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작업으로 남해안 찍고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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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안개 사이로 뻗어올라간 소나무의 선 굵은 모습을 사진에 담아내고 있는 배병우 작가. 그는 자칭 카메라를 붓 삼아 수묵화를 그리는 ‘빛의 노동자’라고 말한다. |
“사진의 음영을 없애고 그냥 선으로 가는 걸 시도해 보고자 했습니다. 한국그림에서 음영이 생략되고 선 중심으로 가는 것을 사진에서 구현해 보고 싶었지요.”
그의 소나무와 오름 사진은 이를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사진은 종종 ‘빛의 그림’으로 불린다. 서양에서는 르네상스시대부터 사진기술의 영향으로 미술작품에 빛의 명암을 십분 활용했다. 하지만 동양에서는 피사체의 명암보다 주로 선을 이용하여 그림을 그렸다. 배병우 작가는 이런 점에 착안해 자신의 사진작업에서도 선으로만 표현해보자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
수묵화의 매력은 뭐니 뭐니 해도 여백의 미에 있다. 그는 역광을 이용해 사진 뒷면의 배경이 여백처럼 다가오게 포착한다. 안개 낀 미명의 빛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피사체와 주변의 명도차이가 확연하지 않은 조건에서 얻어지는 사진이다.
결국 그의 사진은 수묵화의 선과 여백을 사진으로 구현한 셈이다. 그는 20대 말에 제주에 가서 오름에 반했다. “음기가 강한 곳이라 무덤도 많고 남근석이 세워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여성의 곡선으로 보였습니다.” 그는 하와이나 타이티 등 수많은 화산섬에 가보았지만 예각을 가진 남성 섬이었다. 화산섬이지만 여성적인 섬은 제주도가 유일하단다. 오름의 선과 아스라한 배경은 그의 ‘수묵화 사진’이 됐다.
그는 스페인 알함브라 궁전도 찍었다. 우리의 풍경을 담아오던 그가 머나먼 알함브라궁을 찍은 사연은 200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동양의 사진작가로는 처음으로 스페인의 티션미술관에서 개인전을 연 그에게 스페인 정부 문화재 정책 담당자가 찾아왔다.
그는 작가에게 알함브라궁의 정원과 숲을 찍어 달라 의뢰했고 작가는 다른 조건 없이 대신 2년간 마음대로 사진을 찍게 해 달라고 요청했다. 스페인 측은 이를 받아들였고 이후 작가는 올해 2월까지 알함브라궁을 15차례 방문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이 궁전의 아름다움을 렌즈에 담았다.
“그들은 저의 수묵화적인 사진에 주목한 것입니다. 사진을 막 찍으면서 놀란 게 거기 있는 가장 큰 나무가 소나무였다는 거예요. 알함브라궁 뒤쪽에 산이 있는데 그 산의 주된 나무가 다 소나무예요. 나무 분포가 남해안과 비슷해 소나무가 많은 거죠. 공간배치도 창덕궁과 비슷해요. 후원이 있고 곳곳에 작은 연못이 있는 점이 그래요. 그래서 알함브라궁 작업이 이전의 작업들과 특별히 다르다고 느끼진 않았어요.” 그는 창덕궁과 알함브라궁의 작업에선 아트와 건축의 중간자적 입장에 섰다. 건축가들의 조언을 받았다는 얘기다. 그의 손에는 파노라마용 린호프 카메라와 건축물 재현에 적합한 8×10카메라가 들려 있다.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미술관에서 12월 6일까지 열리는 배병우사진전에선 그의 사진작업 모두를 볼 수 있다. 그는 최근 1년간 여수와 남해안의 정경을 찍었는데 앞으로는 제주에서 여수까지 남해안의 정경이 마지막 주제가 될 것 같다고 말한다. “소나무를 1984년부터 25년간 찍었는데 앞으로 남해안을 25년간 찍을 수 있다면 정말 행운이겠죠.” 그는 추석연휴 마지막 날인 4일에도 고향인 여수일대를 돌아 보았다. 독일의 사진작가인 엘가 에서가 제자인 칼스루헤대학 미술학부 학생 10명도 이끌고 동행했다.
“사진은 현대의 붓입니다. 문제는 그 붓으로 무엇을 그리는가 하는 것이지요. 카메라 기술만 좋다고 모두 다 사진가는 아닙니다. 저는 예술가이지 사진가가 아닙니다. 사진은 내가 가지고 있는 감성을 표현하는 도구일 뿐입니다.” 그는 사진과 미술을 구별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무엇을 어떻게 표현하는가가 중요할 뿐, 사진은 표현의 도구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의 정신적 스승은 헝가리 출신의 미국 화가 겸 사진가 나즐로 모홀리나기(1895∼1946)다. 20대 때 책으로 접해 사진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해준 인물이다. “모홀리나기는 사진은 빛 그림이고, 카메라는 연필이라고 했지요.” 초등학교 시절 그림 잘 그리는 아이였던 그는 고1 때부터 카메라를 잡았다. 그리고 대학 때 본격적으로 사진 작업을 시작했다.
배병우 ‘소나무’ 사진이 유명해진 계기는 팝스타 엘턴 존이 2005년 당시 2700만원을 주고 구입하면서부터다. 이명박 대통령도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에게 배병우의 소나무 사진집 ‘청산에 살어리랏다’(열화당)를 선물했다. (02)2188-6000
편완식 기자 wansik@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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