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를 향한 그리움은 또다른 그리움을 낳고 마지막에는 '곡두'를 낳아 ‘곡두’란 환영(幻影)의 의미를 지닌 우리말이다. 일종의 ‘헛것’ 같은 것을 이르는 말인데 소설가 함정임(동아대 문예창작과 교수·45)씨가 일곱 번째 소설집의 표제로 이 ‘곡두’(열림원)를 내세웠다. 표제작을 포함해 10편의 단편이 수록된 이 작품집을 관통하는 것은 그리움과 상실의 정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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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집의 배경으로 등장하는 부산 ‘달맞이언덕’에서 만난 작가 함정임씨. 그는 “살아온 날만큼의 회한의 무게와 소설을 써온 날만큼의 부끄러움에 몸서리를 친다”고 작가의 말에 썼다. |

이어지는 ‘자두’는 그녀와 결혼할 ‘그’의 시각으로 전개되는 단편이다. 그녀가 오빠를 만나는 대신 그 오빠로부터 받아온 그림을 모티브로 자두 이야기가 펼쳐진다.
식탁에는 언제나 검붉게 농익다 못해 터질 듯 향기로운 탐스러운 자두를 놓아두었는데, 그것들이 바닥을 구르다 벽에 부딪쳤다. “몇 알은 서로 떨어질 수 없는 심장처럼 자두 두 알이 서로 옹송그리며 한 덩어리로 붙어 있었다.”(67쪽) 이 문장이야말로 작가가 굳이 이 단편 제목을 ‘자두’로 붙인 이유를 충분히 설명해낼 수 있을 것 같다. 원했든 원치 않았든 이별은 필연적으로 그리움을 낳고, 그리움은 다시 아득한 ‘곡두’를 낳는다. 현실에서 붙잡을 수 없고 만날 수 없는 것들의 운명은 곡두일 수밖에 없다.
세 번째 작품 ‘상쾌한 밤’은 오빠의 시각으로 이어진다. “그가 엎드리기 시작한 것은 열 살 무렵, 계모가 아버지의 아들을 낳고, 생모의 기억이 점점 뇌리에서 사라지고 있음을 자각하고부터였다.”(86쪽) 어느날 외삼촌이라는 남자가 나타나 생모의 모습이 담긴 1978년 5월의 사진 한 장을 보여준 뒤 금방 암으로 세상을 뜬다. 태어나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배다른 여동생의 결혼식에 참석하러 상행선을 타는 대신 생모의 흔적을 찾아 하행선을 탄 오빠는 이렇게 탄식한다. “생면부지의 오빠를 만나려는 여동생이나 1978년 5월 송정의 그녀를 찾아온 자신이나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93쪽) ‘33번 기억의 하루’라는 작품은 2035년을 배경으로 그린 미래소설 형식인데, 언제든지 기억을 꺼내어 다시 체험할 수 있는 ‘메모리즈 뱅크’라는 게 등장한다.
부산발 베이징행 초고속열차를 타고 가던 P가 서울역에서 중도에 내려 33번 기억을 뱅크에서 꺼낸다. 그 33번 메모리 속에 현생에서는 죽음으로 인해 만날 수 없는 Y라는 친구와, 그 역시 사랑했던 Y의 아내 J 이야기가 펼쳐진다. 기억 속에 등장하는 모든 것은 실체가 사라진 환영이라는 점에서 기억이나 추억 역시 모두 곡두라 할 만하다. 따지고 보면 인생이란 평생 이 곡두와 벌이는 숨바꼭질인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 소설집에는 이 작품들 외에도 ‘달콤한 눈물’ ‘행인’ ‘킬리만자로의 눈[目]’ ‘백야’ 등이 수록됐다.
조용호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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