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소군묘는 중국 내몽골 오르도스(Ordos) 지역에 있는 호화호특(呼和浩特)시에 있는데 이곳은 청동기와 초기 철기문화의 중심지였으며 현재는 정치, 경제, 교통의 중심지이다 .
왕소군은 전한시대 원제(元帝)의 후궁으로 왕의 사랑을 받지 못하다가 흉노족과의 친화책의 일환으로 BC 33년(竟寧 1) 흉노의 선우와 결혼한다.
후한의〈서경잡기 西京雜記〉에 따르면 대부분의 후궁들이 화공에게 뇌물을 바치고 아름다운 초상화를 그리게 하여 황제의 총애를 구하려 하였으나 왕소군은 뇌물을 바치지 않아 얼굴이 추하게 그려져 오랑캐의 아내로 뽑히게 되었다 한다.
그러나 왕소군이 말을 타고 떠날 때 원제가 보니 절세의 미인이고 태도가 단아하여 후회하였으나 이미 늦었고 왕소군을 추하게 그린 화공 모연수를 참형에 처하였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왕소군은 비파 뜯기를 즐겼는데 그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 하늘을 날던 기러기가 넋을 잃고 쳐다보다 그대로 떨어져 죽었다하여 낙안(落雁)이라는 말이 생기게 되었다한다.
또한 왕소군이 흉노의 땅에서 고향을 그리워하며 지은 시
胡地無花草 오랑캐 땅에는 꽃도 풀도 없고
春來不似春 봄이 와도 봄 같지 아니하다 라는 유명한 시를 남기기도 했다.
그러나 흉노는 우리가 알고 있는 단순한 야만족이 아닌 상당한 세력을 형성했던 민족이며 신라김씨 왕실의 선조가 김일제(金日? BC134 ~ BC86)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그는 본래 흉노족 휴도왕(休屠王)의 태자로 부왕이 한무제(漢武帝)와의 전투에서 패하면서 중국으로 끌려온 뒤 한무제로 부터 김씨(金氏) 성을 하사 받았으며 중국 김 씨들의 시조이다.
실제 이곳 왕소군묘역에는 흉노박물관이 있으며 왕소군의 유물과 함께 흉노문물이 잘 전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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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소군조각상을 너무도 아름다운 9등신 미녀로 조각해 놓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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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5세에 세상을 떠난 왕소군은 흉노의 땅에 묻혔는데 겨울에 초목이 시들어도 그의 무덤에있는 풀만은 푸르름이 시들지않아 청총(靑塚)이라 이름 지었다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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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우와 왕소군의 모습을 동상으로 만들어 놓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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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소군묘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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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소군묘 전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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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묘위에서 내려다본 전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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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흉노 박물관이 경내에 있으며 왕소군 관련 그림과 소품이 전시되어 있다. 그림은 왕소군이 직접 그린 것도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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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흉노족의 모습을 재현해 놓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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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시 흉노들이 사용하던 청동기와 생활용품 갑옷 암각화 등이 전시되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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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복(銅釜)구리냄비 |
윤석하 (사진작가) 2908y@naver.com
사진 원본은 http://www.beautia.co.kr/ (昔河사진문화연구소)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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