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 속에서도 희망의 끈 놓지 않아

내가 그의 시를 만난 것은 1989년 가을, 가까운 서점에서 아무 생각없이 책을 뒤지다가 문득 찾아낸 ‘문학과 지성’ 시인선집 한권을 산 이후였다. 그날 그 시집을 읽으면서 나는 그의 시인으로서의 천재성에 처음 놀랐고, 나의 20대와 30대를 관통하던 그 불명확한 절망을 그를 통해 확인하면서 다시 놀랐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이러한 천재가 불과 서른의 나이에, 나를 뒤흔든 시집 한권만을 남긴 채 이미 이승을 하직한 후였다는 사실 때문에 더할 수 없이 놀랐다.
기형도의 데뷔작인 시 ‘안개’를 일부 학자들은 60∼70년대 근대화 시기에 소외되고 착취당하던 공단노동자들의 고단함을 그려낸 사회적 시라고 평한다. 그러나 다른 작품에서 보이는, 개인사적 기억을 처절한 현실주의를 통해 보편화해내는 기형도의 시세계를 고려할 때 유독 그의 데뷔작만 사회의식의 산물이라고 보고 싶지는 않다. 오히려 그의 시는 철저히 현실주의적 언어를 사용하면서도 철저히 개인사적인 일상의 굴곡을 절망적으로 그려낸 개인의식의 산물이라고 보고 싶다.
내가 가장 종종 찾아 읽는, 어쩌면 거의 암송하는 그의 시는 ‘질투는 나의 힘’이다. 이 시를 처음 읽었을 때 나는 나 자신의 노래를 발견한 것처럼 가슴 아파했었다.
‘나 가진 것 탄식밖에 없어/ 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두고/ 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보았으니/ 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중략)/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나는 지금도 기형도가 그렇게 일찍 사망하지 않았더라면, 얼마나 구차하건, 어떤 방법으로건, 혹은 질투의 힘에서건, 아무튼 살아남았더라면, 어쩌면 지금쯤은 황동규 선생의 ‘풍장’처럼 삶과 죽음에서 한 걸음 비껴선 여유를 보일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나와 친한 작가들이 20대와 30대의 절망,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의 상실이라는 인생사의 크나큰 굴곡을 겪으면서도 세월이 흐르면서 조금씩 희망의 싹을 찾아내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조금 더 살아있었더라면 ‘한때 절망이 내 삶의 전부였던 적이 있었다./ 그 절망의 내용도 잊어버린 지금/ 나는 내 삶의 일부분도 알지 못한다’(시 10월, 입속의 검은 잎, p.63)고 하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절망의 바닥에서는 결국 다시 올라올 수밖에 없으므로. 절망의 내용도 잊어버린 후에는 정말 희망의 끈을 잡을 수 있을지도 모르므로.
기형도의 시는 내게 있어 절망의 노래이다. 그러면서도 역설적으로 나는 가장 힘든 인생의 시간들을 이 절망의 노래들과 함께 했다. 그리고 지금 나는 우리 교육생들에게 항상 당부한다. 자신을 사랑하라고. 그리고 희망의 끈을 놓지 말라고. 삶에 있어 빛과 그림자는 동전의 양면일 뿐이다. 그리고 나는 기형도의 절망을 통해 희망을 향한 안간힘의 줄기를 찾아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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