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을 바라보는 영국의 시각은 남다르다. 당시 영국은 미국 다음으로 많은 5만6000여명을 파병해 1078명 전사, 179명 실종, 977명 포로 발생이라는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특히 1951년 4월22∼25일 경기 파주군 설마리에서 벌어진 ‘임진강 전투’에서 ‘글로스터 대대’ 700여명이 전멸하는 등 커다란 아픔을 겪어야 했다.
군사전문가들은 이 같은 영국군의 희생이 중공군의 대대적인 공세를 막아냈고, 서울을 사수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평가하고 있다.
◆‘조용한 아침의 나라’는 없었다=1950년 7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에 따라 영국도 한국전쟁 파병을 결정한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군 전력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은 영국은 파병 주력부대로 ‘대영제국 전략 예비대’인 29보병여단을 택했다. 29여단은 글로스터 1대대, 로열 노섬버랜드 퓨질리어스 1대대, 로열 울스터 라이플스 1대대로 이뤄져 있었다.
![]() |
| ◇라이플스 대대의 존 쇼 소령(오른쪽)이 임진강 전투에서 후퇴하기 직전 머빈 매코드 소위에게 “내 아내에게 보내 달라”며 지프차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그러나 쇼 소령은 30분 뒤 전투 중 사망했다. 머빈 매코드 제공 |
◆임진강에서 죽음의 나흘=51년 4월22일 서울을 세번째 점령하기 위한 중공군의 대공세가 시작됐다. 30여만명에 달하는 적은 글로스터 대대와 29여단의 다른 대대, 미군 3사단을 향해 죽기살기식으로 밀려들었다. 일부는 걸어서, 일부는 뗏목을 타고 임진강을 건너는 적은 말 그대로 ‘인의 장막’이었다.
2∼3시간 동안 벌어진 첫 전투에서 글로스터 대대의 A중대 대원 120여명 중 생존자는 45명에 불과할 정도로 적들의 공세는 매서웠다. 잠시 대대본부로 후퇴했던 A중대와 D중대 생존자들은 재차 전장에 투입됐다. 땅을 팔 도구가 없던 대부분의 병사는 대검과 식판, 맨손으로 참호를 파고 사격호를 만들어야 했다.
![]() |
| ◇1951년 4월 임진강 전투에서 중공군과 격전을 벌여 글로스터 대대원 700여명 대부분이 괴멸되는 큰 피해를 입은 영국군이 임진강을 따라 행군하고 있다. 머빈 매코드 제공 |
23일 오전 모든 유엔군은 철수를 시작했지만 영국 29여단은 철수할 수가 없었다. 여단이 적의 주공격을 버틸 수 있을지, 정찰대로서의 임무를 수행할지 사단이 결정을 내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방어선 2선에 있던 적병들이 땅에서 솟아올라 영국군을 향해 공격하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공격으로 인해 영국군은 무너지기 시작했고 병사들은 후퇴했다. 특히 235고지를 사수하던 중대 병력의 대부분이 도륙당하는 비극을 맞았다.
24일 임진강 전투는 절정에 달한다. 제임스 밴 플리트 장군은 작전상 철수가 또 한번의 대규모 후퇴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방어선을 지켜내기로 결정했다.
한낮에 중공군의 이동 모습은 병사들을 공포로 몰아갔다. 날이 저물자 적의 공격이 시작됐다. 포탄이 머리 위를 날았고 박격포탄이 만들어낸 검은 연기를 뚫고 조명탄 불빛이 대지를 비췄다. 숱하게 동료가 쓰러지는 것을 보면서도 29여단 장병은 방어선을 포기하지 않았다.
29여단에 마침내 철수 명령이 떨어졌다. 하지만 철수 과정 역시 ‘죽음의 질주’였다. 탈출작전 승인이 내려졌을 때 글로스터 대대는 이미 적에 의해 완전히 포위됐다. 후퇴가 불가능한 상황에서 글로스터 대대원들은 최후의 저항 끝에 고작 41명만이 탈출에 성공했다.
![]() |
| ◇지난해 경기 가평군에 있는 영연방 참전 기념비를 찾은 6·25 참전 영국군 노병들이 헌화에 앞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앤드루 새먼 제공 |
이들은 1000명이 넘는 희생자를 냈던 한국전을 못 잊고 있다. 그러나 현재 영국인들은 한국전쟁을 잊고 있으며, 이들이 산화했던 임진강 주변에는 기념비조차 없는 실정이다.
처음 한국을 방문하는 노병들은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하는 순간 한국을 다른 나라로 착각한다고 한다. 너무나 달라진 한국의 모습에 혼란을 느낀다는 것이다.
예전에 민둥산이었던 임진강 전투 현장도 못 알아볼 정도다. 이들은 한국의 발전상을 보면서 의미 있는 전투에 참전했다는 점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고 한다.
하지만 당시 전쟁으로 인해 받은 고통은 치유가 되지 않고 있다. 당시 아픔으로 인해 노병들은 참전 당시 기억을 식구들에게조차 말하지 않는다고 한다. 참전용사인 로이 리스씨는 1950년 12월 경찰이 죄수들을 학살하는 모습이 꿈에 계속 나타날 정도로 외상후 스트레스 증후군에 시달리고 있다. 리스씨는 “너무 끔찍한 광경이 떠오른다”며 “그러나 우리는 (고국에 돌아가서) 심리상담 같은 걸 전혀 받지 못했다”고 토로했다.
6·25전쟁 60주년 기획팀=신진호·안용성·조민중·조현일·장원주 기자
Copyright ⓒ 세계일보.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설왕설래] 호류지](http://img.segye.com/content/image/2026/01/14/128/20260114518582.jpg
)
![[세계타워] 견제와 균형이라는 이름의 공백](http://img.segye.com/content/image/2025/11/19/128/20251119518380.jpg
)
![[세계포럼] 국방비 펑크와 무인기 ‘호들갑’](http://img.segye.com/content/image/2025/09/10/128/20250910520139.jpg
)
![[오철호의플랫폼정부] 누가 사회를 지배하는가](http://img.segye.com/content/image/2026/01/14/128/20260114518515.jpg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