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정확히 250년 전인 1759년 음력 6월(현재의 7월). 무더위에도 아랑곳없이 조선 왕실에서는 최대 경사가 벌어지고 있었다. 66세의 국왕 영조가 15세의 어린 신부 정순왕후를 계비로 맞이한 것이다. 흔치 않은 국왕의 혼례식에 백성들의 마음은 덩달아 뛰었고 혼례식이 벌어진 창경궁 일대의 거리는 인파로 넘쳤다. 혼례식의 전 과정은 의궤(儀軌)의 기록으로 정리되었고, 50면에 걸쳐 그린 반차도(班次圖:행렬의 배치 상황을 그린 그림)는 오늘날의 영상자료처럼 그날의 현장 모습을 생생히 증언해주고 있다. 250년 전 영조의 혼례식 현장 속으로 들어가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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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정순왕후 가례도감의궤 중 반차도. 반차는 나누어진 소임에 따라 차례로 행진하는 것을 일컫는 말로 반차도는 행사의 절차를 그림으로 표시한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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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 어진. 1759년 음력 6월22일 66세의 영조는 15세의 계비 정순왕후를 맞이하였다. |
정비가 사망하면 대개 3년상(실제는 2년 3개월 정도)을 치른 후에 계비를 맞이했다.
왕은 대개 왕세자 시절인 15세 전후에 혼인하였다. 왕세자빈의 나이 또한 왕세자와 비슷한 15세 전후였고, 때에 따라서는 연상인 경우도 많았다. 영조의 정비인 정성왕후나 고종의 비 명성왕후는 모두 연상녀였다. 그런데 정비 사망 후 맞이한 계비는 왕의 나이는 고려하지 않고 15세 전후의 신부를 간택하였다. 이러한 관례 때문에 선조와 인목왕후는 51세와 19세의 연령 차, 심지어 영조는 66세에 15세 신부를 맞이하는 상황이 연출되었던 것이다.
영조의 정비는 달성 서씨 정성왕후였다. 정성왕후는 1694년 13세 때 11세의 왕자 영조와 혼인하였다.
1721년 영조가 세제에 책봉되자 세제빈에 봉해졌으며, 1724년 영조 즉위 후 왕비에 올라 정성왕후가 되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영조와의 사이에 후사가 없이 1757년 사망했다. 영조는 정성왕후가 사망하자, 1759년 계비로 경주 김씨 김한구의 딸을 왕비로 맞아들였다.
66세의 영조에게 15세의 꽃다운 어린 신부가 계비로 들어온 것이다. 51세의 나이 차가 무척이나 커보였지만 어린 계비 또한 영조 못지않은 야심에 찬 인물이었음은 후대의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조선후기 정치·문화의 르네상스를 주도한 영조와 정조의 죽음 후에 전개되는 조선후기 세도정치의 쟁점에 바로 이날의 꽃다운 신부가 자리할 줄을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1759년 정순왕후를 맞이한 영조는 만년의 삶 17년을 함께 보내다가 1776년 3월 5일 경희궁에서 보령 83세로 승하하였다. 그해 7월 27일 영조의 무덤은 조선건국의 시조 태조가 모셔진 건원릉 서쪽의 두 번째 산줄기에 조성되었다. 그리고 29년 후인 1805년 정순왕후가 영조의 무덤 곁으로 돌아왔다.
#2. 혼례식 보고서, ‘영조정순왕후 가례도감의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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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 통명전에서 재현된 조선 왕실 가례 장면 중 하나. |
간택은 신부 후보 중에서 신부감을 선택하는 것으로, 대개 3차례 과정을 거쳤다. 1차에서 6명, 2차에서 3명, 3차에서 1명을 선발하였다. 영조의 삼간택 날짜는 6월 9일이었다.
왕실의 혼례식이 있으면 먼저 금혼령을 내리고 결혼의 적령기에 있는 팔도의 모든 처녀를 대상으로 ‘처녀단자’를 올리게 했다. 처녀단자를 올릴 필요가 없는 규수는 종실의 딸, 이씨의 딸, 과부의 딸, 첩의 딸 등에 한정되었으나, 실제 처녀단자를 올리는 응모자는 25∼30명에 불과했다. 왜냐하면 간택은 형식상의 절차였을 뿐 실제 규수가 내정된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간택에 참여하는 데 큰 부담이 따랐기 때문이었다. 간택의 대상이 된 규수는 의복이나 가마를 갖추어야 하는 등 간택 준비 비용이 만만치 않았을 뿐 아니라, 설혹 왕실의 부인으로 간택되더라도 정치적으로 상당한 부담이 따랐기에 이를 기피하는 경향이 컸다.
간택을 받은 왕비는 별궁에서 왕비 수업을 받았다. 별궁에서는 왕비로서 지켜야 할 예법을 미리 교육받는다. 국왕이 사가(私家)에 직접 가는 불편을 없애기 위하여 만든 제도적 장치였다. 정순왕후는 어의궁(현재의 기독교 회관 자리)에 마련된 별궁에서 왕비 수업을 받았다. 간택 이후 혼례식은 육례에 의거하여 진행되었다. 육례는 납채(納采), 납징(納徵:납폐라고도 함), 고기(告期), 책비(冊妃), 친영(親迎), 동뢰(同牢)를 말한다. 납채는 간택한 왕비에게 혼인의 징표인 교명문을 보내고 왕비가 이를 받아들이는 의식으로 6월 13일에 행해졌다. 납징(6월 17일)은 혼인 성립의 징표로 폐물을 보내는 의식으로 요즈음 함을 들이는 것과 비슷하다. 6월 19일에는 혼인 날짜를 잡는 의식인 고기가, 6월 20일에 왕비를 책봉하는 의식인 책비가 행해졌다. 이들 의식은 모두 창경궁 명정전에서 거행하였다.
행사의 절정은 국왕이 별궁에서 왕비 수업을 받던 왕비를 친히 궁궐로 모셔오는 의식인 친영이다. 6월 22일에 행해진 친영 의식은 의궤의 말미에는 반차도로 정리하여 당시 혼례식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마지막으로 친영 후 왕이 왕비를 대궐에 모셔와 함께 절하고 술을 주고받는 의식인 동뢰가 창경궁 통명전에서 행해졌다.
‘영조정순왕후 가례도감의궤’에는 육례에 필요한 각종 의복과 물품 내역을 비롯하여, 의장기, 가마 등을 준비한 장인들의 명단, 소요된 물자의 구체적인 내용, 반차도를 그린 화원들의 이름까지 기록하여 당시 혼례식의 상황을 완벽하게 복원할 수 있게 해준다.
#3. 반차도로 따라가 보는 혼례식 행렬
의궤 중에서도 ‘가례도감의궤’는 왕실 축제의 모습을 가장 압축적으로 표현해주고 있다. 특히 행사 때 사람과 기물의 배치를 그린 반차도에는 이러한 모습이 잘 표현되어 있다.
반차도는 행사의 주요 장면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으로 오늘날로 치면 결혼식 기념사진이나 영상 자료와 같다고 할 수 있다.
모든 ‘가례도감의궤’의 반차도는 국왕이 별궁에 있는 왕비를 맞이하러 가는 친영의 모습을 담고 있다. 친영을 가례의 하이라이트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반차’는 ‘나누어진 소임에 따라 차례로 행진하는 것’을 일컫는 말로서 ‘반차도’는 행사의 절차를 그림으로 표시한 것이다.
그런데 반차도는 행사 당일에 그린 것이 아니었다. 행사 전에 참여 인원과 물품을 미리 그려서 실제 행사 때 최대한 잘못을 줄이는 기능을 했다.
반차도는 오늘날 국가 행사나 군대의 작전 때 미리 실시하는 도상 연습과 같은 성격을 띠고 있었다. ‘영조정순왕후 가례도감의궤’에도 당시 친영일은 6월 22일이었지만 친영의 모습을 담은 반차도는 6월 14일에 이미 제작되어 국왕에게 바쳐진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반차도에는 주인공인 왕과 왕비의 가마는 물론이고, 앞을 호위하는 선상(先廂)과 전사대(前射隊)를 비롯하여 후미에서 호위하는 후상(後廂), 후사대(後射隊) 등이 표현되어 있다. 왕의 가마는 사방이 열린 형태로 왕비의 가마는 사방의 문이 모두 닫힌 형태이다. 이외에 행사에 참여한 고위관료, 호위병력, 상궁, 내시, 행렬의 분위기를 고취하는 악대, 행렬의 분위기를 잡는 뇌군(헌병) 등 각종 신분의 인물들이 자신의 임무와 역할에 따라 위치를 정하여 행진하는 모습이 그려있다. 특히 말을 탄 상궁을 비롯하여 침선비(針線婢) 등 궁궐의 하위직 여성들의 모습까지 등장하는 게 흥미롭다.
반차도에 나타난 행렬의 모습은 뒷모습을 그린 것, 조감법으로 묘사한 것, 측면만을 그린 인물도 등 다양하다. 다양한 각도에서 인물들을 묘사해 자칫 딱딱해지기 쉬운 행렬을 생동감 있게 연출한 화원들의 감각을 느낄 수 있다.
반차도에 나타난 인물은 신분에 따라 서로 다른 복장을 하고 있다. 다양한 색상의 의상은 물론 너울을 쓴 여인의 모습이나 각종 군복을 착용한 기병, 보병들의 모습은 당시의 복식 연구에도 귀중한 자료가 될 것이다.
행렬의 분위기를 한껏 돋우는 의장기의 모습도 흥미롭다. 행렬의 선두가 들고 가는 교룡기와 둑(纛)기를 비롯하여 각종 깃발과 양산, 부채류는 당시 왕실의 권위를 상징해주고 있다. 수백 명이 대열을 이룬 이 행렬은 당시의 국력과 문화수준을 보여주는 국가 최대의 퍼레이드였다.
‘영조정순왕후 가례도감의궤’ 반차도는 총 50면에 걸쳐 그려져 있으며 각 면은 45.8×33㎝, 총 길이는 1650㎝에 달한다.
혼례식은 조선시대 왕실의 최고 축제 중의 하나였다. 왕세자의 혼례식이 일반적이었지만 계비를 맞이하는 왕의 혼례식도 몇 차례 거행되었다.
이들 왕실의 혼례식은 전통과 예법을 중시하는 조선시대 이념과 문화와 접목되면서 의궤라는 기록물로 남았다. 최근 우리 문화에 대한 관심이 날로 커지면서 왕실 혼례식을 비롯한 궁중 의식 재현 행사도 활발하게 추진되고 있다. 그리고 이들 의식 재현에는 의궤라는 소중한 기록유산이 있다.
의궤의 기록을 바탕으로 한 양질의 문화콘텐츠의 개발이 요청되는 시대이다. 품격 있는 왕실문화의 적극적인 홍보와 세계로의 전파는 21세기 문화대국을 지향하는 우리 대한민국의 품격을 보다 높여줄 것이다.
건국대 사학과 교수 shinby7@konku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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