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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의 철로 한가운데서 마주친 내 피투성이 연인이여

관련이슈 은현희의 세계문학 인터뷰

입력 : 2010-05-03 09:42:13 수정 : 2010-05-03 09:4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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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안나 카레니나'


행복하거나, 불행하거나


행복한 가정은 모두 고만고만하지만 
무릇 불행한 가정은 나름나름으로 
불행하다

기차가 증기를 내뿜는 소리와 함께 선로 위로 육중한 울림이 들려왔다. 어머니를 마중 나온 브론스키는, 누이동생을 기다리고 있는 오블론스키와 함께 나란히 플랫폼에 서 있었다. 나는 그들과 함께 오래전 헤어졌던 연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기차의 바퀴 속으로 몸을 던져 죽었던 그이는 아직도 피투성이인 채로 차디찬 침목 위에 누워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았다. 나는 생동하는 모든 것들의 연인이자 빛과 환희 뒤에 가려진 그림자였다. 안나 아르카디예브나. 나의 동반자였던 그녀가 이제 한층 성숙해진 모습으로 되살아나 겨울 아침의 냉기 속으로 따스한 입김을 내뿜으며 걸어오고 있었다.

젊고 잘생긴 백작이 노부인과 함께 객차에서 나올 때부터 나는 그의 시선이 내내 안나에게 붙들려 있는 것을 보았다. 안나 또한 오랜만에 만난 오빠와 재회의 기쁨을 나누면서도 한편으로 낯선 남자의 시선을 의식하고 있었다.

외도로 인해 이혼 위기에 처했던 오블론스키는 안나의 도움으로 아내와의 관계를 회복한다. 반면 돌리의 여동생인 키티는 내심 자신의 약혼자가 되리라 기대했던 브론스키 백작이 안나를 향해 돌아서는 것을 보며 절망했다. 키티는 안나의 생기 넘치는 모습을 보며 자신조차 그녀의 불가해한 매력 속으로 빠져드는 것을 느꼈다. 

<판화 정길재>
그가 안나에게 이야기할 때마다  
안나의 눈에는 기쁨의 섬광이  
불타올랐고, 행복한 미소가 
그 진홍빛 입술을 일그러뜨렸다

한편, 레빈은 오랫동안 마음에 품고 있던 키티에게 청혼을 거절당한 후 실의에 빠졌다. 레빈은 동 병상련의 아픔을 나누고자 니콜라이 형의 거처로 발길을 옮겼다. 탈선과 방황으로 가족에게 외면당한 니콜라이는 설상가상 폐병까지 걸려 심신이 쇠약해져 있었다. 니콜라이는 자본가들 위주로 돌아가는 사회구조를 격렬히 비판하며 노동자로부터 착취를 일삼는 귀족들을 향해 악다구니를 퍼부었다. 그러나 레빈은 경제 개혁에 대한 형의 주장에 대해 전적으로 동의할 수 없었다. 레빈은 불합리한 사회제도를 개선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먼저 개인의 검약한 삶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집으로 돌아온 레빈은 자신의 생활을 두루 점검하며 신중하게 앞날의 계획을 세워나갔다.

 
눈보라 속의 불꽃

안나는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모스크바의 일을 회상하며 얼굴을 붉혔다. 무릎에 책을 펼쳐 두었지만 머릿속은 온통 브론스키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했다. 잠시 정차한 역에서 안나는 바람을 쐬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 눈보라가 열차 바퀴 사이와 역의 기둥 언저리를 향해 휘몰아치고 있었다. 사람들이 하나둘 밖으로 나와 웅성거리기 시작하자 안나는 다시 객실로 들어가려고 승강구 위에 올라섰다. 순간 흔들리는 램프 뒤쪽에서 낯익은 남자의 얼굴이 나타났다. 브론스키였다. 두 사람이 인사를 나누는 사이 요란스레 기적을 울리며 열차가 출발했다. 눈보라의 맹위를 뚫고 달리는 차 안에서 브론스키는 안나에게 그녀를 향한 자신의 마음을 고백했다.

안나는 페테르부르크의 사교계 모임에서 자주 브론스키와 부딪쳤다. 거기에는 브론스키의 접근을 돕는 공작부인 벳시의 역할이 크게 작용하고 있었다. 좌중으로부터 떨어져 앉아 밀담을 나누는 두 사람을 지켜보며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사교모임에서 돌아온 카레닌은 안나에게 경고했다. 중요한 시점에 불미스러운 일로 자신의 명예가 훼손되지 않도록 주의해 달라는 것이었다. 덧붙여 그는 안나의 양심을 거론하며 그녀 자신과 아들 세료쥐아에게 닥칠 수 있는 불행에 대해 지적했다.

그러나 수치의 대가로 얻게 된 사랑은 고삐를 풀어놓은 말의 속력으로 진창 속을 질주했다. 황제가 지켜보는 가운데 기병들의 경마대회가 열리던 날, 브론스키가 장애물 경주 도중 낙마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안나는 완전히 제정신을 잃고 몸부림쳤다. 한참 후 안나는 말의 등뼈가 부러졌을 뿐 기수에게 전혀 탈이 없다는 소식을 듣고 나서야 평온을 되찾았다.

우리의 운명이 어떻게 되었든, 또 앞으로 어떻게 되든, 그것은 우리가 초래한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돌아오는 길에 안나는 남편에게 브론스키와의 관계를 털어놓았다. 카레닌의 표정은 마치 죽은 자의 그것처럼 창백하게 변했다. 그러나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분명한 것은 자신이 결코 아내를 용서하지 않으리라는 사실이었다. 그는 소란을 최소화하고 자신의 지위를 지킬 수 있는 방법을 모색했다. 그에게 있어 이혼은 자신의 품위를 떨어뜨리고 적들에게 기회를 제공해주는 최악의 선택으로 여겨졌다.

카레닌은 신중히 생각한 후 아내에게 보낼 편지를 작성했다. 그런 후 집사를 불러 그것을 별장에 머물고 있는 안나에게 전하도록 지시했다.

안나는 편지를 쥔 손을 부르르 떨더니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런 후 다시 책상에 엎드려 흐느끼기 시작했다. 한참 동안 울고 난 후 마음에 격통이 잦아들자 안나는 눈물 어린 눈으로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내가 혼자서 무엇을 결정할 수 있을까? 말해봐, 나는 무엇을 해야 하지?” 나는 안타까운 눈빛으로 안나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급히 마차를 몰고 밀회 장소로 나온 브론스키는 간절함이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나에게 일체의 계획을 맡겨요. 난 당신이 그분을 버려주길 바라오.”

그러자 안나가 소리쳤다.

“그럼, 내 아들은!


이상적인 삶에 대하여

레빈은 가정생활에 대한 공상을 할 때마다, 지난날 모스크바에서 겪었던 굴욕을 상기했다. 쓰리고 아픈 기억을 잊기 위해서라도 그는 더욱 일에 매달려야 했다. 레빈이 농사일을 돌보고 사냥을 하며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던 어느 날, 오랜 친구인 오블론스키가 그의 영지를 방문했다. 오블론스키는 그에게 예기치 않았던 선물을 안겨 주었다. 바로 키티에 관한 소식이었다. 키티는 여전히 결혼하지 않았으며 몸이 쇠약해져 휴양차 외국에 나가있다고 했다. 그의 말대로 쉬체르바쓰키네 일가는 독일의 한 온천장에 머물며 키티를 위한 휴양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키티는 그곳에서 온화한 품성을 지닌 성녀 같은 친구, 바레니카와 깊은 교제를 나누었다. 종교적이고 헌신적인 바레니카를 통해 키티는 자신이 알지 못했던 숭고한 가치들을 하나둘 깨닫게 되었다.

레빈은 그해 여름, 들판의 풀베기에 도전했다. 일꾼들 속에 뒤섞여 풀을 베면서 그는 진정한 노동의 희열을 맛보았다. 같은 동작으로 오랫동안 풀을 베어내는 중에 자주, 말로만 듣던 무아경의 순간을 경험하기도 했다. 레빈은 광대한 풀밭이 베어지며 형성되는 건초열을 보면서 지금껏 느껴보지 못했던 삶의 충일감에 전율했다. 이후로도 환희의 시절은 계속되었다. 오블론스키의 초대로 레빈은 다시 키티와 재회했다. 어색한 시간 속에서 두 사람은 탁자에 놓인 분필로 각 단어의 머리글자만을 적으며 서로의 마음을 주고받았다. 얼마 후 레빈은 쉬체르바쓰키네 일가와 온 마을 사람들의 축복을 받으며 키티와 결혼식을 올렸다.


생명의 시간 속에서 

그는 죽음이라는 것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살고 또한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통감했다.

레빈 부부에게 있어 결혼 후의 한 달은 그들의 기억에 한평생을 통해서 가장 괴롭고 굴욕스러운 시기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시골에 돌아온 후 석 달이 지나자 두 사람의 생활은 다소 부드러워졌다. 어느 날 레빈의 집에 한 통의 편지가 배달되었다. 형의 옛 정부로부터 온 편지였다. 거기에는 니콜라이의 건강이 악화돼 위독하다는 소식이 담겨 있었다. 레빈은 키티와 함께 니콜라이가 묵고 있는 여관으로 찾아갔다. 불결한 공기 속에 뼈만 앙상하게 남은 니콜라이가 담요에 싸여 누워 있었다. 레빈은 송장과 다름없는 형의 육체를 보며 경악했다. 니콜라이는 죽어가는 중이었다.

레빈이 당황하고 있는 사이 키티는 능숙한 손길로 병자와 그 주변을 정리했다. 그녀는 빈사의 상태에 있는 사람에게 어떤 도움을 주어야 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의사가 다녀가고 종부성사를 주관할 사제가 다녀갔다. 병자의 용태는 시시각각 변했다. 고통은 일정한 속도로 그 도를 더해갔다. 병자의 온 생은, 고통과 그것에서 벗어나야겠다는 간절한 욕망에 집중되었다. 그리고 그가 제 몸을 움켜잡기 시작했을 때, 한때 그의 정부였던 여인은 임종을 예언하며 신속히 사제를 데려왔다. 사제가 임종기도를 하는 동안 니콜라이의 영혼은 소리 없이 세상을 떠났다.

며칠 후 죽음이라는 하나의 신비가 눈앞에서 채 사라지기도 전에 레빈은 키티의 임신 소식을 들었다. 키티가 오랜 산고 끝에 아들을 출산하자 레빈은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아내의 침상 앞에 무릎을 꿇었다. 침대 발치에 앉은 유모의 품에서 갓 태어난 아기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마치 촛대 위의 불꽃처럼 인간적인 생물이, 생명이 요동하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는 존재하지 않았던 생물이었다. 그리고 또 그것은 자기를 닮은 또 하나의 존재였다.


우리들의 피투성이 연인


딸을 낳고 생긴 산욕열로 인해 한 차례 죽음의 위기를 맞았던 안나는 결국 모든 것을 포기한 채 브론스키와 함께 이탈리아로 떠났다. 그리고 여행을 마친 후 브론스키의 소유지가 있는 시골에 새로운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그러나 그것은 외관상의 평화일 뿐 여전히 그들 사이에는 아직 해결되지 않은 안나의 ‘이혼’ 문제가 남아 있었다. 오블론스키가 나서서 카레닌을 설득해 보았지만 허사였다.

브론스키를 따라 모스크바로 온 안나는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지자 온갖 상념 속에서 조바심을 치며 불안에 사로잡혔다. 안나에게 있어 가장 큰 괴로움은 무엇보다 아들 세료쥐아를 만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홀로 말 못할 내면의 고통을 끌어안고 안나는 서서히 추락하기 시작했다. 하는 수 없이 그녀는 스스로를 다스리기 위해 아편의 복용량을 늘려갔다. 하지만 그럴수록 악은 그 지배력이 커져 안나를 새로운 불안 속에 집어넣고 허위의 거미줄로 칭칭 감아버렸다. 안나의 강박 증세는 점점 심각해져 갔다. 브론스키에 대한 원망과 의심이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넘나들며 불안감을 부채질했다.

악몽을 꾸고 일어난 아침, 안나는 사소한 일로 브론스키와 다투고 오랫동안 속으로만 생각해오던 마지막 경고를 내뱉었다. “당신은… 당신은 이 일을 틀림없이 후회할 거예요.”

나는 안나의 눈빛에서 섬뜩한 결의를 읽었다.

안나는 정처 없이 거리로 나섰다. “나는 프랑스인들이 말하듯 자기의 식욕을 알고 있을 뿐이야. 저거 봐, 저 아이들은 저런 더러운 아이스크림을 탐내고 있잖아.”

“아이들은 단맛을 좋아하니까.”

“그래, 그래… 우리들은 모두 단 것, 맛있는 것을 탐내지. 과자가 없으면 더러운 아이스크림이라도 좋은 거지. 아아, 저녁기도의 종이 울리고 있어.”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런 교회며 종소리며 허위가 존재하는 걸까?”

“그이는 나를 사랑하고 있다. 아아, 하지만 나는 이제 맛이 없어져버렸다.”

“우리는 본질적으로 따로따로이니까.”

“모든 시도는 끝났고 나사는 죄어질 대로 죄어져버렸다.”

안나는 역의 대합실을 가로질러 플랫폼으로 나왔다. 그리고 기차에 올라탔다. 차창에 눈부신 석양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불안하게 하는 것에서 벗어나야 해.”

“모든 거짓과 기만과 사악함으로부터!”

열차가 역에 도착하자 안나는 플랫폼으로 나갔다. 잠시 후 마부가 브론스키의 편지를 갖고 나타났다. 회답은 안나의 기대를 저버린 첫 편지의 내용과 똑같았다.

“아아, 이제 나는 어디로 가야 하나.”

그때 나는 철로 한가운데 침목 위에 흩뿌려져 있는 석탄이 섞인 모래와 그 위로 드리워진 차량의 그림자를 보았다. 안나와 내가 오랜 동행을 멈춘 바로 그 자리였다. 안나가 손가락으로 그곳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저기다!”

화물열차의 첫 번째 차량이 순식간에 지나가고 두 번째 차량이 우리를 향해 맹렬히 달려오고 있었다. 안나는 성호를 그었다. 그러자 갑자기 그녀의 모든 생이 그 찬란한 빛과 환희가 나를 힘껏 밀어내며, 바퀴와 바퀴 사이의 철로 한가운데를 향해 곤두박질쳤다. 거대하고 무자비한 것이 안나의 머리를 떠받고 그 등을 할퀴며 질질 끌고 갔다. 철로 한가운데 축 처진 몸뚱이가 대낮의 눈부신 햇살 아래 내동댕이쳐져 있었다. 빨간 입술을 반쯤 벌리고 있는 아름다운 얼굴에, 굳게 응결된 야릇한 표정을 지으며 나의 피투성이 연인이 눈을 감았다.

불안과 기만과 비애와 사악으로 가득 찬 책을 비추던 촛불이 그 어느 때보다도 환하게 확 타올라 지금까지 어둠에 싸여 있던 일체의 것을 그녀에게 보여준 뒤 파지직, 소리를 내고 어두워지다가 이윽고 영원히 꺼져버렸다.

 

 

작가와 작품소개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1828년 남러시아 툴라 지방의 야스나야 폴라냐에서 태어나 어려서 부모를 잃고 고모를 후견인으로 성장했다. 1844년 카잔대학에 입학했으나 대학 교육에 실망하여 3년 만에 자퇴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새로운 농업경영과 농민생활 개선을 위해 노력했지만 실패하고 1851년 큰형이 있는 캅카스로 가 군대에 입대했다. 1852년 ‘유년 시절’을 발표하고, 네크라소프의 추천을 받아 잡지 ‘동시대인’에 익명으로 연재를 시작하면서 왕성한 창작활동을 시작했다. 1862년 결혼한 후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니나’ 등의 대작을 집필, 세계적인 작가로서의 명성을 얻었지만 ‘안나 카레니나’의 뒷부분을 집필하던 1870년대 후반기에 죽음에 대한 공포와 삶에 대한 회의에 시달리며 심한 정신적 갈등을 겪었다. 이후 원시 그리스도교에 복귀하여 러시아정교회와 사유재산제도에 비판을 가하며 종교적 인도주의, 이른바 ‘톨스토이즘’을 일으켰다. ‘부활’에서 러시아정교를 비판했다는 이유로 종무원으로부터 파문을 당하고, 1910년 사유재산과 저작권 포기 문제로 부인과의 불화가 심해지자 집을 나와 폐렴에 걸려 아스타포보역(현 톨스토이역) 역장의 관사에서 82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옮긴이 박형규
고려대학교 노문학과 교수, 한국러시아문학회 회장, 러시아연방 국제러시아어문학교원협회 상임위원회 상임위원을 역임했으며, 현재 한국러시아문학회 고문, 러시아연방 국립 L. N. 톨스토이 박물관 ‘벗들의 모임’ 명예회원이다. 주요 저서로 ‘러시아문학의 세계’ ‘러시아문학의 이해’(공저) 등이 있고, 주요 역서로 톨스토이 자전적 3부작 ‘유년 시절’ ‘소년 시절’ ‘청년 시절’ ‘전쟁과 평화’ ‘부활’과 도스토옙스키의 ‘가난한 사람들’ ‘이중인격’ ‘죄와 벌’ ‘백치’ 등이 있다.

‘안나 카레니나’
러시아의 대문호인 톨스토이의 3대 걸작 중 하나이다. 사랑과 결혼, 가족문제라는 보편적인 소재를 다루면서 발표되자마자 전 러시아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농노제 붕괴에서 러시아혁명에 이르는 역사적 과도기에 놓인 19세기 후반 러시아 사회의 풍속과 내면생활을 150명이 넘는 등장인물과 사실적인 묘사, 엄청난 깊이와 힘으로 완벽하게 반영해냈다. 도스토옙스키와 같은 당대의 작가들에게 ‘완전무결한 예술작품’이라는 찬사를 받았을 뿐 아니라, 세계 여러 나라에 번역되어 ‘역사적 시대에 예술적 공식을 이끌어낸’ 작품의 전범으로 후대의 작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준 작품이다. 또한 10여 차례에 걸쳐 영화로 만들어졌으며 2007년에는 영국의 노턴 출판사에서 실시한 영어권 유명작가 125명이 뽑은 최고의 문학작품에 선정되었다. 2009년 ‘뉴스위크’ 선정 100대 명저에서 최고의 자리를 차지하는 등, 19세기 러시아에서 탄생한 불세출의 걸작 ‘안나 카레니나’는 100년이 지난 지금도 인간 삶의 총체적인 모습을 완벽하게 구현해낸 인류 보편의 걸작으로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고 있다.


 <안나카레니나1,2,3> 레프 톨스토이 지음, 박형규 옮김, 문학동네刊

<작품 속 인물에게 보내는 편지>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에게

레빈에게 썼던 긴 편지는 방금 전 찢어버렸습니다. 사실 <안나카레니나>의 진정한 주인공은 안나가 아닌 레빈 쪽에 가까웠지요. 레빈의 이야기는 안나가 등장하기 이전부터 시작되어서 안나가 죽고 난 후까지 지속되었으니까요. 톨스토이는 궁극적으로 레빈의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안나의 이야기를 썼던 것입니다. 

이 작품이 언급된 곳곳의 자료를 보면 레빈의 성(姓)도 톨스토이의 이름 레프에서 가져온 것이며 레빈의 생각과 말은 바로 톨스토이 자신의 인생관이고 사상이며 또한 개인적인 고백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레빈은 두말 할 나위없는 톨스토이 자신의 분신이었던 것이지요.

하지만 그런 레빈과 달리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 당신은 어디에도 부각되지 않은 희미한 존재였습니다. 안나가 그토록 혐오해 마지않던 손가락 꺾기의 명수이고, 일찌감치 부모를 여읜 후 홀로 분투하여 자수성가한 위인이며, 관료로서 철저한 신념을 바탕으로 살아온 원칙주의자, 자신의 성공과 명예를 위해 한 평생을 살아온 이기적인 사람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또한 안타깝게도 당신은 안나보다 스무 살이나 연상이었지요. 무뚝뚝하고 냉정한 성격에 도무지 끌리는 구석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을래야 찾아볼 수 없는 남자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당신은 안나의 패덕 앞에서 비극적인 표정조차 짓지 못했던 무채색의 남자였습니다.

당신은 페테르부르크 역에서 아내를 마중 나온 남편으로 처음 등장했지요. 그 때, 말하자면 독자들과 첫 대면을 하는 그 순간부터 당신은, 이 책의 주인공인 안나의 독백에 의해 개성있는 캐릭터로서의 매력을 훼손당하고 맙니다. 안나는 기차에서 내리자마자 남편인 당신의 얼굴을 발견하고 속으로 이렇게 중얼거렸습니다. '세상에! 어째서 저이의 귀는 저렇게 생겼을까?" 이미 브론스키에게 마음을 뺏긴 안나의 눈에 당신의 모습이 곱게 보일 리 없었겠지요. 덕분에 나는 처음부터 당신의 이미지를 귀가 못난 남자로 각인하고 말았습니다. 폄하된 이미지는 이어서 나온 묘사들-싸늘한 표정과 오만한 태도, 습관화된 손가락 꺾기-에 의해 절정을 이루며 끝없이 아래로 아래로 추락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결정적일 때 당신은 안나의 앞에서 발음이 새는 대실수를 범하고 맙니다. 괴롭다는 말을 게롭다고 하는 대목에서 안나도 나도 폭소를 참느라 무척 힘들었으니까요.

그런데 내내 희극적인 모습으로만 보이던 당신이 어느 순간부터 매우 아이러니한 존재로 변해가기 시작했습니다. 아내의 정부인 '알렉산드르 브론스키'와 이름이 같다는 대목부터였던 것 같습니다. 우연치고는 절묘한 우연이었지요. 안나는 브론스키를 '알렉세이'라고 불렀습니다. 당신의 이름도 '알렉세이'였으므로 참으로 헷깔리는 대목이 아닐 수 없었지요. 안나 스스로도 이상한 일이라고 뇌까렸던 것처럼 나도, 작가인 톨스토이의 의도가 과연 무엇이었을까 한참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후 알렉세이 당신의 이미지는 서서히 변해가기 시작했습니다. 희극적인 인물에서, 나이트가운 차림으로 망원경을 들고 창 너머 아내의 정부를 훔쳐보는 불안한 인물로, 그리고 급기야는 산욕열을 앓게 되어 의식이 혼미한 상태에서 안나가 했던 부탁 -원수인 브론스키와 화해해 달라-을 그대로 수락하여 연적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용서를 비는 해탈의 인물이 되었습니다. 마치 그때는 당신이 왼쪽 뺨을 맞고 오른쪽 뺨까지 내미는 성자로 여겨질 정도였으니까요. 급기야 숭고하게 변해버린 당신의 모습에 충격을 받은 브론스키는 혼란스런 마음에 황당무개한 권총자살까지 시도하는 해프닝을 연출하고 맙니다.

알렉세이 당신의 변신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 완고하고 근엄했던, 신념의 정치가였던 당신이 자신의 정체성조차 잃어버리고 판단력을 상실한 나머지 수면 중 예언을 한다는 사기꾼에게 홀려 인생의 중대 결정을 맡겨버리는 의지박약의 인물로 변모해 버렸으니까요.

안나가 불안과 강박증으로 분열을 겪고 있을 동안, 당신 역시 상처 자리가 점점 썩어 들어가 자기도 모르는 새 심장에 거대한 구멍 하나가 뚫려버렸던 것입니다. 안나의 병이 사랑이었다면 당신의 깊은 병은 바로 천애 벼랑 같은 고독이었습니다. 아무리 꼿꼿했던 당신이라도 결국 '고독'이라는 질병 앞에서는 어쩔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보다 인간적인 인간이 있을 수 있을까요.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 당신이 종교처럼 붙잡고 있었던 단 하나의 신념. 그것은 바로 '나는 결코 불행할 리 없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결국 운명의 함정에 빠져 가차 없이 불행한 인간으로 전락했습니다. 나에게는 절대 생기지 않으리라 믿었던 일이 눈앞에 버젓이 임박한 현실의 '나의 일'이 돼 버린 것입니다. 저만치 떨어져 있어서 나와 상관없을 것이라 여겼던 불행이 해일처럼 당신을 덮쳐 당신의 고결한 삶을 진창으로 만들었습니다.

행복과 불행이 백지 한 장 차이라는 것, 알렉세이 당신의 이름이 그러했듯 행복과 불행은 동명이인의 연인마냥 같은 이름으로 찾아온다는 것, 연인의 정부가 될 수도, 남편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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