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검색

[신병주의 역사에서 길을 찾다] (49) 실록에 등장하는 코끼리, 낙타, 호랑이 이야기

관련이슈 신병주의 '역사에서 길을 찾다'

입력 : 2009-11-04 01:07:53 수정 : 2009-11-04 01:07:53

인쇄 메일 url 공유 - +

조선 태종때 日王이 선물로 바쳐 ‘첫발’
엄청난 식성에 사람까지 죽여 결국 유배
낙타는 고려때 등장… 오자마자 굶겨죽여
서울 어린이대공원의 코끼리가 코로 사람에게 돌을 던졌다는 이유로 소송을 당한 이야기. 멧돼지가 도심 주택가나 학교뿐만 아니라 고속도로까지 침범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한 이야기. 먼 옛 이야기가 아니다. 바로 올해 대한민국에서 벌어졌던 사실이다. 조선시대 국가 공식기록인 ‘조선왕조실록’에도 다양한 동물들이 등장한다. 호랑이를 비롯해 코끼리, 낙타, 원숭이, 물소 등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없는 동물들이 많다. 실록에 등장하는 동물들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본다.

#1. 한양에 첫발을 디딘 조선 태종 때 코끼리

‘태종실록’에는 태종 때 들어온 코끼리 이야기가 소개돼 있다. 대마도주가 조선의 환심을 사기 위해 바친 것이었다. 실록에는 ‘일본국왕 원의지(源義持)가 사신을 보내 코끼리를 바쳤다. 코끼리는 우리나라에 일찍이 없었던 것이다’라고 하여 코끼리가 처음 들어온 상황을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조선에 처음으로 들어온 코끼리는 하루에 콩 4, 5말을 먹는 등 엄청난 곡식을 먹어치워 나라의 고민거리가 됐다고 한다. 그러던 차에 코끼리가 왔다는 소문을 듣고 구경을 나온 관리가 밟혀 죽는 사건이 발생했다.

“전 공조전서 이우가 죽었다. 처음에 일본 국왕이 사신을 보내 코끼리를 바치자 삼군부에서 기르도록 명했다. 이우가 기이한 짐승이라는 소문을 듣고 구경 갔다가 그 꼴이 추하여 비웃고 침을 뱉었는데 코끼리가 노하여 밟아 죽인 것이다.”(‘태종실록’, 1412년(태종 12) 12월 10일)

결국 코끼리는 한양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병조판서 유정현이 태종에게 보고한 내용을 보자. “‘일본에서 바친 코끼리는 이미 즐겨 보는 물건도 아니요, 나라에 이익도 없습니다. 두 사람을 다치게 했는데, 만약 법으로 말한다면 사람을 죽인 죄는 죽이는 것이 마땅합니다. 또 일년에 먹이는 꼴은 콩이 수백석에 이르니, 청컨대 주공(周公)이 코뿔소와 코끼리를 몰아낸 사례를 본받아 전라도의 섬에 두게 하소서’ 하니 태종이 웃으면서 그대로 따랐다.”(‘태종실록’, 1413년(태종 13) 11월 5일)

그러나 6개월 후 코끼리는 다시 육지로 나오게 된다. 실록에는 “길들인 코끼리를 순천부 장도라는 섬에 방목하였는데 수초를 먹지 않아 날로 수척해지고 사람을 보면 날로 눈물을 흘린다고 하니 태종이 듣고서 불쌍히 여겨 육지로 내보내 처음과 같이 기르게 하였다”는 기록이 나온다. 그러나 코끼리는 끝내 애물단지로 전락하고 만다.

“전라도 관찰사가 보고하기를, ‘코끼리란 유익하게 쓸 곳이 없는 짐승입니다. 지금 도내 네 곳의 지방관에게 돌아가면서 기르라고 했으나 폐해가 적지 않고 도내 백성들만 괴로움을 받게 되니 청컨대 충청, 경상도까지 돌아가면서 기르도록 하소서’라고 청했다. 상왕(태종)이 그대로 따랐다.”(‘세종실록’, 1420년(세종 2) 12월 28일)

이후 코끼리는 충청도 지역으로 옮겨졌으나 “코끼리는 꼴과 콩이 다른 짐승보다 열 곱절이나 되어 하루에 쌀 2말, 콩 1말씩입니다. 1년에 소비되는 쌀이 48섬이며 콩이 24섬입니다. 화를 내면 사람을 해치니 이익이 없을 뿐 아니라 도리어 해가 되니, 바다 섬 가운데 있는 목장에 옮겨 줄 것”을 청하는 충청도관찰사의 상소를 받아들여 세종은 “물과 풀이 좋은 곳을 가려서 내어 놓고 병들어 죽지 말게 하라”고 지시하였다. 요즘 같으면 전국의 각 동물원에서 데려가려고 치열하게 경쟁했을 코끼리. 그러나 조선시대에는 천덕꾸러기가 되어 이곳저곳을 전전하는 신세로 전락하는 불쌍한 동물이 되고 말았다.

#2. 고려 때 처음 한반도에 등장한 낙타, 조선 시대 또다시 논란 일으켜

◇단원 김홍도가 60세 전후에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낙타를 탄 몽골인’.
흔히 ‘사막의 동물’로 알고 있는 낙타가 실록에 자주 등장하는 것도 흥미롭다. 사실 낙타는 고려시대 역사서에도 등장한다. 태조 왕건은 942년 거란족 사신이 고려와 화해를 맺기 위해 낙타 50필을 가져오자 사신 30인은 섬으로 유배가게 하고, 낙타는 모두 굶어 죽게 하는 강경한 정책을 취하였다. 거란족이 발해를 멸망시킨 데 대해 깊은 반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려시대에 수난을 당한 낙타는 ‘조선왕조실록’에 20여 차례나 기록되어 있다. 성종 때에는 낙타가 유사시 식량 운반을 위한 동물로 인식되어 중국을 통해 수입하려 했음이 나타난다.

“호조판서 이덕량 등이 아뢰기를, (중략) ‘중국에서 낙타를 사라고 명하셨는데, 신들은 그 값이 얼마인지 모르겠으니 적당히 헤아려서 세포(細布) 30필을 보내어 사게 하소서’하니, 전교하기를, ‘순찰사를 시켜 손실을 다시 살피게 하라. 또 낙타는 무거운 짐을 싣고 멀리 갈 수 있으니, 군사를 일으킬 때에 양식을 나를 만하다. 베 60필을 보내어 사오도록 하라” 하였다.(‘성종실록’, 1486년(성종 17) 9월 19일)

그러나 대사헌 이경동 등이 낙타 수입을 반대하는 상소문을 올렸다. 먼 지방의 기이한 짐승을 비싼 값으로 구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과 고려 태조가 낙타를 죽인 사례가 있다는 것, 백성들의 살림살이가 어려운 상황에서 콩 400석에 해당하는 베 60필을 쓸 수 없다는 것 등 크게 세 가지 이유에서였다. 성종은 결국 이경동 등의 의견을 받아들여 낙타 수입을 포기하였다. 숙종은 개인적인 관심사에서 낙타를 궁중에 들이려 했다가 신하들의 반대에 부딪혔다.

“저녁에 임금이 액정서의 하인에게 명하여 낙타 한 마리를 궁중에 끌어오도록 하였는데, 승지 박세준 등이 간하니 임금이 즉시 내보낼 것을 명하였다. 그 전부터 청나라 사신이 올 때 간혹 낙타나 호마(胡馬)를 몰고 와서 의주에 떨어뜨려 두었다가 돌아갈 때 도로 데리고 가는 경우가 있었다. 이에 앞서 청나라 사신이 낙타 한 마리를 데리고 왔다가 여위어 먼 길을 달리는 것을 감당할 수 없게 되자 내버리고 갔는데, 마침 한 궁노(宮奴)가 서도(西道)에 가서 사오니, 성중(城中)의 사족과 부녀자들이 듣고 너도나도 모여들어 구경하느라 길거리에 사람들이 가득하였다. 임금이 이를 듣고 은밀히 끌어오도록 하였는데 (중략) 박세준 등이 ‘이상한 짐승은 기르지 않는다’는 뜻으로 아뢰니, 숙종은 ‘그것을 잠시 궁중으로 끌어오도록 한 것은 다만 한 번 그 동물의 모양을 보려고 한 것에 불과하다. 어찌 궁중에 두고서 기를 뜻이 있겠는가?’ 하였다.”(‘숙종실록’, 1695년(숙종 21) 4월 14일)

위의 기록에서는 ‘신기한 동물’ 낙타를 구경하기 위해 백성들이 몰려나온 상황과 숙종이 낙타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가 신하들의 반대로 물러선 정황이 나타나 있다.

#3. 공포의 대상이자 경외의 대상 호랑이

◇단원 김홍도의 ‘송하맹호도’.
‘호랑(虎狼)’이란 원래 ‘범과 이리’라는 뜻으로 잔인하고 포악한 사람을 빗대어 이르는 말로 자주 쓰였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범이라는 말 대신에 호랑이가 훨씬 친숙하게 사용되었다. ‘호질’과 같은 소설이나 우리의 전래동화에는 호랑이 이야기가 심심치 않게 나온다.

몸집이 크고 날렵하여 사람들까지 해쳐 조선시대 호환(虎患)의 주범이기도 하지만 호랑이는 민화와 각종 장신구, 관복 등에 자주 등장하였다. 그만큼 호랑이에 대한 경외심이 남달랐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호랑이는 일상적인 공포의 대상이기도 했다. 다음의 기록은 호환의 비참함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의주에 거주하던 최산석은 10세의 어린아이로 그 아비 최천동과 산으로 갈 때 큰 범이 으르렁거리며 내달아 아비를 잡아채어 가자 낫을 가지고 범의 등을 마구 치며 고성으로 구원을 청하였다. (중략) 최산석은 오른쪽 손으로는 그 아비를 잡고 왼쪽 손으로는 낫을 잡고 울기도 하고 부르짖기도 하며 온갖 방법으로 범을 막았다. 동행한 사람들이 최산석의 손을 잡고 끌고 오려 하니, 최산석이 ‘나쁜 범이 곁에 있는데, 아비를 버리고 홀로 돌아가는 것은 마음에 차마 못할 바이다. 나는 마땅히 한 곳에서 같이 죽겠다. 어떻게 먼저 가겠는가’ 하였다. 동행했던 사람들이 군사를 거느리고 달려오니, 최천동이 죽게 되어 쓰러져 누워 있었다. 최산석이 간 곳을 물으니 ‘범에게 잡혀 갔다’고 했다. (중략) 또 범 있는 곳에 가서 자취를 살펴보았더니, 범이 최산석을 잡아가서 몸뚱이를 다 먹고 두골(頭骨)만 남겨 놓았다.”(‘명종실록’, 1565년(명종 10) 1월 14일)

호환이 심하여 민가는 물론이고 궁궐에까지 호랑이가 들어와 문제가 된 적도 많았다. 특히 조선 후기에는 창덕궁 후원의 숲 속에 암범이 새끼를 쳤다는 말이 나돌아 장수들이 문책을 당하기도 했다. ‘동국신속삼강행실도’와 같은 조선시대 교화서에는 호랑이의 위협으로부터 아버지나 지아비를 구한 효자, 열녀들의 이야기들이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1623년 인조반정의 성공에는 ‘호랑이 사냥’이 큰 역할을 했다. 반정의 주모자 이귀는 광해군 때 평산부로 임명되면서, 평산에서 개성에 이르는 길목의 호랑이 퇴치를 위한 명분으로 군사들을 기를 수 있었고, 이들 군사는 1623년 광해군을 몰아내는 중심에 섰다.

사납고 용맹스러운 호랑이에 대한 두려움은 그에 대한 숭배로 이어졌다. 무엇보다 호랑이는 잡귀나 액운을 물리치는 영물로 인식되었다. 정초가 되면 국왕은 신하들에게 그림을 내려주었다. 이러한 그림을 세화(歲畵)라 하는데 세화에는 호랑이 그림이 많았다. 문에도 붙여 놓아 잡귀나 사나운 짐승이 발을 들여놓지 못하게 하였다. 백성들이 자주 찾는 산신당(山神堂)에도 으레 잘생긴 큰 범을 거느리고 있는 산신의 그림을 모셔 놓기도 했다.

호랑이가 무서움의 대상이 아닌 친숙한 모습으로 다가서는 것은 민화(民畵)에 까치와 함께 그려진 경우이다. 일명 ‘까치호랑이’로 불리는 민화에는 소나무에 앉은 까치와 전혀 무섭지 않게 해학적인 모습을 한 호랑이가 등장한다. 정월은 인월(寅月), 즉 호랑이의 달이며, 까치는 노래에도 나오듯 새해의 기쁜 소식을 전해주는 새로 알려져 있다. 무섭기만 한 호랑이와 가녀린 까치의 결합은 편안함을 안겨준다.

이외에 호랑이 그림은 삼재(三災)를 막는 부적으로 활용되었으며, 호랑이를 소재로 한 장신구와 의장 깃발이 널리 사용되었다. 또한 무관의 관복(官服)의 가슴과 등에 붙이는 흉배(胸背)에는 호랑이 그림을 수놓아 무관의 용맹함을 상징하였다. 박지원은 ‘호랑이의 꾸짖음’이란 뜻의 소설 ‘호질’에서 호랑이를 주인공으로 등장시켰다.

호랑이는 위선적인 양반인 북곽이라는 사람의 꼴을 보고 얼굴을 찌푸리며 몇 번이고 구역질을 하였다. ‘유학자들은 참으로 구리기도 하다’고 한 뒤 ‘유(儒)란 유(諛:아첨할 유)라더니 과연 그렇구나’ 하면서 양반 유학자들의 위선과 아첨, 이중인격을 신랄하게 꾸짖었다. 조선시대 호랑이는 양반까지 꾸짖을 수 있는 위엄을 갖춘 동물이었던 셈이다.

건국대 사학과 교수 shinby7@konkuk.ac.kr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피니언

포토

배드빌런 윤서 '상큼 발랄'
  • 배드빌런 윤서 '상큼 발랄'
  • 배드빌런 켈리 '센터 미모'
  • 있지 유나 '완벽한 미모'
  • 박주현 '깜찍한 손하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