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시전쟁 시달리며 희미해져
인생 밑그림 그리는 대학생활
전폭적 지지 보내주면 어떨지…
![]() |
함인희 이화여대 교수·사회학 |
지난 2월 봄 방학의 틈을 내어 5학년 6학년으로 진입하는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Youth 리더십 프로그램’을 시범 운영해보았다. 리더란 ‘자신의 꿈을 이루고자 혼신의 노력을 기울인 사람들’이란 점에 착안해 ‘꿈을 찾아 떠나는 여행’을 주제로 이틀을 신나게 보냈다. 아이들이 적어낸 꿈의 목록을 보니 ‘책 만 권 읽기, 공룡 연구가, 동남아시아 선교, 축구협회 회장, 레슬링 선수, 뮤지컬 가수, 최고경영자(CEO)의 친구 되기’ 등 신선한 상상력으로 넘쳐났고, ‘비가 오는 곳과 비가 오지 않는 곳 경계에 서 보기’ 같은 엉뚱함 속에 숨겨진 창의력을 살짝 드러내는 친구도 여럿 있었다.
한데 이처럼 재기와 패기로 넘쳐나던 초등학생 시절의 꿈 목록이 대입전쟁의 열기가 해를 더해가면서 한 계단씩 상급학교로 진학하는 동안 점차 꼬리를 내리는 것이 우리네 슬픈 현실이다. 마치 컨베이어 벨트를 거쳐 생산되는 제품처럼 정형화되고 획일화된 꿈을 꾸는 우리 자녀 모습은 마지막 기착지인 대입 면접장에서 확연하고도 분명히 감지된다.
수능이든 내신이든 성적 우수 학생들은 ‘점수가 아까워’ 무조건 의대 아니면 법대를 지망하는 건 기본이요, 면접장에 들어서면 미래 법관 지망생들은 너나없이 소외된 이웃을 위해 인권 변호사가 되겠노라 답하고, 의사 지망생은 ‘의술은 인술’이란 모범답안을 암송한다. 개별 전공을 지망하는 이유 또한 천편일률적이어서 중문과 지망생은 ‘중국이 뜨는 나라이기에’ 전공하려 하고 앞으로의 희망은 동시 통역사가 되겠노라 답한다. 불문과를 희망한다는 학생은 한결같이 카뮈의 이방인과 카프카의 변신을 감명 깊게 읽었다 하며, 장래 희망은 국제기구의 전문가를 꿈꾼다고 한다. 경영학에 관심 있는 학생이라면 굴지의 대기업이나 유수한 글로벌 기업의 당당한 CEO를 목표로 내세우곤 한다.
그러나 입시전쟁 속에서 명문대 입학을 최우선 목표로 삼았던 우리 자녀는 정작 대학생활이 시작되면서부터 심각한 문제에 봉착한다. 우리 인생의 밑그림은 대학 입학 후 약 8주 동안의 경험에 의해 그려진다는 연구결과가 아니더라도, 20대로 진입하면서 진정 자신이 원하는 것을 탐색해보고, 진정 잘 할 수 있는 것을 탐험해보는 동안 ‘될성부른 나무’는 뿌리를 내려가기 시작함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바로 이 시기를 지나면서 서서히 자신감을 잃어가고 꿈 또한 희미해져가기 시작하는 우리 자녀 모습이야말로 슬픈 역설 아니겠는지.
지금도 잊히지 않는 강의실에서의 경험담이 있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왠지 어깨가 축 늘어지는 것 같은 학생들을 향해 대학입시 면접 당시를 상기시켜 준 다음 이렇게 말했다. “진정한 꿈이란 이루어지기 위해 존재하는 희망이지 포기하기 위해 존재하는 악몽이 아닙니다. 남들에게 보기 좋은 것, 내세우기 좋은 것, 거창하기만 한 것, 그런 걸 꿈이라 하지 않습니다. 아직 늦지 않았으니 내가 진정 원하는 진짜 꿈을 꾸어 보십시오.” 순간 강의실엔 바늘 떨어지는 소리도 들릴 것 같은 적막이 흘렀고 더러 눈물을 닦는 모습도 눈에 띄었다.
자녀의 꿈이 공허한 울림으로 끝나지 않으려면 무엇보다 엄마와 아들딸의 동상동몽(同床同夢)이 이루어져야 할 것 같다. 정보사회의 뒤를 이어 ‘꿈의 사회’가 오고 있다는데, 우리 자녀가 저마다의 잠재력과 적성에 따라 형형색색 빛 꿈을 꿀 수 있도록 전폭적 지지를 보내줌은 어떨는지. 꿈을 포기한 채 한 번뿐인 인생을 관성에 따라 무미건조하게 지나가는 부모세대의 전철을 밟지 않도록 말이다.
함인희 이화여대 교수·사회학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