼야 할 만큼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어요. 조국을 수호하겠다는 사명감과 애국관, 적기를 반드시 격추하겠다는 일념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지.

심 : 참전 전우 가운데 누가 가장 기억에 남나요.

김 장군 : 다른 편대에 근무했던 동기인 김세호가 기억이 나는군. 출동할 때 내 앞 편대에서 비행을 하고 관제탑으로 들어오다 추락해 사망했어. 우리 비행단 사망 1호였지. 요즘 심심치 않게 전투기 추락 소식을 들을 때마다 당시 희생된 전우들이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쳐.

박 : 전쟁 후 60년이 지난 지금 한국은 엄청난 발전을 이뤘습니다. 조국 발전에 대한 소감은 어떠신가요.

김 장군 : 전쟁 직후 한국은 농토까지 없어진 비참한 상황이었지. 미국의 지원이 없었으면 우리나라의 발전은 힘들었을 거야. 한국의 발전은 이러한 지원을 토대로 힘을 응집해 한국인 특유의 돌파력으로 돋보이는 성과를 거둘 수 있었던 거지. 전후 복구 과정에서 군대 조직이 없었으면 국가 경영을 제대로 할 수 없었을 거야. 군 출신들이 각계각층에 사회의 기초를 잡았고 이들이 발전의 선두에 섰어. 전쟁은 불행한 일이었지만 역설적으로 국가가 현대화, 국제화할 수 있는 모멘텀을 만들어냈다고 봐요.

◇심준보 건국대 3년
심 : 경제 발전의 이면에 군사문화로 인한 비민주적 사회 질서를 양산한 부정적인 측면이 있지 않나요.

김 장군 : 후진국에서 선진국으로 올라서려면 구심점이 있어야 해요. 독재라고 흔히 말하는데 비민주적 리드는 불가피한 측면이 있어. 물론 부정적인 요소가 있었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역량 결집이 필요한 시기였거든. 당시 상황을 오늘날의 잣대로 적용해서는 안 되고, 역사적 과정으로 이해해야 해요.

박 : 전후 세대인 대학생들은 6·25에 대해서 거의 모릅니다. 젊은 세대를 위해 한 말씀 해주세요.

김 장군 : 북한의 노선은 선군정치와 강성대국이야. 이는 언제라도 전쟁을 할 수 있다는 뜻이지. 우리는 항상 전쟁에 대비해야 하고, 적과 대치하고 있는 상황을 냉철하게 인식해야 해. 그렇지 않으면 전쟁을 막을 수가 없어. 만약 한반도에서 다시 전쟁이 벌어지면 6·25 때와 같이 유엔군이 대거 참전하지 않을 거야. 단지 평화유지군이 파병되는 수준에 머물겠지. 내 나라는 내가 지킨다는 생각을 명심해야 해.

박 : 최근 천안함 사태로 남북관계가 최악으로 치닫고 있는데요. 천안함 사건을 보면서 어떤 생각이 드셨나요.

김 장군 : 처음부터 북한의 소행이라고 판단했어. 북한이 아니면 할 수 있는 세력이 없기 때문이야. 정부가 허위 발표를 했다고 하고, 북한이 발표한 내용에 살을 붙여 (시민단체가) 유엔 안보리에 서한 발송을 했다니 답답할 따름이지. 원인의 원천 제공자는 생각지 않고 결과론만을 갖고 판단한 데서 기인한 일이야. 이번 사태는 햇볕정책이 낳은 부작용이야. 적의 도발에 강경 대응해야 더 이상 도발을 하지 않게 돼. 하지만 정부는 강경대응 발언만 하고 대책은 내놓지 못한 채 정치적 해결을 모색하고 있어 걱정이야. 대북 선무 방송을 대대적으로 하고 적이 도발을 하면 몇 배로 보복을 해야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고 국민이 안심할 수 있지. 그렇지 않으면 제2의 천안함 사건이 벌어질 수도 있어요.

심 : 저도 침몰 소식을 들었을 때 증거가 필요 없이 북한의 소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연평해전에 비해 희생자가 많을 뿐 북한이 도발한 것은 일맥상통합니다. 경제적 지원이 북한 국민에게 돌아가지 않고 김정일과 그 측근들이 다 차지하게 됩니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햇볕정책은 폐기돼야 합니다. 하지만 북한 주민들이 경제적 어려움에 처해 있어 인도적 차원에서 도와야 한다는 의견도 있거든요. 북한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이고 인도적 지원은 어떻게 해야 하나요.

김 장군 : 동포적 차원에서 지원은 해야 한다고 봐요. 문제는 북한은 군대가 국가의 핵심 지배층이라는 데 있어. 군부가 없어지거나 지배층이 100% 사고를 전환하면 되는데 그게 쉽지 않거든. 경제적 지원 문제는 많은 고민과 시간이 필요해. 그런 측면에서 남북경협은 계속돼야 한다고 생각해. 경협이 중요한 이유는 그나마 남과 북의 소통통로가 완전 단절되지 않고 대화 통로의 끈을 이어갈 수 있기 때문이지. 북한도 경협이 돈줄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경협 자체를 부정하지 않거든. 다만 앞으로 경협은 우리가 주도적으로 끌고 가야 한다는 거야.

박 : 우리 세대에게 북한은 남한과 다른 나라로 느껴져요. 같은 피를 나눴다고 하는데 먼 나라 이야기로 들립니다. 저는 인도적, 물질적인 지원이 아니라 북한 국민의 인식을 전환시킬 수 있는 정신적 지원이 더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한반도 통일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김 장군 : 통일에 대해 지나치게 이상적이고 희망적인 접근은 지양해야 해. 통일은 가까운 시일 내에 이뤄지지 않거든. 분단은 남과 북을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버렸어. 더욱이 우리는 동포끼리 피까지 흘리지 않았나. 통일된 연후에 민족적 결합에 어려움이 따를 것이고 동포이니 통일을 해야 한다는 전통적 방식의 통일은 있을 수 없어요. 통일이 되더라도 50년은 지나야 융합이 될 거야. 러시아의 대문호 솔제니친이 미국 등으로 망명 후 “자본주의 사회는 너무 경쟁이 심해 다시 러시아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어. 그만큼 체제가 규정한 의식과 교육이 무서운 법이지.

박 : 독일이 통일된 뒤 서독은 동독에 엄청난 지원을 했죠. 독일 국민의 설문조사를 봤더니 막대한 통일비용으로 인해 통일에 반대한다는 의견이 더 많았습니다. 우리도 통일비용이 크면 통일에 반대한다는 의견이 많을 겁니다. 그러나 그러한 불편을 감수하더라도 통일은 돼야 한다고 생각해요. 남과 북은 한 민족이기 때문입니다. 통일은 누가 지시하고 명령하는 것이 아닌 우리의 숙명이자 사명이라고 봅니다. 북한 체제가 스스로 무너져 우리에게 안기는 통일 방식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심 : 국가 안보가 중요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안보를 위해 취해야 할 우리의 자세는 어떠해야 합니까.

김 장군 : 북한의 남침으로 인해 6·25가 발발한 이유는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 수 있어요. 대한민국 군대가 북한군보다 강했으면 전쟁은 안 일어났을 거야. 스스로 국가를 지킬 수 있는 힘이 있어야지. 전쟁을 겪었으면서도 우리는 나라를 지키겠다는 생각이 부족한 것 같아. 삶의 터전을 지킬 수 있는 원동력은 국민인데 걱정이야. 특히 20∼30대는 대한민국 안보보다 북의 존재에 초점을 맞추는 것처럼 보여. 그렇게 해서는 절대 안돼. 물론 현재 우리의 국력은 안보 유지에 문제가 없지만 내부적 결속이 부족한 게 사실이거든. 평화롭게 대처하고 열린 마음으로 북한을 대해야 한다는 생각이 많은 것 같은데 이는 나라를 지킨다는 차원에서는 금물이에요. 지금도 남과 북은 체제 경쟁을 하고 있어. 북한의 도발을 막는 동시에 체제 전환 압력을 병행해야 해. 국제적 차원에서 협력해 북한 정권을 압박하고, 국민적 응집력을 확보해야 안보를 제대로 지킬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해.

심 : 전쟁은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고 우리 세대는 이를 막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말씀이 인상 깊었습니다. 우리 세대는 전쟁을 모르고, 군에 입대해도 총 몇 발 쏘고 전역하면 모두 잊어버립니다. 장군님 말씀을 항상 유념하겠습니다.

박 : 저희 할아버지도 전쟁 세대라 6·25에 대한 말씀을 여러 차례 들었습니다. 그동안 학교에서 북한과 관련해 토론도 하고 교육을 받았지만 피상적인 수준에 불과했어요. 오늘 생생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 전쟁을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앞으로 개인을 넘어서 국가와 북한에 대해 생각해야겠다는 다짐이 들었습니다.

정리=장원주 기자
>> 김동호 소장은

-1931년 11월 25일 충북 영동군 출생

-1950년 공군 자원 입대

-1953년 공군사관학교 입학(2기)

-1964∼66년 제11전투비행단 제112전투비행대대장

-1978∼79년 한미연합사령부 참모부장 겸 정보참모부장

-1981년 7월 소장으로 전역

-1993∼97년 재향군인회 사무총장

-1998∼2003년 6·25전쟁50주년기념사업위원회 위원장 보좌역

-2004년∼현재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자문위원

-2009년∼현재 (사)대한민국공군회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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