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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쟁은 허다하지만 제대로 된 논쟁이 없다

입력 : 2009-09-25 18:09:12 수정 : 2009-09-25 18: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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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쟁 없는 시대의 논쟁/영국사상연구소 엮음/박민아·정동욱·정세권 옮김/이음/2만5000원

영국사상연구소 엮음/박민아·정동욱·정세권 옮김/이음/2만5000원
김대중·노무현정부 동안 TV와 라디오는 토론 프로그램 전성기였다. 심지어 교육방송인 EBS마저 토론 프로그램이 편성돼 토론공화국으로 불릴 정도였다. 민주주의의 요체인 토론은 물론 좋은 일이다.

하지만 토론 문화가 제대로 형성돼 있지 않은 상황에서 토론 과잉은 오히려 분쟁을 조장하는 등 부작용도 만만찮다. 그토록 많은 토론 프로그램에서 타협점을 찾은 경우를 본 일이 거의 없다. 매번 편을 나눈 출연자들이 자기 주장만 펼치다가 시간을 허비하기 일쑤였다.

상대방 말 무시하기, 발언 중 끼어들기, 말꼬리 잡기는 예사다. 심지어 사회자의 제지도 안 통할 때가 허다하다. 다른 주장이나 목소리는 토론과 논쟁의 대상이 아니라 늘 타도해야 할 적(敵)으로 간주한다. 이쯤 되면 토론이 아니라 말싸움인 셈이다. 이런 모습은 생중계되는 국회 상임위원회나 공직후보자 청문회 과정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영국사상연구소가 발간한 ‘논쟁 없는 시대의 논쟁-리얼리티TV, 윤리적 관광, 동물실험, 대체의학, 맞춤아기’는 제대로 된 토론과 논쟁은 이렇게 하는 것이라는 전범(典範)을 보여주는 책이다. 원칙을 확인하면서 합리적으로 진행되는 논쟁은 사회의 지적 자원을 풍부하게 늘리는 역할을 하며 그 사회가 민주주의 원칙에 어긋나지 않는 좋은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해낸다고 전제하는 책은 어떤 주제를 둘러싸고 다른 입장들이 어떻게 합리적인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 산치오 라파엘로가 그린 벽화 ‘아테네 학당’(바티칸미술관 소장)의 일부분으로 스승과 제자 사이인 플라톤(왼쪽)과 아리스토텔레스가 토론하는 장면이다. 플라톤이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키고, 아리스토텔레스가 땅을 가리키는 것은 두 사람의 철학적 차이뿐 아니라 극명한 성격 차이도 반영하고 있다.
방식으로 논쟁을 하는지, 그리고 그 결과를 어떻게 실제 정책 결정이나 생활에 적용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우리 사회는 아직도 이데올로기 과잉이라는 질병을 앓고 있으며 목적을 숨긴 대중 선동에 취약하다. 사람들은 ‘허구로 만든 진실’에 쉽게 미혹되고 이내 냉정함을 잃는다. 정쟁은 허다하지만 제대로 된 논쟁이 없기 때문이다. 논쟁은 없고 승패만 있는 사회에서는 힘을 얻기 위한 눈먼 열정만 자극한다.

다른 목소리를 인정하고 그 목소리 하나하나에 서로 귀를 기울이는 사회, 합리적인 목소리가 통용되는 사회, 다원화된 사회가 되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 바로 논쟁이다.

책은 먼저, 우리가 토론해야 할 ‘시대의 논쟁’은 무엇인지부터 탐색한다. 논쟁 주제를 찾는 원칙은 ▲전문가들의 전유물로 여겨지는 주제들 중에서 대중적인 토론을 필요로 하는 주제는 없는가? ▲정치적 올바름이라고 하는 것에 너무 경도되어 아예 논쟁의 가능성마저 봉쇄해버린 경우는 없는가? ▲우선순위는 어떠한 생각에 정면으로 맞서고 부딪히는 일을 피하려고만 드는 지금의 나약한 문화를 뿌리째 뒤흔드는 효과가 큰가? 등이다.

이렇게 해서 ‘리얼리티 TV’, ‘윤리적 관광’, ‘동물실험’, ‘대체의학’, ‘맞춤아기’ 등 다섯 가지 주제가 선정된다. 그리고 각각의 주제에 대해 서로 다른 입장을 가진 논자들을 4∼5명씩 찾아 토론회를 조직한다. 흥미로운 점은 대학 교수 등 학자들보다 현장 활동가가 더 많이 참여했다는 점이다.

대체의학과 맞춤아기 토론에는 의사·간호사·인권운동가가 참여했고, 공정여행에 관한 논쟁에는 작가·여행가·자선단체 활동가·지리학자가 토론자로 발탁됐다.

이들은 합리적이고 설득력 있는 논리를 펼친다. 학문적인 이론이 부족하더라도 풍성한 사례를 들어 촘촘하게 짜인 논증을 펼쳐나가는 이들의 글에는 토론문화가 발달한 사회 배경이 엿보인다. 이 책은 그 토론회들의 결과물이다.

조정진 기자 jjj@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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