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층 사람들은 모두 생존했고
89층 사람들은 모두 숨졌다
88층은 충돌 여객기의 윗쪽이다
왜 그랬을까
‘반복되는 따분한 일상에서부터 거대한 국제 정치질서의 세계까지, 무의식적 뇌 활동의 지배를 받지 않는 인간 행동은 없다.’ 이 책은 ‘히든 브레인(숨겨진 뇌)’이 우리의 일상에 영향을 미치는 무의식적 편향((unconscious bias)에 대해 실례를 들어 설명했다. 여기서 ‘히든 브레인’이란 우리가 인지하지 못한채 무의식적으로 활동하는 뇌의 힘을 가리킨다. 편향이라는 말은 ‘사람들이 생각하고 의도한 바와 행동 간의 불일치’를 나타낸다.
히든 브레인/대니얼 길버트 지음/임종기 옮김/초록물고기/1만48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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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니얼 길버트 지음/임종기 옮김/초록물고기/1만4800원 |
이 책 첫 장에 나오는 주인공 토니 거스터스는 28살 미모의 여성으로 잘나가는 회사원이다. 어느날 자신의 아파트 1층 테라스에서 커피를 한 잔 즐길 무렵 길가던 한 남자가 다가와 말을 건넸다. 길을 물어보길래 가르쳐줬더니 그 남자는 한 걸음 다가서서 다시금 길을 물어보았다. 거스터스는 ‘이런 남자가 다 있나’라고 중얼거리며 거실로 들어가려던 찰나 그 남자는 그녀를 밀치고 거실로 들어왔다. 곧바로 그녀의 블라우스를 풀어헤치고 침대로 밀어 쓰러뜨렸다. 그녀는 발버둥을 쳤지만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술냄새 확 풍기는 순간 이 남자가 자신의 행동을 기억하지 못할 것이며, 죽일 수도 있다는 불안감에 저항을 포기한 것이다. 폭행을 당한 직후 탈출해 경찰에 신고했고 경찰은 몽타즈를 근거로 며칠 후 성폭행 혐의로 한 남자를 붙잡았다.
거스터스는 경찰에 출두해 체포된 남자가 범인이라고 진술했다. 14년간 형무소 복역을 마친 이 남자는 거스터스에게 접근해 자신은 범인이 아니라는 알리바이를 입증해 보였다. 거스터스는 당시 경찰에서 폭행 당한 순간의 기억을 더듬어 이 남자가 범인이라고 지목했지만, 경찰은 당시 수사가 잘못됐다는 결론을 내렸다. 결국 거스터스는 자신이 거짓 증언을 했고 이 남자는 억울한 옥살이를 했다고 깨달았다. 그녀는 왜 그랬을까.

뇌 과학자들은 과학적으로 규명할 수 없는 뇌의 활동이 많다고 지적한다. 우리의 뇌는 감정이나 마음을 조절하고 호흡을 유지시켜주며,몸이 정상적으로 움직이도록 많은 일을 한다. 이런 반복적인 것들은 두뇌의 숨겨진 영역들이 수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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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9월 11일 오전 8시에서 9시 사이 뉴욕 시내 한복판에 있는 월드트레이드센터 건물 두 동 가운데 한 동이 알카에다 테러범들의 항공기 자폭으로 검은 연기를 내뿜고 있다. |
사람들은 스스로 집단의 결정에 따르려는 경향이 강하다. 화재 경보가 울렸을 때 모든 사람들이 제자리에 조용히 앉아 있는 이유는 단지 훈련 때문이라기보다는 자리를 지키고 있는 주위 동료들의 영향이 더 크기 때문이다.
2001년 9·11테러 당시 월드트레이드센터 88층 사람들은 모두 생존한 반면, 89층 사람들은 모두 숨졌다. 88층은 충돌 여객기의 윗쪽이다. 왜 그랬을까. 생과 사를 가른 것은 무의식적 편향 즉, 무의식적 힘에 의해 결정됐다면 믿기 힘들 것이다.
당시 88층에 있던 사람들은 북쪽 타워에서 강력한 폭발음을 들었을 때 벌떡 일어섰다.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보았지만 이내 훈련받은 대로 계단을 뛰어내려가 모두가 살아나는 행운을 누렸다. 88층에 같이 있었던 J.J.아귀어라는 사람은 89층에까지 뛰어올라가 모두 대피하라고 했지만 89층 사람들은 꿈쩍하지않고 자리를 지켰다. 그 층 사람들 모두가 집단에 의해 자리를 지켰기 때문에 불행을 맞이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저자는 무의식적 힘이 인간의 생과 사를 좌우할 만큼 강력하다고 설명한다.
다른 예도 있다. 좋은 사람들에게 결점이 없는 것이 아니며, 용감한 사람들에게 두려움이 없는게 아니다. 관대한 사람들이란 결코 이기적인 사람이 아니라는게 아니다. 하지만 그런 평을 듣는 사람들은 목적하는 바를 하기 위해 행동에 나서기 때문에 비범하다는 것이다. 뭔가를 위해 행동한다는 것은 무의식적 편향 즉 숨겨진 뇌의 영향을 받는다고 저자는 설명한다.(203쪽)
오바마 대통령은 선거전에서 유권자들의 무의식적 심리를 장악하기 위해 고도의 전략을 폈다.
한국에서 지역감정을 들먹이는 것이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듯, 인종에 대한 편견은 미국에서 화약고의 ‘뇌관’과도 같다. 인종문제를 공개적이고 노골적으로 들먹이는 것은 오히려 독이 된다. 역설적이게도 유권자들은 스스로 인종편견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오바마 캠프는 ‘인종편견’이라는 무의식적 편견을 심리학적으로 진단하고 처방한 광고 전략을 폈다. 예컨대 오바마측은 인종 문제를 거론하지않고 오히려 백인표를 집중 공략해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이다.(333쪽)
정승욱 선임기자 jswook@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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