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드레아스 니콜라우스 ‘니키’ 라우다. 오스트리아 빈 출신인 그는 1970년대와 1980년대에 카레이싱(자동차 경주) 포뮬라 원(F1)을 주름잡은 영웅이다.
‘F1의 살아 있는 전설’과 ‘불사조’라는 별명을 지닌 그가 현역에서 은퇴한 지 23년이 흘렀다.
세인의 기억에서 사라졌을 법하지만 그는 은퇴 후 기업 최고경영자(CEO)로 변신해 다양하고 참신한 아이디어로
경영 일선에서 왕성한 활동을 벌이며 숱한 화제를 낳고 있다.
‘니키’라는 애칭으로 지금도 변함없이 팬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그는 선수 시절에 강인한 의지와 집념에다 용기와 재능을 겸비한 인물로 평가받았다. 지난 2월22일 59세가 된 니키는 소년 시절부터 ‘얼리 버드’(일찍 일어나는 새)였다. 항공사 사주인 그는 지금도 오전 5시에 잠자리에서 일어나 6시30분에 오스트리아의 빈 공항에 있는 그의 항공사 비행기에 올라 7시30분에 손수 조종간을 잡고 운항해 독일 프랑크푸르트나 뮌헨에 승객들을 내려준 뒤 10시에 귀환한다. 이후 11시부터 빈 공항에 있는 그의 사무실에 출근해 그날의 일들을 처리한다.
니키는 2005년 자신의 이름을 따서 세운 저가 항공사 ‘니키항공’ 소속 조종사 80명 가운데 한 명으로 손수 비행기를 몰고 있다. 회사의 CEO가 기장으로 조종간을 잡는 데 대해 그는 이렇게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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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6년 8월1일 독일 뉘르부르크 경기장에서 니키 라우다가 몰던 페라리 312T 레이싱카. 그는 이날 경기 도중 사고로 중화상을 입었다. |
“첫째는 한 사람 몫의 조종사 인건비를 절약할 수 있고, 둘째는 돈 안 들이고 나 자신을 모델로 한 브랜드 광고 효과를 낼 수 있기 때문이다.”
니키는 카레이서 시절인 1976년 8월 독일 뉘르부르크에서 열린 독일 그랑프리(GP) 경기 도중 차가 타이어 고장으로 충돌한 뒤 불이 붙어 이마, 얼굴, 머리, 손목에 1∼3도의 중화상을 입고 사망 선고를 받았다. 죽음을 앞두고 신부의 병자 성사까지 받은 그는 기적적으로 소생했고, 6주 만에 붕대로 머리를 감싼 채 다시 경기장에 복귀했다. 이는 스포츠 사상 ‘가장 용감한 컴백’으로 지금까지 회자되고 있다.
니키는 그때부터 일부 잘려나간 귀와 머리, 이마의 화상 흉터를 가리기 위해 붉은 색 야구 모자를 쓴다. 붉은 색 모자와 흉터는 그를 상징하는 브랜드가 됐다. 실용주의자인 니키는 화상 흉터마저 마케팅에 이용한다. 뻐드렁니 때문에 ‘왕쥐’(슈퍼 래트)라는 별명을 얻은 그는 뻐드렁니를 드러내는 미소도 광고 이미지로 사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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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니키 라우다가 1976년 경기 도중 발생한 사고로 중화상을 입은 지 6주 만에 경기에 참가해 팬들의 경탄과 환호를 받았다. 이는 ‘스포츠 사상 가장 용기 있는 컴백’으로 회자되고 있다. |
그는 선수 시절에 ‘컴퓨터’로 불릴 만큼 치밀하고 철저한 계산에 의해 행동했다. 니키는 9년 동안의 선수 시절에 월드챔피언십(WDC) 3번을 비롯해 25차례나 우승했고, 3위 이내에 들어 시상대에 오른 것은 54차례에 달한다. 그는 무수한 트로피를 받았지만 그의 표현에 의하면 ‘쓸모없는 트로피’를 인근 주유소에 갖고 가 휘발유, 세차 비용과 맞바꾸기도 했다. 그만큼 그는 겉치레보다는 내실을 다지는 데 철저했다.
니키는 1978년 일시 F1에서 은퇴한 후 이듬해에 ‘라우다 에어’라는 항공사를 설립하고 경영주로 진로를 바꿨다. 그러나 항공기 추락 사고 등으로 경영난을 겪고 난 뒤 1999년 회사 운영권을 오스트리아항공(AUA)에 넘기고 빚더미에서 벗어났다.
비행기 조종면허증을 지닌 그는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3년 후에 저가 항공사 니키항공을 설립했다. 니키항공은 현재 보유 항공기 9대에 승무원 150명을 포함해 전체 직원이 300명에 달하는 회사로 성장했다. 전세비행 전문인 니키항공은 중부·남부·동부 유럽 노선은 물론이고 남미, 말레이시아, 호주까지 운항하면서 연간 2억유로의 매출을 올리고 있다. 니키항공은 같은 저가 항공사인 에어베를린과 제휴해 노선을 확장하고 항공기도 20여대로 늘릴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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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니키 라우다가 자신이 설립한 저가항공사 니키항공의 여객기 앞에 서 있다. |
그는 항공기에 그레고리 펙 등 유명 배우와 가수들의 이름을 붙여놓고 영화 팬들을 승객으로 끌어들이는 마케팅 전략을 구사하기도 한다.
그는 2004년에는 초저가 렌터카 서비스 회사를 설립해 오스트리아와 독일의 렌터카 시장에 돌풍을 일으켰다. ‘라우다 모션’이라는 이름의 이 렌터카 회사는 ‘움직이는 광고판’ 아이디어를 살려 초저가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라우다모션의 모토는 ‘1스마트, 1일, 1유로’이다. 주차 면적이 작게 드는 소형차 ‘스마트’를 하루 1유로 가격에 빌려주되, 차를 빌린 도시 안에서만 하루 30㎞ 이상의 거리를 운행해야 하는 조건이 따라붙는다. 렌터카인 스마트 소형차에 부착된 광고가 효과를 발휘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광고주가 돈을 내기 때문에 광고주에게 이득이 최대한 돌아가도록 하기 위한 방안이다.
현재 빈, 잘츠부르크, 그라츠, 린츠, 클라겐푸르트, 인스브루크 등 오스트리아 6개 도시와 베를린, 프랑크푸르트, 뮌헨, 함부르크, 뒤셀도르프, 쾰른 등 독일 6개 도시 등 총 12개 도시에서 라우다모션의 스마트 광고 차량 총 550대를 운영하고 있다. 23세 이상인 사람에게만 차를 대여하고, 인터넷(www.laudamotion.com)에서만 예약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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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니키 라우다가 자신이 세운 저가 렌터카회사 라우다모션의 차량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그는 자신이 광고모델이 돼 회사를 홍보한다. |
라우다모션의 기발한 렌터카 서비스는 앞으로 유럽 전 지역으로 확산될 예정이다. ‘붉은 모자를 쓴 사나이’가 이 같은 참신한 아이디어로 하늘과 땅의 저가 서비스에 쇄신의 바람을 불어넣자 기존의 렌터카 업체들은 바짝 긴장하고 있다.
니키는 부유한 집안에 태어났지만 카 레이서가 되는 것을 부모가 극렬하게 반대하자 쫓겨나다시피 집을 나온 뒤 피눈물 나는 노력과 고생 끝에 마치, BRM, 페라리, 브래범, 매클래런 등 유명 카레이싱팀을 거치면서 레이싱 스타로 우뚝 서게 됐다.
1976년 사고로 사경을 넘나들던 그가 부상을 딛고 6주 만에 경기장에 나타나자 그의 강인한 의지와 집념에 팬들은 경악하고 열광했다. 그는 은퇴 후 다시 복귀, 두 차례 더 세계챔피언 자리에 오르면서 F1 역사에 길이 남을 영웅이 됐다. 당대 최고 수준의 기술과 속도를 겸비한 레이서라는 평가를 받았다.
철저한 실용주의자인 니키는 F1을 자신의 개인적인 비즈니스 무대로 만들었다는 비난도 들었다. 그러나 축구의 펠레와 프란츠 베켄파워, 테니스의 존 맥켄로와 보리스 베커, 권투의 무함마드 알리, 카레이싱의 미하엘 슈마허 등 전설적인 스포츠 스타들 가운데 스스로 사업을 시작해 직접 뛰면서 일하는 인물은 니키가 유일하다. 특유의 부지런함과 강인한 의지, 부단한 창의력, 용기, 치밀함이 그의 밑천이다.
프랑크푸르트=남정호 특파원 johnnam@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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