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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프시코디스트 오주희는 “낭만시대 음악이 선율로 그림을 그려 감성을 자극한다면, 바로크 시대 음악은 ‘언어’로 대화를 건넨다”며 “노래하듯 전체적인 구조와 성격을 이해하고 나서 디테일한 부분을 연습해나가야 하프시코드의 매력을 제대로 전할 수 있다”고 말한다. 지차수 선임기자 |
민감한 이 악기를 만나러 26일 오주희 한양대 교수의 서울 연희동 자택을 찾았다. 하프시코드는 아름다운 자태로 빛을 품고 있었다. 1760년대 장 쿠셰가 만든 하프시코드를 존 코스터가 복제한 ‘작품’이다. 검정과 빨강의 강렬한 조화가 인상적이다. 피아노와 반대로 온음이 검은색, 반음이 하얀색이다. “사람 때문에 아니라 얘(하프시코드)가 더울까 에어컨을 튼다”는 오 교수는 “귀족들에게 유난히 사랑을 받아 귀족 악기로 불렸는데 연주하는 사람은 악기 시중드느라 바쁘다”며 웃었다. 하프시코드의 관리는 까다롭다. 나무로 제작된 만큼 알맞은 습도를 유지하는 게 관건이다. 덥거나 추우면 바로 ‘쩍’ 갈라진다. 제습기와 가습기는 필수다.
관리가 힘든 까닭에 국내 공연장에서 하프시코드를 갖춘 곳은 몇 군데 안 된다. 연주하려면 직접 하프시코드를 들고 가야 한다. 바로크 음악이 국내에서도 주목을 받기 시작했지만 연주 환경은 ‘아직’이다. 그런 탓에 무대 뒤에선 하프시코디스트가 가장 바쁘다. 식사도 거르기 일쑤다. 악기도 옮겨야 하고 조율도 해야 한다. 무대에 서기 전까지 하프시코드와 한바탕 전쟁이다.
이런 번거로움에도 도도한 악기가 빚어내는 달콤한 소리는 하프시코드 주변을 맴돌게 한다. 오 교수는 대학교 4학년 때 하프시코드 소리에 빠져 전공을 바꾼 케이스. 피아노를 전공했기에 쉬울 줄 알았는데 오히려 그게 독이었다. 피아노와 치는 법이 반대였다. 손가락에 최대한 힘을 빼야 한다. 독일 베를린 국립음대로 건너가 3개월 동안 도부터 솔까지 5음만 쳤다.
“10분 친 뒤 산책하고 나서 다시 하프시코드 앞에 앉았어요. 10분 정도 넘게 치다 보면 저도 모르게 손에 힘이 들어가더라고요. 식초를 많이 쳐 노글노글해져야 해요. 끊기는 음들이라 연결음을 내려면 부드럽게 이어나가야 하죠. 타이밍이 중요해요. 하프시코드를 배운 뒤로 피아노 앞에는 절대 앉지 않아요. 하하.”
소곤거리며 다정하게 말을 건네는 하프시코드의 음색은 실내악에서 빛을 발한다. 16∼17세기 바로크 시대 때 전성기를 맞은 악기는 맑은 음색으로 바로크 관현악의 ‘영혼’으로 불리며 사랑을 한몸에 받았다. 악기 자체 소리가 크지 않기에 300석 규모 정도의 공연장이 제 맛을 듣기엔 딱 좋다.
하프시코드의 매력은 다양함에 있다. 2단인 경우 단마다 음색이 다르고, 스톱은 소리에 다채로운 컬러를 입힌다. 오 교수는 “하프시코드의 매력을 알려면 프랑수아 쿠프랭의 곡을 꼭 들어보라”고 권했다. “4권의 작품집에 담긴 230곡이 자연풍경, 소리, 움직임, 인물 등을 묘사하며 하프시코드의 모든 가능성을 보여준다”고 덧붙였다.
수공업으로 제작돼 악기마다 모양도, 소리도 다르다. 프랑스는 고상하면서 우아한 음색으로, 이탈리아는 화끈하면서 직선적인 소리로, 독일은 이들의 절충된 색깔로 청중을 유혹한다. 이름도 제각각이다. 영어로는 하프시코드지만 독일어로는 쳄발로, 프랑스어로는 클라브생이다. 지금도 수작업으로 만들어지기는 마찬가지. 예전에 만들어진 하프시코드를 본떠 만든다. 연습용은 1000만원대며, 프로 연주자들은 주로 5000만∼6000만원대 하프시코드를 사용한다. 대대로 전해져 내려오는 하프시코드는 박물관에 보관됐으며, 거장들이 음반을 녹음할 때 잠깐씩 세상 구경을 한다.
“하프시코드 연주자한테는 연주만큼 악기가 중요해요. 딱 보면 소리가 어떨 거라고 짐작이 돼죠. 해외에서 연주회를 가질 때면 먼저 가지고 있는 하프시코드를 알려달라고 해요. 자기와 맞는지 안 맞는지 알아야 하니까요.”
하프시코드의 의미는 ‘역사’에서 묻어난다. 바흐, 헨델, 비발디 등 바로크 시대 작곡가의 음악을 제대로 알려면 당대 악기부터 알아가는 게 순서다. 한양대학교 음악연구소(소장 강해근)에서는 2005년부터 2년마다 ‘서울국제바흐페스티벌’을 진행 중이다. 하프시코드는 물론 빠질 수 없는 악기다.
“제3회 페스티벌이 10월에 문을 열어요. 연주뿐 아니라 연주자를 초청하고 연주회장을 잡고, 하프시코드를 찾아다니는 일까지 해요. 힘들지만 바로크 음악을 제대로 들려드릴 수 있으니 뿌듯함이 더 크죠.”
오 교수는 하프시코드를 전공한 국내 1세대 연주자에 속한다. 연주뿐 아니라 바로크 음악을 알리는 작업까지 함께 해나가야 하는 게 1세대의 숙명이란다. 바로크 음악이 조금씩 국내에 뿌리를 내리면서 바람도 생겼다.
“바로크 현악기 연주자들이 더 많아졌으면 해요. 현악기에선 (연주자가) 턱없이 부족해요. 현대악기에 비해 재미없을까봐 걱정할 필요는 없어요. 바흐 헨델이 없는 음악계는 상상할 수 없잖아요? 이미 지나온 시대이지만 지금도 발굴할 게 많은 미지의 세계이기도 하죠. 연주자, 관객의 상상력을 자극하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해요.”
윤성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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