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인슈타인 부부는 실패 다른 배경에서 성장한 두 인격체가 상호 결합해 새롭고 창의적인 업적을 내는 사례가 많다는 것은 이미 여러 차례 지적된 바 있다. 과학기술에서도 다른 환경에서 성장한 사고와 행동 유형이 상호 결합해 새로운 창의적 성과를 이룩하는 예가 흔하다. 과학적 연구 활동에는 같은 연구실에서 생활하는 공동 연구, 학술회의 및 연구 여행 등 서로 다른 환경이 결합하는 다양한 방식이 존재한다. 하지만 서로 간의 결합 가운데 가장 분명한 것은 과학자들이 서로 부부로 만나 인생을 함께 만들어나가는 방식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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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경순 포스텍 과학문화연구센터장 |
퀴리 부부는 창의적 성과
피에르 퀴리의 부인이었던 마리 퀴리(결혼 전 이름 마리아 스크워도프스카)와 아인슈타인의 첫 번째 부인이었던 밀레바 마리치는 여러 면에서 유사한 점이 많았다. 우선 두 사람 모두 어린 시절 과학의 변방 출신치고 보기 드문 능력을 발휘해 여성으로서는 특별하게 당시 과학의 선진국으로 유학했던 인물들이었다. 스크워도프스카는 러시아 치하의 폴란드에서 공부해 16세에 중등학교를 최고 성적으로 졸업했다. 마리치는 당시 남부 헝가리에 속한 베오그라드 북서부 지역 세르비아계 사람이었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탁월한 능력을 인정받아 여자로서는 특이하게 김나지움 입학을 허가받아 공부했는데, 특히 수학과 물리학에서는 학교에서 1등을 했다고 한다.
1891년 파리로 유학 온 스크워도프스카는 1894년 피에르 퀴리를 만났으며 이듬해 그들은 결혼했다. 마찬가지로 마리치도 유학을 떠나 1896년 스위스 연방공과대학에 입학했고, 여기에서 아인슈타인을 만났다.
아인슈타인과 마리치는 학창 시절 둘도 없는 학문적 동료로 지냈다. 아인슈타인은 마리치에게 보낸 연애편지에서도 자신의 상대성이론에 관한 이야기를 썼다. 아인슈타인과 마리치는 양쪽 집안 모두 반대했지만 서로 결혼하기를 원했다. 이들 사이에는 이미 결혼 전에 사생아가 있었지만, 이 아이의 행방은 여전히 묘연하다. 아무튼 1903년 마리치와 아인슈타인은 공개적으로는 아이가 전혀 없는 것처럼 결혼식을 마쳤다.
결혼 이후 마리 퀴리와 마리치의 학자로서의 일생은 크게 달라졌다. 마리 퀴리는 남편인 피에르 퀴리의 도움을 받아 검전기를 이용한 새로운 분석 방법을 방사성 원소 연구에 활용했다. 물리학과 화학이라는 서로 다른 분야에서 성장한 과학적 능력은 서로 결합돼 마침내 세계가 놀랄 창의적인 발견으로 이어졌다. 그들은 라듐과 폴로늄을 발견해 1903년 박사학위를 받는 동시에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다.
반면 마리치는 사생아를 잉태한 심리적 부담감 때문에 졸업 시험이 불확실하게 됐고, 결국은 학자로서의 길을 포기해야 했다. 더욱이 아인슈타인의 학문적 명성이 높아지면서 결혼 생활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마침내 1914년 아인슈타인이 직장을 스위스에서 독일로 옮기면서 그들의 관계는 파경으로 치달았다.
아인슈타인 부부는 실패
퀴리 부부와 아인슈타인 부부의 예는 우리에게 여러 가지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아인슈타인이 비록 이 시대 최고의 과학자라고 하지만, 창의적 과학자 커플의 측면에서 볼 때 문제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반면 퀴리 부부는 자신들뿐 아니라 그들의 딸인 이렌 퀴리도 남편 프레데리크 졸리오퀴리와 함께 성공적인 과학자 커플이 됐다.
얼마 전부터 가정의 달 5월에 부부의 날도 생겼다. 둘(2)이서 만나 하나(1)가 된다는 의미의 부부의 날(21일)을 맞이해 우리나라 과학자 커플도 서로 간의 존경과 배려로 퀴리 가문과 같이 좋은 결실을 내기 바란다.
임경순 포스텍 과학문화연구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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