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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쿠시나가르 열반사에 있는 붓다의 열반상에 석양빛이 가득한 가운데 순례자들이 참배를 하고 있다. |
더 굳고 강하기를 바랄 수 없다. 아난다야, 너는 네 스스로를 등불로 삼고 법을 등불로 삼아라.”
마지막 여행의 출발점 라즈기르(왕사성). 교화의 중심지 죽림정사는 지금 벽돌 한 장 찾아볼 수 없고 대나무만 듬성듬성 자라고 있다. 감옥에 갇혀서도 붓다가 있는 영축산을 향해 예배했다는 빔비사라왕의 감옥은 돌담 터가 그날의 슬픈 사연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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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가 죽음을 앞둔 노인들에게도 법을 전파했다는 영축산에 순례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
“세존께서 병이 위중해 몸이 야위었을 때 저는 앞이 캄캄했습니다. 아직 승가에 대해 아무런 유언도 남기지 않고 돌아가시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 뒤에야 안심이 들었지요.”
열반 전에 교단을 계승할 사람을 지명해 달라는 뜻이었지만, 붓다는 그것이 잘못된 것임을 가르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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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가 열반한 곳에 세워진 열반사와 사라쌍수. |
바이샬리에는 붓다가 ‘화엄경’을 설했던 콜후아 마을에 완벽한 형태의 아쇼카 석주와 ‘스투파(탑)1’이 있고, 붓다 입멸 후 8등분 한 사리를 분배받은 곳에 세워진 ‘스투파2’가 평화스러운 모습으로 순례자들을 맞고 있다.
몸에는 괴색(壞色) 옷을 걸치고 손에는 발우 하나를 든 붓다는 쿠시나가르를 20㎞ 앞둔 파바 마을에서 대장장이 춘다로부터 ‘수크라 맛따바(돼지고기로 추정)’로 불리는 음식을 공양받고 또다시 병이 났다. 붉은 피를 쏟으며 심한 병고에 시달렸다. 설사를 계속하면서 스물 다섯 차례나 휴식을 취한 붓다는 마침내 쿠시나가르의 히란야바티강을 건너 두 그루의 사리나무 사이에서 고요히 누워 열반에 들었다. 이때 대지가 크게 진동했다고 경전은 전한다. 붓다가 열반한 곳은 지금 공원으로 조성돼 있고, 그 안에 흰 석회가 칠해진 열반사와 승원 유적지들이 곳곳에 남아 있다. 열반사 안에는 붓다가 열반 시 고요히 누워 있던 모습 그대로 AD 5세기경에 조성된 6.1m의 열반상이 모셔져 있다. 다른 유적지보다 잘 단장된 너른 경내에는 당시를 재현한 듯 두 그루의 사라나무가 버티고 있다. 대부분 힌두교나 이슬람교 신자인 이곳 주민들은 불교 유적지를 공원처럼 여기고 공휴일이면 도시락을 싸들고 산책을 나온다고 한다. 한 무슬림은 ‘위대한 성인’으로서 붓다를 기억했다.
붓다의 유해는 열반 7일 후 인근 다비장터에서 불태워졌으며, 몸에서 나온 사리는 8개 왕국에 분배됐다. 붓다의 유해를 화장한 다비장터에 라마브하르 스투파가 세워져 있다. 한국에서 간 조계종 순례단은 석가모니불을 염송하며 탑을 세 차례 돌았다.
붓다가 열반을 눈앞에 뒀을 때다. 그는 극도로 피로한 몸이었지만, 제자들에게 의문이 남아 있으면 질문을 하라고 몇 번이고 권한다. 모두 침묵으로 일관할 때 아난다가 “교법이나 승가, 혹은 실천 방법에 대해 조금도 의문이 남아 있는 사람은 없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내가 말하리라. ‘모든 현상은 변천한다. 게으름 없이 정진하라.’ 이것이 나의 마지막 말이다.”하늘에는 순한 소의 눈망울 같은 별들이 총총 피어나고 있었다. 조금 후 붓다는 가만히 눈을 감고 영원한 적정(寂靜)에 들어갔다. 흔들리지 않는 마음으로, 고통을 참아내고, 등불이 꺼지는 것처럼 마음의 해탈을 이룬 붓다, 인류는 그를 ‘위대한 스승’이라고 부른다. 광활한 영성의 들녘에 취해 고원한 정신세계를 더듬거렸던 기자의 인도 여행도 막바지에 접어들었다.
쿠시나가르·바이샬리(인도)=정성수 선임기자 hulk@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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