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녘 보고 있노라면 지뢰밭 걸은 느낌”
부산시 기장군 장안읍에서 농사를 짓는 구태관(48)씨는 벼를 수확하다가 두 차례 콤바인 사고로 소중한 손을 모두 잃었다. 고령으로 일하기 어려운 마을 노인들을 돕는 중이었다. 손 없는 자신의 모습이 거울에 비칠 때면 지금도 마음이 아프지만 이웃을 도왔던 것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구씨와의 인터뷰를 재구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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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갑작스러운 농기계 사고로 두 팔을 잃은 구태관씨가 지난 15일 마을 논 앞에서 끔찍했던 사고 경위를 설명하고 있다. |
첫 번째 사고는 하늘이 눈 부시도록 푸른 1999년 11월 가을 날 일어났습니다.
가을 수확 때만 되면 ‘밥 먹을 틈도 없이’ 바빴습니다. 젊은 사람들이 도시로 빠져나가면서 몇 남지 않은 젊은 일꾼인 저에게 도움을 청하는 이웃 할아버지, 할머니를 도저히 내칠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고가 일어난 그날도 오랫동안 함께 해와 눈감고도 다룰 수 있는 콤바인으로 수백 평 논의 벼를 수확해야 했습니다. 새벽부터 시작한 일은 순조롭게 잘 이뤄지고 있었습니다. 새참도 맛있게 먹고, 황금빛으로 잘 여문 벼이삭을 바라보며 콧노래도 불렀지요. 그러던 중 맑았던 날씨가 점점 흐려지더니 한바탕 비라도 퍼부을 것 같았습니다. 계획한 일을 마치지 못하면 다음날 부탁받은 일을 미뤄야 했기 때문에 갑자기 맘이 급해졌습니다.
서둘러 기계 작업을 끝낸 뒤 낫으로 미리 베어놓았던 벼를 콤바인 탈곡 장치에 넣을 때였습니다. 체인 벨트에 벼를 물려주면 자동으로 탈곡이 될 수 있도록 설계된 장치였죠. 오른손으로 무심코 벼를 물려주는데 옷 소매가 당겨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벼에 걸렸거니 생각하고 고개를 들어 돌아보는 순간 오른손 다섯 손가락은 체인에 빨려들어가고 있었고 빨간 피가 체인에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고통을 느끼지도 못할 정도의 찰나였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왼손으로 오른손을 힘껏 잡아당겨 빼냈지만 손목 아래로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정신을 차려보니 그제야 너무나 소중한 오른팔을 잃어버렸다는 상실감, 미래에 대한 불안함이 밀려왔습니다. 세 아이의 아버지로, 살아갈 날이 구만리처럼 남은 제 나이 38살 때였습니다.
2000년 10월엔 생각하기도 싫은 두 번째 사고를 당했습니다.
한쪽 손을 잃은 충격에서 벗어나고자 마음을 다잡고 다시 삶에 적응하기 시작했습니다. 저만 기다리는 동네 어르신들 얼굴이 차마 눈에서 떨어지지 않더군요. 이를 악물고 악착같이 버텼습니다. 멀쩡한 왼쪽 손이 남아 있었고 다친 팔도 불편하지만 어느 정도 회복됐습니다.
다시 마을 어르신으로부터 벼를 수확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솔직히 많이 망설였습니다. 가족의 반대도 심했고요. 하지만 무리하지 않는다면 제가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아서 일을 맡았습니다.
한 손으로 작업을 하려니 불편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평생 그렇게 많은 주의를 기울이며 벼를 수확한 적은 없었을 겁니다. 겨우 작업을 마치고 콤바인 정비만 하면 되는 순간. 콤바인을 켜 둔 채 점검을 한 게 실수였습니다. 전날 내린 비로 미끄러워진 논두렁을 밟자마자 몸이 균형을 잃었고 무의식적으로 콤바인에 왼손을 짚었습니다. 체인에 빨려들어가는 왼손을 뭉툭한 오른팔로 끌어당겨 보려고 했지만 소용없었습니다. 결국 왼쪽 팔마저 어깨에서 약 15㎝만 남기고 모조리 콤바인이라는 괴물에 희생당했습니다.
1년 새 두 번의 사고로 양손을 잃었으니 정신적 충격도 컸습니다. 이로 인해 아버지와 갈등을 빚는 등 불효도 저질렀죠.
기계를 잘 안다는 자만심과 순간적인 방심이 제 인생을 바꿨습니다. 지금도 이 모든 것을 잊을 수는 없습니다만 나름대로 삶에 대한 의지를 불태우고 있습니다. 트랙터를 다시 몰 수 있게 됐고 편의장치를 장착한 자동차도 운전합니다. 물론 마을 어르신들을 돕는 일도 계속하고 있죠.
생계는 노모(72)와 아내가 짓는 야채 농사로 근근이 이어가고 있습니다. 세 아들도 저를 잘 이해해주고 있습니다. 다만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약간의 땅 때문에 장애연금을 못 받는 등 아이들에게 물질적으로 충분히 못해주는 것이 마음에 걸리네요.
저는 그렇다 치더라도 크고 작은 농작업 사고로 어렵게 살아가는 농민이 많을 겁니다. 이들에게 정부가 더 많은 관심을 기울여주고 배려해줬으면 하는 게 작은 바람입니다.
제 개인적인 소망은 물론 잃어버린 손을 되찾는 것입니다. 없는 살림에 몇 번이나 의수를 차 봤습니다만 그때마다 실패했습니다. 수백만원 하는 독일제 의수에는 자동 센서가 달려 있었습니다.
하지만 센서가 땀에 젖어 오작동이 일어나기 일쑤였고 더 싸고 간단한 것들은 너무 불편해서 지금은 차라리 그냥 없는 채 사는 게 편합니다. 얼마 전 신문에서 뇌사자 팔로 이식 수술을 할 수 있다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시간과 돈만 있다면 언젠가는 꼭 해보고 싶은 수술입니다.
수확철인 요즘, 들녘에 나가 있노라면 이런 생각이 들곤 합니다. ‘약 50년 동안 난 묻혀 있는 것을 알면서도 작업을 해야 하는 지뢰밭을 걷고 있었구나.’
특별기획취재팀=염호상(팀장)·박성준·안용성·엄형준·조민중 기자 tamsa@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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