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검색

[소재원의 '밤의 대한민국']<16>에필로그

관련이슈 밤의 대한민국

입력 : 2009-06-26 14:07:51 수정 : 2009-06-26 14:07:51

인쇄 메일 글씨 크기 선택 가장 작은 크기 글자 한 단계 작은 크기 글자 기본 크기 글자 한 단계 큰 크기 글자 가장 큰 크기 글자

에필로그.

@3개월 뒤.

(정천)

“누나, 지금 어디쯤이야?”

“거의 도착했어. 짐 다 챙겼지?”

“가져갈게 뭐 있나. 대충 챙겼어. 그럼 내려가서 기다릴게.”

모든 일에 대한 그 무엇의 감정도 깨끗하게 잊기로 했다. 그리고 연수누나와 함께 이곳을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사건 당일, 결국 아영은 세상과의 이별을 고했다. 겨우 붙어있었던 숨은 더 이상 세상에 아쉬움이 없는지 미련 없이 편안한 모습으로 눈을 감았다. 복받쳐 오르는 슬픔이 내 가슴을  덮쳤다. 또 다시 한 사람을 보내야 하는 감당하기 힘겨운 감정.

하지만 슬픔은 오래 가지 않았다.

경찰들은 병원에서 절규하는 나의 감정을 무참하게 묵살 한 채, 차가운 유치장에 날 가둬 버렸다.

부러진 다리의 기브스가 마르기도 전이었다. 난 슬픔보다 미래에 대한 변명거리들을 머릿속 가득 채워야 했다. 세인이를 보낼 때와 똑같은 모습으로.

매일 같이 연수누나와의 면회가 이루어졌다. 언제나 변호사를 동반한 누나의 얼굴은 무척이나 수척했다.

“박범휘씨의 증언이 중요하게 작용 할 겁니다. 믿음 가는 동생분이셨다니 천이씨가 매일 서신을 넣어 보십시오. 범휘씨는 이미 모든 죄를 인정한 상태이기에 증언을 해주는 것에 큰 부담은 없을 것으로 보입니다.”

변호사의 말대로 매일 같이 범휘에게 서신을 보냈다. 하지만 단 한통의 답장도 돌아오지 않았다. 혹시 잘못 전달이 돼었나 몇 번이고 주소를 확인하였다. 받침 하나 틀리지 않은 정확한 주소였다. 나에 대한 원망이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다른 무언가의 감정 때문인가!

 “고인이 되신 분에 대한 증거 확보가 이루어 졌습니다. 혐의는 벗으실 수 있을 겁니다. 곽창석씨의 증언도 일치하고요. 그 부분에서는 한결 수월해 졌으니 안심하십시오. 아직도 박범휘씨가 연락이 안 됩니까? 그럼 일단 제가 접견을 한 번 해야 할 것 같네요.”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는 범휘에게 더 이상 기대 할 수 없었다. 변호사가 찾아간다고 한 들, 녀석이 만나 줄지도 의문이었다.

며칠 후, 역시나, 변호사는 범휘를 접견하지 못한 채 내게 실망스러운 결과를 안겨주었다.

“박범휘씨가 접견을 하려하지 않으니 상황이 어렵게 돌아갈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그 사람도 자신의 형량을 줄이기 위한 수를 쓰는 것 같은데, 알아보니 변호사도 선임하지 않은 상태로 국선을 쓰기로 했더군요. 합의점을 찾을 수 있을지……. 솔직하게 조금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는 게 사실입니다.”

답답한 말이 더욱 현실을 조여 왔다. 그리고 이젠 세상을 볼 수 있을 거란 기대감 보다는 형량을 줄일 수 있는 방법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누나는 면회를 오면 사건의 이야기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저 “아프지 말고 있어.” “이번일 잘 해결 될 테니까 조금만 고생하자.” “밥은 잘 챙겨 먹어?” 라는 그저 그런 안부 인사뿐이었다.

“누나 탄원서 좀 어떻게 만들어서 넣어봐. 지금은 무죄보단 형량을 줄여야 한다고.”

어김없이 변호사와 함께 면회를 온 누나에게 답답한 심정을 토로하였다. 벌써 유치장에서 구치소로 넘어 온지 한 30일이 넘어가고 있었다. 앞으로 내게 재판은 10일 남짓 남아있었다. 미안함과 예전 일에 감상적인 궁금증은 내게 사치였다. 지금의 현실이 내겐 가장 중요한 과제가 되어있었다.

“그래요. 연수씨가 일단 탄원서와 같은 것들을 판사에게 제출하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변호사가 내 말에 동감 표를 던졌다.

누나가 내 손을 잡았다. 따사로운 기운이 전해졌다.

“걱정하지 마. 이번 일. 잘 될 수 있어. 누나가 장담 할게. 왜 이렇게 말라가니? 사식은 잘 챙겨 먹어?”

무엇 때문이었을까? 누나의 말에 왠지 모를 확고한 믿음이 생겼다. 방금 전까지 날 지배하고 있었던 불안한 요소들이 말끔하게 사라졌다. 평온한 마음마저 들기 시작했다.

“정말 이야?”

다시 한 번 확답을 원하는 나의 물음에 누나는 다른 소리를 내었다.

“안에서 쉬고 있을 동안만이라도 아영이에 대한 슬픔으로 아파하고 있어 줄래? 너무 많은 사람이 희생했잖아. 그러니까, 안에 있는 동안만이라도 슬픔과 후회로 속죄하고 있으면 안 되겠니?”

누나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가느다란 한 줄기로 시작된 눈물은 어느새 쉼 없이 뺨을 타고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그게 마지막 면회였다. 다음에 누나를 본 곳은 구치소 밖이었으니까.

재판 당일.

예상치 못했던 범휘가 증인석에 모습을 보였다. 나와 같이 온몸이 밧줄로 묶인 상태였다.

범휘가 선서를 마치자 곧 바로 검사의 질문이 쏟아졌다.

“증인에게 살인을 지시한 사람이 누굽니까? 정천이 맞지요?”

난 간절한 눈빛으로 범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는 내 얼굴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검사를 노려보며 말했다.

“지시한 사람은 없습니다. 모시는 분께서 위험에 처해 있으면 당연히 아우들이 알아서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형님께서는 납치당한 그 순간 까지도 아무것도 모르고 계셨습니다. 상수 새끼와 다른 놈들이 거짓말을 하는 겁니다. 그들에게서 증거를 확보하지도 못하셨으면서 왜 형님께서 살인을 지시했다고 주장 하십니까?”

마치 정당한, 의로운 일을 한 독립투사처럼 오히려 검사를 몰아갔다. 뒤에 앉아 광경을 지켜보던 수많은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검사는 벗겨진 머리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훔쳐내며 물었다.

“그럼 죽은 유세인과 증인 둘이서 살인을 도모하고 살해를 했다는 말이 되는데, 과연 그게 가능했을 까요? 유세인은 바로 저기 앉아있는 정천의 애인이었습니다. 그런데 두 사람의 관계에 있어서 절대적인 비밀이라는 것이 있을 수 있었을 까요?”

범휘가 벌떡 일어났다. 주위에 있던 경찰들이 그를 제지하였다.

“이봐요. 제가 아는 형수님께서는 너무나 형님을 사랑하시던 분이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믿음을 가지고 부탁을 할 수 있었습니다. 저와 같이 형님을 진심으로 위하는 분이셨기에. 지금 당신의 행위는 죽은 형수님에 대한 모독입니다.”

드디어 범휘가 날 바라보았다. 검사를 꾸짖는 그의 음성이 날 향한 것이라는 걸 알기 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의 눈빛이 모든 걸 이야기 해주고 있었다.

‘네가 세인이를 사랑했으면 지금 당장 일어나서 뭐라고 떠들어봐라.’ 는 식의 비웃음까지 비춰졌다. 하지만 난 일어나지 못했다. 그저 다행이라는 안도감과 함께 고개를 숙여 그의 눈을 피했다. 말이 계속 이어졌다.

“형수님과 제가 꾸민 일이지만, 형수님의 살인을 정당하다 이야기 하고 싶습니다. 더러운 법은! 밤의 대한민국에 살아가는 우리와 같은 이들을 보호하지 못하니까요! 우리 스스로 법이란 울타리를 버린 이유이기도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법을 의지하기 보다는 스스로가 소중한 것을 지켜나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형석이를 죽이지 않았다면, 내가 존경하는 형님과 형수님이 사랑하시는 한 남자를 저 세상에 보낼 수밖에 없었으니까요! 누군가가 살해당할 거라는 이야기를 경찰서에 가서 한 들, 공권력의 비호가 있을 것 같습니까? 있다하더라도, 그들은 우리까지 잡아들일 것이 뻔합니다. 각종 불법을 저지르는 우리에게는 법이란 너무 멀리 있는 것이니까요.”

일반 사람들에게는 되지도 않는 논리였다. 하지만 범휘의 말은 우리와 같은 사람들에게는 아주 적합한 논리이자 진리였다. 날 먼저 버린 것은 나 스스로가 아니었다. 날 이렇게 만든 것은 정당하고 선한 일을 행한다고 사회가 인정해 준 사람이었다. 사회의 무관심. 그리고 지독하리. 만큼 더러운 한 인간의 욕망이 날 여기까지 끌고 왔던 것이다. 우리와 같은 밤의 대한민국의 사람들은 그 욕망을 폭력과 힘으로 해소를 하지만, 밝은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이들은 위선과 보이지 않는 지저분한 뒷거래로 해소를 한다는 차이 뿐이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아무리 더러워도 겉은 정당성과 당당함을 유지 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를 소비하는 인간들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사회의 가장 정의로운 법을 지켜나가는 공무원들, 사회의 약자를 대변하는 국회의원들. 모두 우리가 살아가는 이곳에서 그들의 거래는 이루어졌다. 탐욕스러운 성욕으로, 정신을 몽롱하게 만들어 버리는 독한 알코올로, 그들은 그들만의 성지를 이루어 갔다. 그러면서 그들은 타인에게는 위엄 있는 모습을 보였다. 누구도 그들의 당당함과 신성함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정선에서 아가씨들을 소비하는 이들이 누구이던가! 바로 금 배지를 단 사람들과 사회에서 인정받는 인사들이었다.

과연 날 심판하는 이들이 나의 죄를 물을 자격이 있는 것인가? 그들의 욕망을 해소하기 위해 존재한 날, 정녕 그들이 심판을 할 수 있는 것이던가?

범휘의 음성이 높아질수록 나의 입 꼬리가 올라갔다. 이정도면 검사 역시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역시나 예상대로 범휘는 그대로 증인석을 내려왔다. 그의 시선이 여전히 내게 향해있음을 온몸의 신경이 말해주고 있었다.

더 이상의 증인이나 물증은 없었다.

며칠 뒤.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출감을 하게 되었다. 신성한 법의 자비가 내게 주어진 것이었다.

연수누나가 마중 나와 있었다.

“고마워. 누나.”

덩실덩실 춤이라도 추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누나의 표정이 많이 어두웠다.

“안에서 속죄 좀 했니?”

나의 대답을 너무도 간절하게 기다리는 눈빛이었다.

“그래. 많이 속죄했어. 세인이에게도, 아영이에게도, 그리고 끝까지 의리를 지켜준 범휘에게도.”

나의 대답에 누나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리고 이내 펑펑 눈물을 쏟아내며 내 가슴을 있는 힘껏 내리치기 시작했다.

“등신아! 왜 그렇게 여러 사람을 아프게 해. 왜 그렇게 여러 사람을 희생하게 만들어! 도대체 왜! 다른 사람 목숨까지 빼앗아가고 다른 사람의 인생까지 망쳐놨으면서 뭐가 그렇게 잘났다고 웃고 있는 거야! 네가 조금만 양보했더라면, 네가 조금만 다른 이들을 챙겨줬더라면, 네가 조금만 다른 이들과 나눠 가졌더라면, 이렇게 힘들 필요는 없었잖아! 왜 그렇게 못돼 처먹은 거야! 뭐가 그리 잘났다고 그렇게 태연하게 이야기를 하는 거냐고!”

누나의 외침은 내게 반발만을 만들었다. 정녕 그 이유를 몰라 이렇게 이야기 하는 것인가? 서로가 말을 하지 않아도 알고 있는 사실을 왜 그리 듣고 싶어 하는 것인가!

나의 가슴을 내리치는 누나의 손을 저지했다. 그리고 있는 힘껏 소리를 내지르며 누나가 외치고 있는 이야기들의 이유를 또박또박 설명했다.

“왜냐고? 왜 그랬냐고? 누나가 내 가족이니까! 누나가 내 가족이고 내 유일한 사람이니까! 세인이? 누나 사람이었기에 사랑 할 수 있었던 거야. 아영이? 누가 거길 등신같이 혼자 찾아 오래?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양보하라고? 다른 사람을 챙겨주라고? 다른 사람과 나눠가지라고? 헛소리 하지 마! 한 번 우스운 꼴 보이게 되면 한 없이 빼앗기게 되는 것이 우리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몰라? 알면서 왜 그딴 소리를 하는 건데? 누나는 그래서 형석이 죽이라고 아영이에게 시킨 거야? 누나는 그래서 세인이가 형석이 죽이는 걸 말리지 않았던 거야? 범휘? 그래, 내게 필요한 사람이라 곁에 두었어. 녀석이 누나에게 마음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 자식이 있어야 나와 누나가 안전하다 생각해서 곁에 두고 있었어! 솔직히 그들에게 절대 미안하거나 속죄하고 싶은 마음 눈곱만큼도 없어! 다 그들이 선택한 거야! 누나도 나와 똑같은 사람 아니야? 누나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거 아니었냐고! 세상에 세인이, 아영이, 범휘를 대신할 사람은 많아! 하지만 누나를 대신하고 날 대신 할 사람은 이 세상에 없다는 걸 누나도 잘 알고 있잖아!  그래서 누나도 이렇게 살아왔던 거잖아!”

내 말에 누나는 아무런 항변도 하지 않았다. 그저, 내 가슴속에 얼굴을 묻고 아픔을 토해내기만 할 뿐.

(서연수)

“누나 왜 이렇게 늦어? 점심 때 되었으니까 뭐라도 먹고 출발하자.”

“그럼 우리 산채 비빔밥 먹을까?”

“그냥 대충 먹고 가자. 도착하면 해 떨어질 거 같은데.”

“그래도, 오늘은 꼭 먹어야 될 거 같아.”

@@@@@@@@@@@@@@@@@@@@@@@@@@@@@@@@@@@@@@@@@@

“너 어떻게 된 거야? 네가 왜 여기 있어?”

사건 당일, 눈물을 쏟아낸 뒤, 한결 가벼운 마음을 안고 경찰서로 향했다. 하지만 그곳에는 뜻하지 않은 사람이 와 있었다. 범휘였다. 내가 차야할 반짝이는 수갑을 대신 두른 채.

“걱정 마세요, 누님. 벌써 경찰들 형님 계신 곳으로 출발 했으니까요.”

범휘는 앞으로 어떠한 일이 닥칠지 모르는 사람처럼 넉살좋은 웃음을 보였다. 표정이 굳어진 것은 오히려 내 쪽이었다.

“그러니까. 지금 이게 어떻게 된 거냐고.”

나의 물음에 어이없는 범휘의 대답이 들려왔다.

“하하! 오랜만에 징역 밥이 그리워서요. 그리고 형님께서 오죽 절 부려먹었어야지요. 저도 과로라고요. 오랜만에 좀 쉬고 오려고 그래요.”

범휘가 왜 여자들에게 인기가 없는지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재미없는 농담 때문이었다. 웃음이 아닌 가슴 아픈 눈물을 주는 슬픈 농담.

“바보새끼. 너, 정말.”

어떠한 말을 해야 하는 것일까? 고맙다고? 아니면 미안하다고? 어떤 말이 되었든 꺼내야 했지만 눈물만 흐를 뿐이었다. 그의 바보 같은 행동에, 그리고 나와 같이 대가 없는 희생을 해야만 하는 동병상련의 아픔에.

범휘의 재미없는 농담이 계속 되었다.

“누님. 그렇게 울지 마세요. 눈물을 닥아 드릴 수 없는 제 손이 너무나 미안하잖아요.”

수갑과 함께 온 몸을 밧줄로 포박당한 범휘의 손이 겨우 꼼지락거렸다. 농담이 재미없다는 것을 알았는지 그가 날 재촉했다.

“어서가세요. 형님이 위험 할 수도 있어요. 곁에 있어주세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범휘의 얼굴엔 아쉬움이 가득 묻어나왔다. 그런데 내 몸은 그의 그런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바로 반응을 하였다.

분명 내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끝까지 지켜보고 있었으리라. 그리고 먼발치로 사라져 가는 나의 마지막 모습에 참았던 눈물을 터트리며 서글프게 흐느꼈으리라.

아영의 위대한 희생에 맞지 않은 조촐한 장례가 치러졌다.

병원에 계시던 그녀의 어머니와 남동생, 그리고 나만이 자리를 지켰다.

과연 아영은 내게 무엇을 용서 받고 싶었던 것 일까? 이런 희생을 감내하면서 까지 그녀가 나와 천이에게서 용서를 구할 것이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세인을 신고한 자신의 과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녀는 알까? 그 모든 것을 이용한 나라는 여자의 더러움을.

만약 사실을 알았다면 그녀는 희생을 당연하다 받아 들였을까? 아니다. 그런 속박의 굴레를 안겨준 날 증오했을 것이다.

난 그녀의 시신이 한 줌의 재가 될 때까지 3일 밤낮을 속죄의 시간으로 보냈다. 천이와 나를 용서해 달라는 이기적인 속죄.

그렇게 3일간의 용서를 끝으로 마지막 남은 힘겨운 싸움 속에 모든 걸 털어내었다. 이제 살아남은 천을 위한 지금만이 내게 존재 할 뿐이었다.

천이의 일은 의외로 간단하게 풀 수 있었다.

범휘에게 소식이 전해지지 않는다는 천이의 말에 난 그를 접견하게 되었다.

두꺼운 유리벽 사이로 범휘가 다가왔다. 그리고 웃는 얼굴로 자리에 앉았다. 그의 뒤에 앉은 경찰관이 우리의 대화를 열심히 적어나갔다.

“누님, 오랜만입니다. 아영누님 장례는 잘 치러졌나요?”

“응. 힘들 줄 알았는데 다행히 잘 치룰 수 있었어. 몸은 괜찮니?”

“그럼요. 안에서 잘 쉬고 있습니다.”

천이 이야기를 꺼내야 했지만 가벼운 이야기들만이 오고갔다. 난 초조하게 시계를 바라보았다. 접견시간이 빠르게 흘러가고 있었다. 그런 나의 눈치를 읽었는지 그가 먼저 본론을 꺼내었다.

“하시고 싶은 이야기를 못하시고 계셔서 답답하시죠? 어떻게 해야 제가 기분 상하지 않고 들을까? 많이 고민되시죠?”

“.........”

“하하. 누님. 천이 형님 잘 계시죠? 형님께서 쓰신 서신 보니 잘 지내고 계신 것 같더군요. 형님께 걱정하지 말라고 전해주세요. 제가 알아서 짊어지겠다고요. 형님께 편지 안 보낸 이유는, 이렇게 하면 누님께서 얼굴 한 번 보여주실 거라 생각했거든요. 한 번 쯤은 찾아와 주시겠지....... 생각했거든요.”

범휘의 얼굴이 붉어졌다. 나 역시 뜨거운 열기가 올라왔다.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할까? 어떻게 그의 이야기에 답을 해야 할까? 하지만 생각은 가슴을 지배하지 못했다.

“범휘야. 너 정말 왜 그런 거니? 왜 이렇게 바보 같은 짓을 한 거야??

말이 필요 없는 질문이었다. 서로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문제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자로서의 욕심일까? 직접 듣고 싶은 욕심이 생겨났다. 하지만 그의 입은 내가 원하는 대답을 고집스럽게 거부하고 있었다.

“글쎄요. 그 때 말씀드렸잖아요. 너무 피곤해서 쉬고 싶었다고.”

잠시 침묵이 흘렀다. 다시 손목에 자리 잡은 시계를 바라보았다. 마지막 일분을 남겨두고 시계바늘이 빠르게 움직였다.

“좋아하니? 나 좋아해?”

결국은 내가 먼저 그에게 확인을 바랬다. 창피함도, 도도함도 필요치 않았다. 입 대신 그의 얼굴이 대답을 대신했다. 붉었던 얼굴은 더욱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추운 날씨에도 그의 코와 이마에 땀이 맺히기 시작했다. 눈시울은 붉어졌다.

그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지려는 찰나, 접견시간이 끝났음을 알리는 벨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하지만 그는 일어나지 않았다. 꿋꿋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렇다고 내 얼굴을 바라보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뒤에서 우리를 감시하던 경찰관이 범휘의 팔을 붙잡았다.

“접견 끝났습니다. 들어가세요.”

하지만 그는 원래 그 자리에 박혀 있었던 돌덩이 마냥 꿈쩍하지 않았다. 경찰이 다른 이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이봐들! 이리 와서 3912번 좀 끌어내자고!”

여러 제복을 입은 남자들이 몰려들어왔다. 몇몇은 옆에 차고 있던 봉을 손에 쥐고 경계를 하였다.

“범휘야. 이미 서로가 잘 알고 있잖아. 그러니까. 애기해. 가슴속에 담아 두는 것처럼 후회되는 일이 없더라. 가슴의 미련함, 이젠 버려도 돼.”

범휘가 봉변을 당할 것 같아 급히 대답을 재촉했다. 나도 참 고집스럽게 그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경찰들이 그의 양 팔을 잡았다. 그는 일어서지 않으려 두 손으로 의자를 잡고 버텨냈다.

“그만, 그만해 범휘야. 나 일어날게.”

분위기가 험악해 지는 것을 막으려 내가 먼저 고집을 꺾었다. 접견실을 빠져나가려는데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님! 피부가 많이 칙칙해 지셨어요! 그리고 손이 왜 그렇게 추워보이세요? 형님 자유로워지시면 절대 누님 손 놓지 말라 아우가 당부했다고 말씀 좀 전해주세요. 꼭입니다. 형님께  꼭 말씀해주셔야 해요!”

범휘는 끌려가는 가운데에서도 끝까지 가슴속에 외침을 분출하지 않았다.

잠시 그 자리에 서서 내 두 손을 매만져 보았다.

손은……. 너무나 차가웠다.

범휘의 재판이 있던 날.

저 멀리 범휘의 뒷모습이 보였다. 재판은 빠르게 진행 되었다.

“피고 박범휘는 사채유기 및 살인, 성매매 알선과 방화, 불법 조직단체 가입 등 강력 범죄를 저질렀으며, 이미 수차례의 폭력 전과 및 같은 사건으로 수감한 것도 있었으나 전혀 반성하지 않고 또 다시 이 자리에 서게 되었다. 그러므로 더 이상의 선처는 있을 수가 없다고 판단, 본 법정은 피고에게 사형을 선고하는 바이다. 단! 그 집행은 무기한 유예한다.”

(쾅! 쾅! 쾅!)

내 심장 박동과 비슷한 소리가 온 법정에 울려 퍼졌다.

범휘는 모든 걸 체념 한 듯 순순히 경찰과 함께 사라졌다.

이제 보육원을 빠져 나왔을 때처럼 천이와 나 다시 둘만 남겨지게 되었다.

천이의 말처럼 그들을 대신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많을까?

그들을 보내야 하는 마음이 못내 아쉬워지고 있었다.

“나 오늘 떠나. 마지막 인사 하러 왔어.”

범휘를 같은 공간에서 접견을 할 수 있었다. 마지막이었기에 오늘 만큼은 특별한 만남을 준비 하고 싶었다.

접견 몇 주 전부터 교도소 소장과 많은 거래를 해야 했다. 손님 중 한 사람이 교도소 소장을 연결해 주었고, 난 그에게 돈과 술, 환락을 제공해야만 했다.

범휘와 마주 앉은 공간은 학교 교실과 같은 느낌이었다. 넓은 공간 앞뒤로 문이 달려있었고, 가운데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우린 그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교도관들이 양 쪽 문을 지키며 우리를 지켜보았다.

“아! 그래요. 그래서 이렇게 볼 수 있는 거구나. 헤헤.”

범휘가 잠시 서운한 모습을 보이더니 금세 밝게 웃었다.

“밥은 잘 챙겨 먹는 거야? 그래도 건강해 보여서 다행이다.”

“하하! 누님. 이래봬도 건달 아닙니까. 들어오자마자 방장 먹었어요. 그리고 저희 방에는 경제사범들이 꽤 많이 있어서 먹을 것도 풍족하답니다.”

“그래? 그래도 잘 지내고 있는걸!”

“그럼요. 오랜만에 낮잠도 실컷 자고, 빈둥빈둥 있으니 살도 많이 올랐어요.”

서로를 볼 수 있는 시간은 30분, 벌써 20분이 쓸데없는 말장난으로 흘러갔다. 그저 그런 이야기. 그저 그런 농담에 억지웃음으로 우린 답했다.

차라리 이렇게 거짓된 웃음으로 작별을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 생각을 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오랜 시간을 앉아있을 수 없었다. 시간이 줄어들수록 우리에겐 진한 아쉬움이 묻어 나왔기 때문이다.

“이만 가봐야 갰어. 자주 찾아오지는 못하지만 전자서신 자주 넣을게.”

더 이상 앉아있다가는 범휘에게 눈물을 보일 것이 불 보듯 뻔했다. 변변한 인사도 없이 급하게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갑자기 범휘가 내 손을 붙들었다. 빤히 지켜보던 교도관들이 허리에 찬 몽둥이에 손을 가져갔다.

“누님. 아직 시간 남았잖아요. 조금만 더 이야기해요. 네? 그냥 아무 애기라도 좋으니까 조금만 더 이야기합시다.”

난 끝내 울음을 터트리고야 말았다. 애걸하는 듯이 들려오는 범휘의 목소리가 내 가슴 한구석을 잔인하게 후벼 파고 있었다. 내 흐느낌에 교도관들은 행동을 멈추고 다시 문 앞을 지켰다.

“누님, 나 조금만 울게요. 눈물을 참으려고 하니, 눈앞이 흐려져서 누님 얼굴을 담지 못하겠어요. 조금이라도 더 누님의 얼굴을 두 눈에 담고 싶어서 그러는 거니까, 저 조금만 울게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범휘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여전히 내 손은 따뜻한 체온을 느끼고 있었다. 범휘의 다른 한 손이 내 눈물을 닦아 주었다. 손길은 너무나 조심스러웠다. 마치 조금이라도 힘을 주면 깨지는 물건을 다루는 듯했다.

“앞으로는 울지 마세요. 더 이상 누님의 눈물을 닦아 드릴 수가 없잖아요. 그러니까 앞으로는 항상 웃는 일만 가득 만들어보세요. 항상 누님에게 웃음만을 드리려 노력했는데, 마지막에 와서 이게 뭐하는 짓인지. 하하.”

흐느낌인지 웃음인지 알 수 없는 소리가 전해졌다. 그의 손길에 나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눈으로 보이지 않는 그의 가슴이 손을 타고 내 얼굴에 전해지고 있었다.

“우리가 살면서 다시 볼 수 있을까요? 한 번 쯤은 다시 볼 수 있을까요?”

너무나 슬픈 이야기. 너무나 슬프고 슬퍼서 가슴이 천 갈레 만 갈레로 찢어진다 하더라도 다 할 수 없는 슬픈 물음.

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눈물을 빼는 일만으로도 내 가슴은 충분히 힘들어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슨 말을 꺼내려는 순간, 내 심장이 터져버릴 것 같았다.

“누님. 초라하게 들리겠지만, 정말 이런 자리에서 말하기는 너무나 어울리지 않는 말이겠지만, 지금이 아니면 평생을 가슴속에 담고 살아가야 하기에 한 마디만 하겠습니다. 너무나 보잘것없는 흔해 빠진 말이지만, 그래도 하렵니다.”

말을 하며 범휘가 살짝 입술을 깨물어 보였다. 난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가 어떤 말을 할 지 이미 예상하고 있었기에 더욱 그의 진심을 가슴에 담아두고 싶었다.

“사랑, 합, 니, 다. 누님. 정말 너무나 사랑합니다.”

드디어 그가 기다리고 기다렸었던 간절한 단어를 내게 말해 주었다. 그의 말에 대한 대답을 준비했었지만 내 입은 벙어리가 되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막상 그의 고백을 듣고 나니 너무나 벅차올랐다.

밤의 대한민국 속에서 사랑이란 단어는 흔해빠진 단어이자 거짓말의 표준어였다. 손님들과 다른 뭇 남정네들에게 귀가 닳도록 들었던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의 고백만큼은 흔해빠진 단어가 아닌, 거짓말의 표준어도 아닌, 귀가 닳도록 들어왔던 이야기도 아닌, 순수한 사랑이란 단어 그대로 전해져왔다.

“미안합니다. 이렇게 초라한 말로 대신해야함이. 정말, 너무나 미안합니다.”

이번에는 내가 그의 손을 꼭 쥐었다. 그리고 멘트 성 짙은 대답을 말끔히 지워버리고 진심을 담아 이야기 했다.

“아니, 세상에서 가장 멋진 고백이야. 목숨을 담보로 이야기 해줬잖아. 범휘 네 목숨을 걸고 이야기하는 사랑이잖아. 평생 동안 사랑이란 감정에 목마름을 느끼며 살아야 한다 생각했어. 그런데 그렇지 않았네. 왜 이제야 알았을까? 왜 이제야 나도 사랑 받을 수 있다는 자신감과 욕심이 생겨나는 걸까?”

지금까지 내 삶에 일말의 후회나 미련은 없었다. 그런데 지금, 내 가슴은 알 수 없는 미련과 후회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의 말 한마디에 나의 모든 것이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내 말에 범휘가 웃고 있다. 너무나 시원스럽게, 너무나 가슴 아프게, 너무나 슬픈 모습으로 웃고 있다.

“면회 끝!”

간절하고도 애절한 우리의 슬픔을 읽지 못한 교도관이 매정하게 소리쳤다. 하지만 우리의 두 손은 떨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서로의 손을 더욱 세게 잡으며 떨어지지 않으려 노력했다. 서로의 두 눈을 마주보며 영원히 잊지 못할 서로의 모습을 조금 더 담아두려 노력했다.

명령에 불복종 하자 앞문에 서있던 교도관이 우리에게 다가왔다. 뒷문에 있던 교도관이 그를 제지했다. 그리고 무슨 말을 속삭이더니 함께 나란히 우리를 지켜보았다.

“누님. 이게 마지막입니다. 제가 누님에게 사랑을 이야기 하는 것도, 누님이 제 사랑을 기억해 주시는 것도, 더 이상 누님을 기억하지 않겠습니다. 누님 역시 절 기억하시면 안 됩니다. 앞으로 누님의 앞길에 있어서 저의 기억은 독입니다. 그 독을 안고 살아가지 마십시오. 저 역시 마찬가지일 터이니 깨끗하게 잊겠습니다. 그래도 다행입니다. 사랑한다. 이야기 할 수 있어서. 만약 이대로 말하지 않고 가슴에 담아 두었더라면, 평생을 안고 살아가야 했을 겁니다. 하지만 이미 가슴속에 있던 모든 것을 쏟아내었으니 정말 다행입니다. 조심해서 가세요. 더 이상, 서로의 소식도 전하지 말아요. 그냥 서로 잘 살고 있다고 생각해요. 앞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각자의 행복을 위해 쓰면서 살아가요. 남에게 희생하지도 않고 남을 위해 배려하지도 않으며, 정말 지독하게 이기적으로 살아가요. 알겠죠?”

마지막 범휘의 손길이 전해졌다. 그리고 한 치의 아쉬움도 없다는 듯 의자를 세차게 밀고 일어나 밖으로 나가버렸다.

홀로 남겨진 난, 범휘가 마지막으로 뱉어낸 말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마지막 말이 어떤 내용이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기억나지 않아. 무슨 말을 한 거야? 뭐라고 지껄이고 그렇게 돌아 선거야? 나에게 뭘 바란다고 말 한 거야? 바보야. 울지 말고 또박또박 이야기해야 사람이 알아듣지. 정말, 어떤 말인지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박범휘.)

“형님. 범휘입니다.”

“그래. 아우. 고생이 많네. 형이 찾아가야 되는데, 오늘 이사를 좀 해야 돼서.”

“아닙니다. 형님. 제게 약속하나만 해주십시오. 통화를 겨우 하는 것이라 시간이 없으니 제 말만하겠습니다.

“어?”

“밤의 대한민국에서 떠나십시오. 더 이상 형님을 보호해드릴 수 없으니 이젠 형님 스스로가 자신을 보호해야 합니다. 하지만 형님 혼자 감당하기엔 힘겨운 이곳입니다. 죄송합니다. 끝까지 지켜드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끝까지 그녀를 사랑해서 너무나 죄송합니다.”

(뚝!)

@@@@@@@@@@@@@@@@@@@@@@@@@@@@@@@@@@@@@@@@@@

그녀에게 사랑을 고백하는데 난 너무나 비싼 대가를 치러야 했다. 그래도 다행이다. 그녀가 준 마지막 담배 한가치를 가지고 들어올 수 있어서.

이곳에서 친구를 하나 사귀었다. 징역에서 만날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던 사람이었다.

“박 실장님? 이야! 이런 곳에서 만나게 되네요.”

예전 천이 형님 대신 대포차를 거래할 때 봤던 창석이란 사내였다. 사기꾼이라 그런가? 친분이 두터운 사람처럼 다가왔다. 그리고 내 명찰이 빨간 색인 것을 보고 안타까워했다.

“잔인한 형을 받으셨네요.”

예전 같으면 그런 부류의 사람들과 거리를 두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내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렇게 그가 내게 동정어린 말이라도 던져 준다는 것에 왠지 모를 고마움이 느껴졌다.

“그러게요. 그런데 어떻게 여기까지 들어오시게 되었습니까?”

“저야 뭐, 사기꾼의 철학을 유기한 대가이지요. 미련하게도. 아무튼 수많은 교도소에서 이렇게 만나 뵙기란 정말 우연 아닌가요? 앞으로 잘 지내봅시다. 이래봬도 제가 경제사범 아닙니까. 배고프면 언제든지 말씀하세요. 징역에서 먹는 군것질만큼 맛난 것은 없잖아요?”

그의 호의를 거절하지 않았다. 누구하나 날 돌봐 주지 않는 이곳에서 그는 참 많은 의지가 되었다.

징역에서는 비둘기라는 인간 무전기가 있다. 그와 난 비둘기를 통해 서로를 조금씩 알아갔다.

점심시간이면 매일 함께 운동장을 거닐며 서로의 이야기를 잡다하게 나누었다. 시간이 지날 수 록 우린 친구와 같이 절친한 사이가 되었다.

“범휘야. 도대체 사랑하는 사람이 누구야?”

“너도 아는 사람이야.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봤었지.”

“뭐? 그럼 혹시. 그 실장?”

“하하! 뭘 대놓고 물어봐? 쑥스럽게.”

그의 훌륭한 언변 때문이었을까? 나도 모르게 그녀에 대한 이야기까지 하게 되었다. 그 뒤로 그는 점심시간이면 어김없이 그녀에 대해 집요하게 물었다.

“그럼. 정천이라는 사람하고 같이 떠난 거야?”

“아마도, 그 뒤로는 소식이 없어.”

그는 언제나 친절한 상담사 역할을 자처하였다. 말동무가 생기자 이곳의 생활이 그다지 지루하지 않았다. 여자들처럼 수다를 즐기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속에 있던 이야기들이 쏟아지니 가슴도 한결 홀가분하니 가벼워졌다.

하지만 이러한 시간도 내겐 쉽게 허락되지 않았다. 금기된 사랑을 위한 나의 행위는 생각했던 것보다 빠르게 그 대가를 원하고 있었다.

평상시와 다름없는 나날이었다. 아침에 일어나 밥을 먹고 비둘기로 그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점심시간에 그를 만나 함께 운동을 하며 그녀에 대한 추억을 떠올렸고, 오후가 되자 독서와 함께 부치지 못할 편지를 써내려갔다. 어느덧 밤이 찾아왔고, 난 그에게 잘 자라는 비둘기 서신과 함께 자리에 누웠다. 그런데 평상시와 다르게 잠자리가 무척 불편하게 느껴졌다.

구둣발 소리가 복도 끝에서 들려왔다. 죽음에 대한 직감적인 본능인가? 왠지 모를 불안감이 엄습해왔다. 점점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그리고 바로 코앞에서 소리는 멈춰졌다.

쇠가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3912번, 나와.”

교도관의 목소리가 무엇을 뜻하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새벽에 들려오는 교도관의 목소리는 저승사자를 부르는 소리였기에.

이미 예견된 일이었지만, 이미 죽음이 다가 올 거라 생각은 했지만, 아무렇지 않게 죽음을 받아들이겠다고 다짐 했던 나의 맹세는 막상 일이 닥치자 쉽게 무너졌다.

저항 없이 교도관을 따라나섰다. 죽음이 찾아온 사람에게 발악은 그저 덧없는 불필요한 행동이었다. 그리고 저항이 거셀수록 빠른 죽음이 찾아온다.

저 기다란 복도의 끝에 내 마지막이 있다. 한 걸음 한 걸음이 내겐 정말 소중한 순간들이었다. 지금 이대로 이곳을 뛰쳐나가 그녀를 보고 싶었다. 머릿속은 수많은 상상을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그녀가 있는 곳으로 갈 수 있는 순간이동의 능력이 주어졌으면, 천이 형님이 범휘는 범인이 아니라고. 내가 모든 것을 계획한 거라 이야기 해줬으면, 컴퓨터의 오류로 인하여 사형집행이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었으면.’

그녀에 대한 생각으로 시작된 상상은 죽음이 가까워질수록 현실적이고, 간절한 삶의 의지를 불태우기 시작했다. 아련한 그녀의 기억은 굵은 밧줄이 눈에 들어오자 싹 사라지고 없었다. 오로지 살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녀가 미워졌다. 형님이 증오스러웠다. 나 혼자만 이렇게 억울하게 죽어야 하는 것에 분통이 터져 나왔다. 다른 사람의 행복을 위한 희생이 죽기보다 싫었다.

손과 발이 점점 오그라들었다. 부들부들 떨려오는 심장은 벌써부터 제 기능을 상실하려 하였다.

“담배 한 대 피시겠어요?”

교도관이 부드럽게 말하며 담배를 건넸다.

“아니요. 불만 주시겠어요? 담배는 있습니다.”

내가 손을 펴보였다. 그녀가 준 담배가 금방이라도 끊어질 것처럼 축축하게 젖어 흐느적거렸다. 교도관은 옅은 미소를 보이며 담배가 끓어질세라 조심스럽게 불을 붙여 주었다.

젖은 담배는 꽤 오랜 시간을 타들어 갔다. 미친 내 마음은 그녀를 증오하다가 다시 그녀에게 고마워하고 있다. 조금이나마 내 생명을 연장해 주는 이 담배를 건넸다는 것에.

마지막 불씨가 강렬하게 타들어 갔다.

“박범휘씨? 시신 인도는 곽창석씨가 하고 싶다고 했는데 괜찮습니까?”

교도관의 말은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더 담배를 빨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담뱃재가 다 타들어가고 매쿼한 냄새와 함께 필터가 타들어가기 시작했다.

“곽창석씨가 범휘씨께 후한 장례를 치러드리고 싶다고 하더군요. 그렇게 하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다시 한 번 권유하는 교도관의 이야기에 난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후를 생각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지금 내가 행사 할 수 있는 권리라고는 이것 밖에 없었다. 담배는 이제 필터를 반절이나 태우고 희미하게 불씨를 잃어갔다.

목에 검은 천이 씌워졌다. 죽음에 대한 공포가 극에 달했다. 정녕 이대로 죽는 것인가? 믿기지 않았다. 아직 난 살아있다. 몇 분 뒤에 싸늘한 시신이 될 거라는 현실이 도저히 와 닿지 않았다. 죽음이라, 죽음이라, 항상 의문을 가지고 살아왔었다. 하지만 그건 살아있는 자의 사치스러운 생각이라는 것을 죽음이 코앞에 와서야 깨달았다.

사후의 세계? 차라리 그것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면 덜 무서울 것이다.

그런 내 마음을 알았던 것일까?

신께 나의 죄를 사하여 달라는 신부의 기도가 들려왔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신부의 음성은 뇌리 깊숙한 곳에 박히고 있었다.

“당신 아들의 죄를 부디 사하여 주시옵소서. 주님을 믿는 불쌍한 영혼을 구제하여 주시옵소서. 천국의 문을 열어 주시옵소서.”

천국, 그 단어가 날 조금씩 진정시키기 시작했다. 사후세계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가진 신부의 존재가 이렇게 고마운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살아서 성당이나 교회를 좀 다녀 볼 걸 하는 후회도 생겨났다. 사후세계가 있다는 것을 믿게 되자 난 천국으로 갈까 지옥으로 갈까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하나님은 믿음만 있다면 지상에서의 죄를 묻지 않는다고 했던가? 그런데 하루만 믿어도 과연 천국의 문을 열어 줄까?

난 마치 면죄부를 얻은 것처럼 마음이 가벼워 졌다. 그러자 그녀의 얼굴이 어둠속에서 선명하게 그려지기 시작했다.

신부의 기도가 거의 끝나가는 순간, 나 역시 신께 조용히 기도했다.

“신이시여, 그녀의 죄를 사하여 주시길. 모든 죄는 이 미천한 영혼으로 대신할 터이니 그녀만은 행복하게 해주시길.”

(곽창석)

“범휘, 죽으면 어떻게 할래?”

“뭐?”

“죽게 되면 말이야. 죽으면, 뭘 하고 싶냐고.”

“그냥, 그녀를 보고 싶어. 죽어서도, 그냥 그녀를 지켜주고 싶다.”

@@@@@@@@@@@@@@@@@@@@@@@@@@@@@@@@@@@@@@@@@@

경찰서에서 모든 사건의 전황을 들을 수 있었다. 형사는 형을 죽인 사람은 박범휘였고, 정천이란 사내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하였다.

“저런 녀석들 이야기를 믿은 거야? 자네는 이용만 당했군, 그런데 어쩌겠어. 이미 여자는 죽어버렸는데.”

모든 것이 덧없게 느껴졌다. 낯설지 않은 유치장에 수감이 된 뒤 얼마 후, 난 구치소에 수감이 되었다. 어차피 사실 정황이 분명하기에 재판은 속전속결로 치러졌다.

다행히도 나의 죄는 사람을 죽인 것에 비하여 가벼운 처벌을 받았다.

“피고 곽창석은 살인을 저질렀으나, 피해자 유족들이 선처를 부탁하는 탄원서와 유족들에게 죄를 뉘우쳐 보상을 해준 것을 감안, 김상수와 이석천의 살인계획에 이용된 점, 사기죄 이외의 강력 범죄 전과가 없는 것을 고려하여 징역 7년을 선고하는 바이다.”

내가 구속되자마자, 장 사장은 하루가 멀다 하고 날 찾아왔다. 사기꾼이지만, 그래도 정은 깊은 사람이었던 것 같다. 사업에 있어서 큰 차질이 빚어졌다며 투덜거리기는 했지만 능력 있는 변호사와 함께 내 몫을 정확하게 떼어주었다.

“장 사장님, 고맙습니다.”

“뭐가 이 사람아. 사기꾼의 마지막 철칙이 뭔 줄 알아? 바로 자기 파트너에게는 사기를 치지 않는다는 거야. 사기꾼은 말이야. 절대 혼자 해 먹을 수 없는 거거든. 언제나 서포터를 해주는 사람이 있어야 돼. 하하 우린 7년 뒤나 사기를 칠 수 있겠군. 아니, 잘하면 가석방도 있으니 미리미리 아이템 좀 구상해 놔야겠어.”

장 사장은 내게 힘을 내라는 듯 가벼운 농담으로 웃음을 주려 노력했다.

“사장님, 부탁이 있습니다. 김아영이라는 여자 유족들에게 보상을 해주고 싶습니다. 제 몫 절반을 그녀의 가족들에게 전달해 주십시오.”

예전 같았으면 훈계와 함께 미련하다는 말투로 이야기 했을 장 사장이 군소리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사실, 자네가 그렇게 하는 것이 도리 아니겠나. 사람을 죽이면 사기꾼이 아니지. 사기꾼이라도 다 같은 사기꾼이 아니야. 사기를 당해서 사람이 죽었다면 그건 살인자지 사기꾼이 아니야. 사기도 목숨 질긴 놈들한테 쳐야 하는 거거든. 그런데 자네는 간접적인 것도 아닌 진짜 사람을 죽였으니 당연히 그렇게 하는 게 맞는 것 같네.”

장 사장은 다음날 바로 그녀의 가족들에게 돈을 전했다. 그렇다고 내 죄를 스스로 용서한 것은 아니었다.

난 형의 죽음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는 그녀의 목숨을 앗아갔다. 그리고 그녀의 마지막 고통까지 끝까지 지켜봤던 나이다. 여러 사내의 손길에 더럽혀지는 그녀의 모습, 무자비한 폭력에 살려고 바동대는 처절한 모습까지. 하지만 난 그저 방관만 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의 이기적인 욕심으로 그녀를 죽음으로 내몰았다.

사기꾼으로 살아오면서 죄의식은 영원한 마취주사를 맞았다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의 눈빛을 잊을 수가 없다. 공포, 수치심, 불가능함 마저 한 사람을 위한 맹목적인 용기로 버텨내던 그녀. 그런 아름다운 가슴의 불씨를 내가 꺼뜨려버린 것이다.

형의 복수? 아니었다. 그것은 감정의 오버였다. 이미 내겐 복수심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었던 것이다. 그저, 혼자만의 자아도취에 빠져버려 거짓 분노에 이성을 빼앗긴 것이었다.

처절한 복수극의 영화들 때문이다. 그런 류의 영화들로 인하여 난, 그렇게 하는 것이 당연하다 생각해 버렸던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일상에서 그런 복수극을 펼칠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을 거라 장담한다. 나와 비슷한 처지의 사람 중, 내 이야기를 부정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복수의 기회가 온다 하더라도, 복수의 상대를 죽여도 죄를 받지 않는다는 가정을 하더라도, 살인을 실행에 옮길 용기는 결단코 나오지 않을 것이다. 두려움과 사람을 죽인다는 자책감이 더욱 자신을 조여 올 테니까.

그녀에게 어떤 용서로 속죄를 해야 하나 곰곰이 생각을 해보았다. 그리고 나 나름대로의 방법을 계획했다.

면회를 온 장 사장에게 한 가지 부탁을 했다.

“사장님, 박범휘씨가 수감된 교도소로 갈 수 있게 해주실 수 있나요?”

“뭐, 죄를 깎아 달라는 부탁은 들어 줄 수 없어도 그 정도야 손을 써 볼 수 있겠지. 내가 이래봬도 징역은 임금님처럼 사는 사람 아닌가. 기다려 보소.”

장 사장은 약속하나는 철저하게 지켜줬다. 덕분에 난 범휘와 같은 교도소로 이감 갈 수 있었다.

그를 면회 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미 조직 내에서도 선배를 죽인 비열한 놈으로 낙인이 찍혀있었다. 수발하는 이들이 없으니 당연히 가난한 배를 움켜 쥘 수밖에 없었다.

그는 내가 아영을 죽인 살인범이라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다. 의지 할 곳이 없는 그는 날 살갑게 맞아 줄 것이 분명했다.

이게 첫 번째 그녀를 위한 속죄였다.

그녀의 주위에 있던 모든 이들에게 편안함과 안락을 제공하는 것.

가족들에게, 그리고 그녀의 친구들에게.

역시나 범휘는 내 호의를 거절하지 않았고, 우리는 많이 가까워 질 수 있었다. 그를 분당에서 처음 보았을 때에는 굉장히 까칠했었지만, 이곳에서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시간이 지나자 그는 서슴없이 가슴속 이야기 까지 털어 놓기 시작했다.

그의 사랑이야기, 천이라는 사내와 함께 했던 어린 시절의 사건, 연수라는 여자 이야기까지. 두 번째 그녀를 위한 속죄는 형을 죽인 이를 용서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내가 용서를 해야 할 사람은 점점 많아졌다. 형사가 이야기 해준 사건 정황과는 전혀 다른 내용들이었다.

“사실 난 형님이 이 모든 계획을 알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어. 그런데 형님은 그걸 방관만 했지.”

“천이라는 사람이 어떻게 알아?”

“세인 누님의 장례식장에 왔다가갔었거든 아무도 모르게. 많이 슬퍼했지. 정말 많이 슬퍼했어. 너무나 힘겨워했고, 자신을 위하여 희생했다는 것에 너무나 미안해했어. 세인누님의 장례가 끝나고 며칠 뒤 형님이 더 이상 참기 힘들었는지 연수누님께 세인누님이 죽은 사실을 알고 있다 말하고 진실을 알고 싶어 했어. 그런데 내가 말하지 말라 협박했어. 형님이 진실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그녀가 알게 되는 순간 형님과 나의 인연은 여기서 끝이라고, 형님은 내 조건을 쉽게 승낙했지. 형님도 내가 없으면 다른 녀석들이 안전을 위협하고 사업을 빼앗을 거라는 걸 너무도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형님에게도 결코 나쁜 조건의 거래는 아니었으니까.”

그의 말에 적지 않은 충격이 전해졌다. 하지만, 그의 다음이야기가 궁금했던 나는 마음을 다잡고 평정심을 유지했다. 아니, 이미 나에게는 형에 대한 그리움이란 감정마저 사라졌기에 가능한 연기였을지 모르겠다.

“나쁘지 않은 거래?”

“그래. 나쁘지 않은 거래. 형님도 그녀가 떠나는 것은 원치 않았을 테니까. 그녀는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거든. 정말 그냥 떠나버릴 사람이거든. 형님이 자신을 원망하고 미워한다는 것을 세상에서 가장 두려워하는 사람이거든. 형님도 그런 그녀를 너무 잘 알기에 나와의 거래를 받아들였겠지. 아마도.”

서로의 정당성. 박범휘, 나, 정천, 서연수. 김아영.

어쩌면 우리들은 다른 이들처럼 서로 자신의 행복을 지키려는 당연한 일을 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다만, 지키려는 것이 목숨이었기에, 이곳 밤의 대한민국 안에 살고 있는 우리였기에 이런 엇갈림과 죽음이 연관 되었을 수도.......

누가 누구를 용서 할 수 있을까? 누가 누구를 탓 할 수 있을까? 누가 누구를 벌 할 수 있을까?

그저 서로 살기 위한, 서로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한 투쟁이었을 뿐. 어느 누가 우리를 욕 할 수 있는 것일까?

그녀를 위한 속죄로 시작된 나의 행위들은 오히려 나의 가슴을 가볍게 만들어 주었다. 그리고 그녀에 대한 속죄의 방법이 잘못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들에게 그녀를 위한 아픔 따위는 없었다. 오로지 자신들이 소중하다 생각한 것들을 위한 아쉬움만이 남아있을 뿐. 이미 그들에게 그녀를 위한 슬픔은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김아영, 그녀는 소중한 존재도 큰 의미도 아니었다.

그녀에게서 나와 같은 동병상련의 아픔이 느껴졌다. 그 누구에게도 소중한 사람이 될 수 없는. 그러나 자신의 존재를 타인에게 인식시키기 위한 노력과 희망을 안고 사는.

그녀를 위한 세 번째 속죄가 추가되었다.

바로 그녀를 영원히 기억하고 슬퍼해주는 일.

하루하루 한시도 빼놓지 않고 기도를 하고 생각했다. 그러자 그녀에 대한 궁금증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아영이란 여자 말이야. 어떤 사람이었어?”

자신의 이야기를 물어보는 것을 좋아하는 범휘였지만, 그녀에 대한 기억만큼은 별로 없는 듯 했다.

“그냥. 아영누님이 형님을 참 많이 좋아했지. 사람이 그렇게 단순 할 수가 없었어. 누굴 좋아하면 눈에 보이는 행동들 있잖아. 선물을 준다던지,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고 어떻게 해서든 들어주는 거. 형님이 그런 누님을 많이 이용하기도 했었어. 싫다고 발악하면서도 결국은 형님이 조금만 잘해주고 하면 아무리 어려운 부탁일 지라도 다 들어줬었거든. 그리고 참 귀여운 얼굴에 걸맞은 행동들을 많이 했었던 거 같아. 나도 세인 형수님 살아계실 때 보고는 잘 못 봐서 그다지 기억이 많지는 않네.”

그녀를 알아 갈수록 안타까움이 더해갔다. 그리고 왠지 모를 애틋함과 함께 알 수 없는 뜨거운 감정이 일어났다. 매일 같이 은근히 그녀에 대한 여러 가지를 물어보았다. 그녀의 이야기를 물을 때면 나도 모르게 설렘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점심시간이 끝나면 그녀에 대한 기록들을 수첩에 옮겨 적었다. 하루 중 가장 보람된 시간이었다. 하지만 그녀에 대해 많은 것을 알아 낼 수 없었다. 범휘의 마지막이 생각보다 너무 빨리 왔기 때문이다.

새벽의 기운이 제법 풀린 어느 날, 꽤 많은 돈을 받아먹은 교도관이 날 조용히 깨웠다. 그리고 두꺼운 철창만 있는 건물을 빠져나와 접견실 옆에 있는 조그마한 방으로 데려갔다.

“박범휘씨 시신입니다. 어떻게 할 까요?”

담배를 건네는 교도관의 손을 조심스럽게 걷어내고 범휘를 감싸고 있는 하얀 천을 걷어내었다. 울음과 함께 웃음이 묘하게 섞인 표정. 영혼이 빠져나가기 직전 머리가 많은 감정을 만들어 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다.

차갑게 식은 범휘의 손에 무언가가 꽉 쥐어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주먹을 펴보려 했지만 굳어버린 손은 쉽사리 열리지 않았다.

보다 못 한 교도관이 손안에 있는 물건의 정체를 알려주었다.

“담배꽁초 입니다. 숨이 끝나는 시간까지 손에 힘을 풀지 않았습니다.”

난 그의 손을 조심스럽게 내려놓고 의자에 풀썩 주저앉았다. 슬픔의 폭풍은 불어오지 않았다. 다만, 잔잔한 아쉬움의 바람이 가슴에 불어왔다.

“일단 화장해서 안락한 곳에서 쉬게 해주십시오. 묻지는 마시고요. 제가 출소하면 따로 데려갈 곳이 있습니다.”

(5년 뒤.)

“하하 이봐! 생각보다 성실했나봐! 하하하!”

세월로 인하여 벗겨진 이마만큼이나 시원한 장사장의 목소리가 나의 출소를 환영했다. 그의 손에는 두부를 대신하여 햄버거가 들려있었다.

“우리 같은 사람이 죄를 다시 짓지 않는다는 약속은 신께 거짓말을 하는 것이니 이걸로 대신하게.”

햄버거를 받아 들고 입 안 가득 넣어 씹어보았다. 그래도 신경을 썼는지 슈퍼에서 파는 햄버거는 아닌 것 같았다.

차에 오르자마자 장 사장의 입은 쉴 새 없이 움직였다.

“내가 자네 나오기 전에 계획한 일이 있는데 말이야. 오랜만에 호흡을 맞춰 봐야지 않겠어?”

“사장님. 그 전에 드릴 때가 있습니다. 3일 정도 있다가 다시 찾아 봬도 괜찮겠죠?”

느닷없는 소리에 장 사장이 빤히 바라보았다.

“아직 정리 할게 남아있어서요.”

“그럴 줄 알았다고. 자네가 연수라는 여자 주소 알아보라고 할 때부터 알아봤지.”

장 사장은 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내 나에게 건넸다.

“맨 뒷장 봐봐. 거기 자세하게 나와 있으니까. 어디에서 세워 줄까?”

“XX 추모관아세요? 여기서 멀지 않다는데.”

“벌써 그리 가고 있는 중이야.”

장 사장은 내 계획을 이미 알고 있는 듯 했다. 수첩에 적힌 주소는 꽤 먼 거리에 위치한 지방이었다. XX면 이라 적힌 것을 보니 시골인 듯 했다.

“창석이. 이제 자네 이름을 찾을 텐가? 아니면 아직 유현진으로 남을 텐가?”

진지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장 사장을 바라봤다. 그는 내게 시선을 주지 않고 계속 운전을 하고 있었다. 웃음이 아닌 굳은 그의 모습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계속 말이 이어졌다.

“시간이 꽤 흘렀어. 충분히 안에서 반성했지 않나. 아영이란 아가씨 가족들도 잘 살고 있고, 연수라는 아가씨와 천이라는 총각도 잘 살고 있어. 이젠 자네만 벗어나면 돼. 모두가 행복하게 살고 있으니.”

차의 속도가 줄어들었다. 저만치 추모관이 눈에 들어왔다. 잠깐 서로가 침묵했다. 난 장 사장의 진지한 태도에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생각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추모관 입구에 다다랐다.

차에서 내리지 않고 장 사장을 바라보았다. 그 역시 날 바라보며 내 손을 잡았다. 내가 머뭇거리며 말을 못하자 다시 입을 열었다.

“자네의 뜻이 무언가? 그냥 편안하게 말해봐.”

계속 생각을 하자니 더욱 복잡하게 꼬여 입이 열리지 않았다. 그냥 머리를 비워내고 그의 손을 힘차게 잡았다.

“생각해 보니 이름에 너무 많은 의미를 두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곽창석이면 어떻고 유현진이면 어떻습니까? 뭐, 굳이 정하라고 한다면, 지금은 곽창석이고 싶습니다.”

장 사장의 손에서 힘이 풀렸다. 그가 주머니에서 열쇠를 하나 꺼내들었다.

“차키야. 지방까지 가려면 꽤 멀 거야. 택시 타고 XX백화점 주차장으로 가자고해. 거기 임판 단 XX차가 있을 거야. 타고가. 고생하고, 올라오면 소주나 한 잔 하자고.”

장 사장은 내가 내리기를 기다렸다. 나는 아무렇지 않게 차키를 받아들고 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문을 닫기 전 허리를 굽혀 그에게 말했다.

“사장님. 3일 후에 뵙겠습니다. 그 땐 곽창석이란 이름 모두 정리하고 올게요. 그리고 소주가 뭡니까? 다시 새롭게 사업 시작하는 마당에. 좋은 곳 예약해 두십시오.”

소설가  sojj1210@hanmail.net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피니언

포토

한지민 '우아하게'
  • 한지민 '우아하게'
  • 정은채 '반가운 손 인사'
  • 아일릿 원희 '시크한 볼하트'
  • 뉴진스 민지 '반가운 손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