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로운 줄 알지만 쓸 수밖에”… 농민 36% “구역질”
장기 노출 땐 ‘만성 중독’ 위험… 신경장애 부를 수도
지난 9일 경기 파주시 조리읍. 14년째 비닐하우스에서 장미를 키워온 김종성(47)씨는 이날도 평소와 같이 농약 방제에 나섰다. 제대로 된 방제복이 없는 그는 어부들이 작업할 때 입는 방수복과 낡은 장화를 꺼내 신었다. 머리는 학생들이 흔히 쓰는 야구 모자로 가리고, 입에는 얇은 천 마스크를 둘렀다. 찜통 같은 비닐하우스에서 작업을 하며 미끄러운 장갑까지 끼는 건 무리다. 병해충용으론 비교적 독성이 약한 ‘올스타’를 뿌리는 작업이지만 방제를 시작하자마자 하우스 전체에 불쾌한 농약 냄새가 가득 찬다.

농촌진흥청이 2006년 ‘농작업 위해 요인’을 조사한 결과 농민들은 농약(41.2%)을 가장 위험한 요인으로 꼽았다. 농약을 뿌린 후 30% 이상이 심하게 지치거나 두통과 어지럼증·눈의 자극 등을 느꼈고, 구역질과 구토증이 나타난다는 응답도 36.6%에 달했다. 하지만 농민들이 농약 중독에 대비해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
시중에 방제복이 나와 있지만 비싼 가격과 홍보 미비 등으로 보급률은 미미하기만 하다. 적게 잡아도 수천만원이 들어간다는 농약 자동 살포 설비 설치는 돈 없는 농민들에게 언감생심이다. 농약 값이 크게 올라 효과 좋고 독성이 덜한 고급 농약을 쓰는 것마저도 어려운 게 농촌 현실이다.
![]() |
◇장미를 재배하는 김종성씨가 비닐하우스에서 농약을 뿌리고 있다. 방수복을 입고 모자와 마스크를 쓴 김씨지만 두 시간 이상 농약에 노출되고 나면 머리가 어지럽기 일쑤다. 이제원 기자 |
더 위험한 것은 농약에 장기간 노출될 때 나타날 수 있는 이른바 ‘만성 중독’ 상황이다. 각종 연구를 통해 농약이 신경장애, 신경염, 지각이상, 간질, 암 등의 원인이 된다는 사실이 알려져 있다.
농진청 관계자는 “초기에 사용되던 농약들 중에서 암 발생 증거가 있거나 가능성이 있는 것들은 사용이 금지되었다”며 “그러나 농약에 오래 노출되면 문제가 생길 수 있으므로 사용량을 줄이는 것이 좋다”고 말했다.

특별한 제재 사유가 없는 한 국내에 등록된 농약은 10년에 한 번씩 위해성을 재평가받는다. 농진청은 “2011년 등록 만기가 도래하는 고독성 농약 13종 중 많은 수가 업체 등의 자료 제출 포기로 재등록이 안 될 것으로 예상된다”고 밝혔다. 이들 농약의 위해성이 그만큼 높다는 반증이다.
농약의 이 같은 위험성에도 우리나라에는 아직 제대로 된 중독 통계조차 없다. 급성 농약 중독의 경우 통계청에서 조사하는 농약으로 인한 사망 통계가 전부다. 이는 대부분 자살자 숫자여서 농민이 얼마나 농약중독에 노출돼 있는지 정확히 알 수 없는 형편이다. 만성 중독의 경우 이를 측정할 근거조차 마련돼 있지 않다.
순천향대학교 부속 천안병원 홍세용 교수(신장내과)는 “장기간 농약 노출로 병을 얻더라도 국내 의료진단코드엔 ‘만성 중독’ 코드가 없어 일반 질병으로 분류할 수밖에 없다”며 “농약에 오래 노출되면 신경계, 면역기계, 내분기계 등에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농약이 농민 건강에 미치는 영향을 정확히 파악하려면 지속적인 관찰과 연구가 필수적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이같은 노력을 찾아보기 힘들다. 관련기관에서는 최선을 다하고 있다지만 워낙 인력과 예산이 부족한 탓이다.
고려대 이원진 교수(예방의학교실)는 “농약중독을 막기위해서는 장기적이고 체계적인 연구가 필요한 만큼 하루라도 빨리 이를 시작해야 한다”며 “9만여명의 농민을 대상으로 수십년간 연구 관찰이 이뤄지는 미국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프랑스의 경우 50만여명의 농민에 대한 조사 연구가 진행 중이기도 하다.
특별기획취재팀=염호상(팀장)·박성준·안용성·엄형준·조민중 기자 tamsa@segye.com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