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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재연 장군의 생가인 초가. |
어재연(魚在淵)장군이 무공을 세운 신미양요는 1866년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가 대동강을 타고 평양부중에까지 들어와 통상을 요구하다가 격분한 민중들에 의해 불살라 진 것이 원인이 되었다. 당시 미국은 제너럴셔어먼호의 행방을 탐문하다가 사건의 윤곽을 알게된 미국의 브란트 대통령은 청국주재 미국공사 로우에게 제너럴셔어먼호사건에 대한 책임문책과 조선과의 통상체결의 임무를 명하였으며 이에 로우공사가 직접 아시아함대 사령관 로저스제독이 지휘하는 기함 콜로라도호와 군함 4척에 1천 1백 30명의 병력을 이끌고 1871년 4월 3일 남양 앞바다에 나타나 통상할 것을 요구하였다.
하지만 당시 조선은 대원군의 섭정기로 쇄국정책을 추진하던 시기였기에 통상 체결 요구에 대해 조선 정부로부터 아무런 답변이 없자 미국측에서는 소함정 4척을 보내 강화도 손돌목을 지나 광성진 앞으로 들어서다가 허가없이 들어서는 이들을 저지하려고 맹렬히 쏘아대는 조선군의 포격을 받고 퇴각했다.
이에 평화적인 교섭의 어려움을 알아챈 로저스 제독은 마침내 명령을 내려 1871년 4월 23일 615명의 병력을 몰래 초지포에 상륙시켜 기회를 엿보다가, 이튿날인 4월 24일 바다로부터 쏘아대는 함포사격의 지원을 받으며 일제히 어재연장군이 포진하고 있는 광성포대를 습격하니 쌍방 간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게 되었다.
이 전투에서 어재연 장군과 그의 동생 어재순이 끝까지 용감하게 싸우다 전사하였고, 광성별장 박치성은 어재연장군의 용감한 죽음을 보고 자결 순국하였으며, 천총 김현경, 초관 유풍노, 군관 이현학 등 수백여명의 조선군 장졸들이 침입자들을 맞아 분전하다 전사하였다.
한·미수교 130년 사에 있어 오직 한 번뿐인 이 전투는 그 후 미국 측이 부평부사 이기조에게 "외국사신을 배척함은 유감스러운 일이다"라 말하고 물러감으로서 막을 내렸지만, 당시의 집권자인 대원군의 서양오랑캐에 대한 적개심을 크게 불러일으켜 쇄국정치를 더욱 강화하는 결과를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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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재연 장군을 모신 사당. |
그 후 조선 정부는 목숨을 바쳐 조국을 지킨 어재연장군의 공적을 높이 평가하여 충장공이란 시호를 내리고 병조판서겸 지삼군부사라는 높은 벼슬을 주었다.
지금도 강화도에는 어재연 장군의 묘와 장군이 전사한 격전의 장소 광성진은 역사의 현장으로서 잘 보존되고 있다.
또한 경기도 이천시 율면 산성1리에 있는 장군이 태어난 생가 역시 이천시와 어장군의 후손들에 의해 보존되고 있으며, 지난 1973년에는 생가 언덕위에 장군의 넋을 기리는 사당을 지어 충장사로 이름을 지었고 최근 생가를 대폭 보수하고 그 앞에는 연못을 만들어 정비하였다.
한편 정부가 1871년 신미양요 때 미군에 빼앗긴 어재연 장군기‘수자기’(장수를 나타내는 ‘수(帥)’자가 쓰인 가로 세로 각각 4.5m의 이 대형 깃발)의 봔한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했고 현재 미국 메릴랜드주 애나폴리스 해군사관학교 박물관에 보관되어있는데 지난 2007년 10월 22일 136년 만에 임대형식으로 국내에 들여와 서울 종로구 사직동 국립고궁박물관에서 공개됐다.
김재연시민기자, 블로그 http://blog.segye.com/dach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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