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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안진 시인의 민속시집 ‘알고’…詩가 된 전통과 민속

입력 : 2009-07-31 18:51:29 수정 : 2009-07-31 18:5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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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할머니에게 들은 옛 이야기
흥미롭고, 여운 깊은 詩語로 재탄생
“새 아가, 대청마루 시계에 밥줘라/ 예 아바임!// 숭늉대접 올립니다 아바임/ 오냐, 시계 밥은 줬냐?/ 예 아바임/ 아까 전에 진지상 올렸는데, 아직 수저도 아니 드셨사와요”(‘시계 밥 줘라’ 부분)

유안진(68·사진) 시인이 민속시집 ‘알고(考)’(천년의시작)를 펴냈다. 서울대에서 명예퇴직한 그의 직업은 한국전통사회의 아동과 여성 민속을 연구하는 일이었다. 이 생업의 한편에서는 늘 가슴 떨리는, 시업(詩業)이라는 딴집살림을 살았다. 이번에 펴낸 시집은 서로 내외만 하던 그 두 가지 업이 행복하게 만나 어우러진 첫 번째 과실이다. 시인은 녹음기도 귀하던 시절 시골을 헤매며 할아버지 할머니들에게 묻고 또 물어 “한국인을 한국인으로 키우는 과정”을 들었다. 이미 연구서로 펴내기도 했지만, 시와 연관시켜 책으로 묶어내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편편이 흥미롭고 여운도 깊다.

“자부(子婦)들의 이름을 부르는 시부(媤父)가 있었다. 이 고약한 소문이 퍼지면서, 이 댁 막내아들의 혼인길이 콱 막혀 버렸다. 신랑감은 늙어가는데 혼처를 못 구해 애간장을 녹이는 중에, 어떤 당돌한 처녀가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자원했다// …밥상 놓고 게 좀 앉거라/ 니는 집에서 뭐라고 불렀누?/ 단단히 별러 준비한 새 며느리는(…) //친정아버님은 벌레를 좋아하시어/ 큰언니는 바구미 둘째 언니는 딱정이라고 부르셨지만/ 지는 쥐며느리라고 부르셨어요// 하하하 박장대소하려던 시아비는 새파랗게 질려버렸다”(‘시아비 버릇을 고치다’ 부분)

얼떨결에 쥐가 되어버린 시아비, 황망했겠다. 어린 시절 안방 문지방을 줄넘기하며 노래처럼 암송하던 한시를 듣고 어머니가 달려와 종아리를 치는 바람에 넘어져 시인은 아직까지 턱에 흉터가 남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가 노래한 한시는 이 시집에 담긴 ‘첫날밤의 Y담’이었다. 찢어지게 가난한 양반 총각이 부자인 상민 집의 딸과 혼인하게 되어 자존심이 상한 신랑은 첫날밤에 “푸른 예복 관대 밑에 붉은 성기가 잔뜩 화났오”라는 시를 지어 신부의 댓구를 요구했고, 신부는 “다홍치마 고쟁이 속의 하얀 조가비가 방긋 웃소”라고 답했다나. 양반 신랑은 직설적으로 ‘붉은 성기’라고 썼지만 상민집 딸은 ‘백합’이라는 비유를 동원했으니 신부의 한판승. 그 의미도 모르고 “청포대하자신노(靑袍帶下紫腎怒) 홍상과중백합소(紅裳??白蛤笑)”를 고무줄놀이 노래처럼 읊었으니 어머니, 얼굴 붉어졌을밖에.

이 민속시집에는 이처럼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차고 넘친다. 그렇다고 시의 본령을 망각하는 건 아니다. 이야기에 빠져들라치면 슬며시 넘어가는 반전 속에 여운이 깊다. “태어나 살다 죽었다는 것이 괜한 소문일 뿐// 사랑했어도 아무도 사랑한 적 없고/ 낳아 키웠어도 자식 둔 적 없고/ 교회를 들랑거렸어도 신을 믿어본 적 없고/ 오래 살았어도 살았던 흔적 없는/ 엊그제 죽었어도 죽은 흔적 없는/ 다만 한 토막 루머(Rumor)일 뿐”(‘사대오상, 루머가 끝나다’)이다. 유안진 시인은 “지난 30여년 동안 내 학문이던 우리 민속을 시로 재음미해 보는 것은 나의 태생적 촌순이다움이었는지 모른다”고 시집 머리에 썼다.

조용호 선임기자 jhoy@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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