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겐 여자 친구들중 유난히 싱글들이 많다. 그들이 이번에 자기들 놀러가는데 내가 가야 재밌다고 추켜세우면서 같이 가자고 졸라 떠나게 되었다. 놀러 가면서 장거리 운전대 잡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나였지만 그중 내차가 가장 편하다고 다들 운전은 나보고 하라고 하니 별수 없이 운전대는 내가 잡고 가족을 놔두고 여자들끼리 가니까 한편으로는 왜 그렇게 홀가분하고 기분이 좋던지….
드디어 대서양까지 연결된 바다를 쳐다보니 속이 다 후련하고 트이는 듯 했다. 그런데 우리 또래쯤 되면 미국 여자는 물론이고 한국 여자는 더더욱 부기 보드를 이용해서 파도 타는 짓은 하지 않는다. 그런데 나는 집에서부터 부기 보드를 차에 실었다. 바닷가까지 가서 부기 보드를 안타면 무슨 재미? 파도가 올라올 때 잘 조준해서 재빠르게 부기 보드에 올라 밀려오는 파도를 타고 소리를 지르다 보면 그대로 모래사장까지 미끄럼틀이 되어 빠른 속도로 밀려가는 데 스릴이 아주 재밌다.
이런 놀음은 대개 미국 10대 아이들이나 하는 짓이다. 그런데 나는 우리 아이들하고 갈 때 마다 엄마가 부기 보드 타는 모습이 너무 재밌다고 해서 타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 내가 철없는 아이들처럼 부기 보드로 파도를 타면서 소리를 지르니까 미국 여자들도 '웬? 저렇게 철 따서니 없는 동양 여자인가?'해서 그런지 나를 보고 웃고 있었다. 같이 간 여자 친구들이 내가 하도 재밌게 노니까 일광욕이나 한다고 폼잡고 예쁘게만 앉아 있더니 자기들도 한번 연습한다고 해서 내가 막 밀어 젖혔다. 그녀들은 처음이라 연습을 안 한 탓에 파도 조준을 잘못해서 물속에서 넘어지고 자빠지고 얼마나 재밌던지…. 나는 내가 하고 싶은 게 있으면 주위사람들을 의식하지 않고 누가 보든 말든 마음껏 스트레스를 푼다.
근데 같이 간 친구들이 나한테 사진 찍히면 잘못했다간 인터넷상에 자기네 얼굴이 뜬다고 도대체 사진들을 안 찍으려고 손사래를 치고 몸들을 이리 빼고 저리 빼는 통에 그녀들의 예쁜 얼굴들을 건지지 못했다. 그리고 1박2일 이여서 웬만한 것은 다사먹어야 편한데 이 아줌씨들 이구동성으로 한국 음식을 한 끼라도 먹어야 기운이 나고 놀러 가서 먹는 한국 음식은 얼마나 더 맛있겠느냐는 거다. 그래서 저녁 한 끼를 한국 음식으로 택했다.
모텔에서는 요리를 할 수 있도록 간단한 부엌 용품이 구비 되어 있었지만 그날 고기를 구워먹고 국은 된장 찌개를 먹기로 하고 상추와 마늘 양파 김치 밑반찬도 하나씩 각자 가져오고 나니 웬만한 레스토랑 수준이었다. 그런데 된장 찌개를 모텔 안에서 끓이다가는 이무슨 흉악한 냄새냐고 쫓겨 날것만 같아 모텔 방문 아래를 타올로 막아놓고 발코니에서 끓일 수 있는 조그마한 가스렌즈까지 준비해 쪼그리고 앉아 된장찌개에 간을 보는 아줌씨들! 먹고 죽은 귀신은 때깔도 좋다면서 연신 떠들어 대고 보글보글 꿇는 된장찌개, 고기 굽는 냄새. 집에서 와인은 내가 준비했는데 고기 굽고 된장찌개에는 와인보다는 한국소주가 궁합이 잘 맞는다며 고급 와인은 쳐다 보지도 않는다. 신나게 파도를 타고 놀다 와서 허기진 배로 그것도 바다를 바라보며 먹는 한국 음식은 그야말로 꿀맛이었다.
다들 미국 와서 20년 이상 씩 살아온 여자들이다. 그녀들에게 외롭고 힘든 적이 왜 없었을까? 그러나 세월이 지난 고생을 덮어주니 잊어버릴 수 있어서 좋고, 이만큼 타국에서 잘 견디고 살아온 삶이 스스로 돌아봐도 대견하게 느껴지는 순간 순간들이다.

저녁을 해먹고는 동양여자 다섯이 어디 미국 가라오케 라도 있나 하고 근처 카페를 기웃거리며 이집저집 들어가서 물어보니 근처에는 가라오케가 없단다. 만약 그런 카페가 있었다면, 미국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완벽한 영어 발음은 아니지만 못 불러도 자신 있게 그 옛날에 배웠던 팝송 한 곡조 뽑아 보련만…. 할 수 없이 맨발로 파도가 철썩대는 밤바다를 걸으면서 밀려오는 파도를 보고 노래를 부르고 소리를 질러댔다. 많이 걷고, 많이 웃고, 많이 먹고, 행복은 어디 저 멀리 있는 게 아닌 이렇게 우리들 가까운데 있다는 걸 실감하면서 다음날 아침 돌아오는 길에 나만 빼놓고 여자들이 구찌, 코치, 캘빈 클라인 아울렛 매장을 들린다고 아우성이었다. 그냥 바로 갔으면 좋으련만 난 또 맘이 약해져서 쇼핑몰로 기수를 돌리며 운전대는 잡은 사람이 대장이라며 쇼핑시간 딱 1시간 만을 준다고 경고를 하고, 한 시간이 넘으면 차는 떠날 것이라 엄포를 놨더니만 시간 관념에 철저한 내 성질을 그녀들은 잘 알기에 미친 듯이 짐을 지고 메고 차로 달려왔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비록 여자들끼리지만 속 시원하게 펼쳐진 바다를 보면서 바다가 우리에게 주는 무한한 에너지를 맘껏 충전하고 다시 삶에 현장으로 돌아왔다.
임국희 Kookhi7@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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