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등·반목 거듭하다 화해로 유종의 미 김대중(DJ) 전 대통령의 서거로 반세기 가까이 한국 정치사를 장식한 ‘3김(金) 시대’가 막을 내렸다.
DJ와 김영삼(YS) 전 대통령, 김종필(JP) 전 국무총리는 1960년대 이후 3김으로 불리며 한국 정치의 기둥으로 자리매김했다. 호남의 DJ, 영남의 YS와 충청의 JP는 이름만으로도 그 지역을 대표하는 한국 정치의 아이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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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당 대표 시절 국회 귀빈식당에 3당 총재 회담을 위해 모인 3김. 왼쪽부터 김영삼 통일민주당 총재, 김대중 평민당 총재, 김종필 자민련 총재. 세계일보 자료사진 |
DJ와 YS는 1967년 신민당 원내총무 경선에서 40대 기수론을 내걸고 첫 대결을 펼치며 야당의 새로운 지도자로 혜성처럼 등장했다. JP는 1961년 처삼촌인 박정희 전 대통령의 5·16 군사쿠데타에 가담하면서 유신의 주역으로 정치 전면에 나섰다.
1979년 10·26 사태로 박정희 전 대통령이 서거하면서 3김은 새로운 정치적인 도약을 준비했지만 5공화국 신군부의 등장으로 그 뜻을 펼치지 못했다.
3김은 1987년 6월 민주화 항쟁으로 대통령 직선제가 도입되자 다시 정치무대에 등장했다. 야권 후보단일화에 실패한 DJ와 YS는 나란히 13대 대선에 출마하고, JP도 충청권을 지역 기반으로 삼고 대선에 나서며 본격적인 ‘3김시대’를 연 것이다.
‘1차전’에선 누구도 승리하지 못했다. 야권의 분열은 여당 후보인 노태우 후보의 승리로 귀결됐다.
3김 중 먼저 웃은 사람은 YS였다. 1990년 YS와 JP는 ‘3당 합당’으로 민주자유당을 창당하고 여세를 몰아 YS는 1992년 대선에서 여당 후보로 당선됐다. DJ는 대선패배를 인정하고 정계은퇴를 선언했다.
YS의 대통령 당선은 3김 정치의 종식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이었다. JP는 1995년 YS 민주계의 퇴진 압력에 반발, 민자당을 탈당한 뒤 같은 해 3월 충청 기반의 자유민주연합(자민련)을 창당했다.
DJ도 1995년 지방선거 직후 정계복귀를 선언하면서 호남을 지역 기반으로 한 국민회의를 창당했다. 1996년 15대 총선은 3김이 맞붙은 또 한 번의 승부처였다.
이후 DJ와 JP는 1997년 15대 대선을 앞두고 ‘DJP 연합’을 구성하고, 그 결과 DJ가 대권 4수 끝에 대통령에 당선됐다. JP도 국민의 정부 초대 총리로 정권의 한 축을 담당했다.
2002년 16대 대선으로 DJ가 은퇴하고 JP도 2004년 총선에서 자민련이 참패하자 정계은퇴를 선언해 3김 정치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듯했다.
하지만 3김은 2007년 17대 대선국면에서 현실정치 개입 논란을 불러일으키며 질긴 정치의 끈을 놓지 않았다. DJ는 범여권의 결집을 촉구했고, YS는 “잃어버린 10년을 끝내야 한다”며 정권교체를 강조했다. JP는 한발짝 더 나아가 당시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 지지를 천명했다.
특히 평생의 라이벌이었던 DJ와 YS는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와 북핵 사태 등을 거치면서 말년까지도 갈등과 반목을 거듭했다. 하지만 DJ의 병세가 악화하자 YS는 병상을 찾아 화해를 선언했다.
3김이 한국정치에 남긴 명암은 뚜렷하다. YS와 DJ는 일생의 목표였던 대통령을, JP는 총리를 역임하며 한국의 근대화와 민주화에 공헌했다. 하지만 이들로부터 시작된 지역주의와 보스정치라는 폐단은 여전히 한국정치의 발전를 가로막고 있다.
박진우 기자 dawnstar@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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