헝가리 국민 약 990만명 중 철도요금을 전액 내는 사람은 30%도 안 된다. 전사자의 배우자, 장애 군인, 실업자, 대가족 등 수많은 대상자에게 교통요금 무료·할인 혜택이 주어진다. 노인들은 은퇴 이후 생활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 정부가 연금은 물론 무료 건강보험, 가스 보조금 등을 주며 돌봐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2008년 헝가리가 디폴트(채무불이행) 위기에 몰리면서 찬바람이 불어닥쳤다. 헝가리는 그해 10월 국제통화기금(IMF)에 손을 벌렸다. 지난해 집권한 새 정부는 보육시설 미이용 아동 지원 수당, 주택구입 보조금 등 복지혜택을 하나씩 폐지하며 긴축정책을 펴고 있다.

그리스발 재정위기가 강타한 유럽에서 헝가리 사례는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정부 빚’이 경제에 암운을 드리우면서 유럽 각국에서는 그간 늘려온 사회보장제도가 시험대에 올랐다. 그리스에서는 경제규모에 비해 과도한 복지혜택이 재정적자를 키운 주범으로 지목당하고 있다. 살림살이가 넉넉한 일부 복지국가들도 누적된 재정적자 때문에 허리띠를 졸라매야 할 처지이다. 유럽 국가들은 연금제도에 손대는 것을 시작으로 지출을 줄이려 고심 중이다. 최근 총선을 치른 영국에서는 ‘복지국가가 앞으로 살아남을 수 있겠는가’하는 우울한 질문이 제기되고 있다.
◆그리스 포퓰리즘이 키운 ‘재정적자’=“파업과 연좌시위가 긴축에 대한 우리의 대답이다.”
지난 2월 그리스 아테네를 행진하는 공무원 노조원들의 손에는 이런 배너가 들려 있었다. 석 달이 지난 지금 이들은 여전히 정부 긴축안에 총파업으로 맞서고 있다. 시위대는 정부가 부유층은 놔두고 빈곤층만 쥐어짠다고 비난한다. 그러나 빚을 내서 복지혜택을 키워온 그리스 정부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상황이다.
그리스 사태의 원인으로는 유로화 체제의 한계, 탈세와 부패, 취약한 경제와 함께 방만한 정부 지출이 꼽히고 있다. 그리스에서는 사회당과 신민주당이 교대로 집권하면서 포퓰리즘이 득세하기 시작했다. 특히 오랜 기간 군정 치하에서 억압받았던 사회당은 1980년대 집권 기간에 좌파 인사들에게 대거 평생 직장을 제공하며 공공부문을 늘렸다.
2004년 집권한 우파 신민주당 역시 겉으로는 경제 자유화를 약속했지만 일자리를 주고 표를 얻는 관행을 이어갔다. 지난해 사회당에 정권을 내주기까지 5년간 신민주당 아래서 증가한 공무원 숫자만 7만5000명이라고 영국 일간 가디언은 전했다. 그리스에서는 공공부문 종사자의 25%가 과잉인력으로 분석되고 있다. 1995∼2008년 공무원의 연평균 실질임금 상승률은 3.1%로 유로지역 평균인 1.25%의 두배가 넘었다.
포퓰리즘 정부 아래서 사회보장 지출은 점점 늘어났다. 지난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따르면 그리스의 사회보장 관련 지출은 2006년 기준으로 GDP 대비 18%에 달해 OECD 평균 15.2%를 뛰어넘었다.
사회보장 지출 증가에는 관대한 연금체계가 한몫 하고 있다. 그리스의 임금 대비 연금액 비율은 95.1%에 달한다. 다른 나라의 경우 근무기간 전체 혹은 15∼35년 임금을 기준으로 연금 액수를 산정하는 데 반해 그리스는 퇴직 전 5년간 임금을 기준으로 계산해 연금을 많이 받을 수밖에 없다. 경제 주간 이코노미스트는 이 때문에 그리스 구제금융 결정 과정에서 독일 국민은 자신들보다 10년이나 일찍 퇴직하고 연금 혜택을 받는 그리스 국민에 분노해 ‘유로존의 협잡꾼’이라 비난했다고 전했다. 독일 우파연정의 한 축인 자민당 내 경제통 프랑크 셰플러 의원은 지난 3월4일 “그리스는 무인도나 파르테논 신전 등 먼저 팔 수 있는 걸 파는 게 순리”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리스는 2001년 유로존 가입 후 저금리 대출과 해운·관광업 호황 덕분에 소비를 늘렸다. 이로 인해 이미 유로존 기준을 초과했던 재정적자는 눈덩이처럼 불어나 지난해 GDP의 13.6%로 치솟았다. 그리스 국민은 앞으로 공무원 복지수당 8% 추가 삭감과 특별보너스 폐지, 여성 연금수령 연령 60세에서 65세로 상향, 60세 이전 조기연금 수령 불가 등 강도 높은 긴축정책을 견뎌야 한다.
◆영국 ‘요람에서 무덤까지’ 옛말 되나=복지 혜택 축소는 그리스 같은 ‘문제아’ 국가만의 얘기가 아니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금융위기로 정부 지출이 급속히 늘어난 서유럽 국가들도 미래의 연금, 의료, 사회보장 비용을 줄이기 위해 고민하고 있다고 지난 4일 보도했다. 독일은 2012∼2019년 공공연금 대상자 퇴직연령을 65세에서 67세로 연장키로 했고 정년이 60세인 프랑스도 연금 시스템 개혁에 착수했다. 그리스, 포르투갈 등과 함께 경제가 부진한 PIIGS 국가에 포함됐던 아일랜드는 최근 과감한 긴축정책을 통해 금융시장의 인정을 받았다. 그러나 아일랜드는 이 과정에서 사회복지 예산 7억6000만 유로를 삭감하고 경찰·교사 급여를 15% 줄이는 고통을 겪었다.
영국에서는 당장 복지 축소가 시급한 현안으로 떠올랐다. 영국은 올해 재정적자가 GDP의 12%에 달할 것이라고 유럽연합(EU)으로부터 경고받았다. FT는 앞으로 몇년간 영국의 ‘요람에서 무덤까지’ 복지정책을 둘러싼 괴로운 싸움이 이어질 것이라고 진단했다. 지난 6일 실시된 총선의 핵심 이슈도 재정적자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이냐였다.
영국에서는 노동당이 집권한 지난 13년간 복지 혜택이 크게 늘었다. 60세 이상 노인은 재산이 얼마든 무료로 버스를 탈 수 있고 연간 250파운드의 난방보조금을 받는다. 신생아에게는 소액 채권이 주어지고 저소득 가정의 학생들은 교육 보조금 혜택을 누리게 됐다. FT는 1997년 노동당 집권시 저소득 가정의 어린이에 대한 복지예산이 36억 파운드였으나 현재는 이 규모가 240억 파운드로 불어났다고 전했다.
영국은 지난 10년간 상대적으로 낮은 실업률과 경제성장, 냉전 종식 후 여유가 생긴 국방비 덕분에 복지 확장을 추진할 수 있었다. FT에 따르면 현재 영국의 복지 분야 정부 지출은 보건 1100억 파운드, 교육 830억 파운드, 사회 보장 2180억 파운드로 모두 4110억 파운드에 달한다.
영국이 2009년 현재 GDP의 11.6%인 재정적자를 2014년까지 절반으로 줄이려면 370억 파운드의 공공지출을 삭감해야 한다. 적자분을 모두 없애려면 500억 파운드가 필요하다. 그러나 신생아 소액채권, 무료 버스 승차 등 노동당이 추가로 도입한 복지 혜택을 모두 없애도 일년에 100억 파운드를 절감하는 데 그친다.
영국 우파성향 싱크탱크 애덤스미스연구소의 에몬 버틀러 국장은 ‘복지국가’ 영국의 지속 가능성에 대해 “우리가 아는 복지국가 형태는 아닐 것”이라고 잘라 말한다. 국가평등위원회 위원인 루스 리스터 러프버러대학 교수는 “복지국가의 핵심 기둥이 무너지고 있다”며 “(복지 혜택이 줄어들면) 더 불평등하고 기회의 균등이 사라지는 사회가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송은아 기자 sea@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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