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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궁옥분이 집에서 통기타를 잡고 즐거워하고 있다. 기타줄을 튕기는 그의 밝은 표정에서 일상의 행복이 느껴진다. |
“때로는 당신 생각에/잠 못 이룬 적도 있었지/기울어가는 둥근 달을 보며/타는 가슴 남 몰래 달랬지∼”
가수 남궁옥분의 ‘사랑 사랑 누가 말했나’ 시작 부분이다. 이 노래는 경쾌한 리듬에, 청순하고 맑은 목소리가 순수하면서도 웅장한 포크음악처럼 느껴져 1980년대 초 젊은이들에게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지금도 386세대 이상이면 누구나 다 아는 대표적인 애창곡이다.
데뷔 초창기 때 통기타를 메고 무대에 올라 관객들의 박수를 유도하며 신나게 노래하던 남궁옥분의 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TV에서 못본 지 꽤 오래됐는데, 그가 요즘 뭘하고 지낼까. 지난 16일 서울 마포의 한 호텔커피숍에서 그를 만났다. 매니저와 함께 검은색 트렌치코트 차림으로 나온 그는 브라운관을 통해 봐왔던 예전과 달라 보이지 않았다. 20년이 훨씬 지났는데도 여전히 밝은 모습이었고 바뀐 쇼트커트 헤어스타일만 눈에 띄었다.
그는 자리에 앉자마자 부채를 선물로 건넸다. “인사동에서 사다가 제가 생각나는 글귀를 직접 적어서 만나는 사람마다 드려요.” 부채를 펼쳐보니 “당신은 이 세상의 중심이며 주인공이십니다. 당신은…2007. 가을 남궁옥분”이란 시(詩)가 쓰여 있었다.
“소중히 간직하겠다”며 감사의 뜻을 전하고 그동안 어떻게 지냈느냐고 물었더니 그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요즘 너무 행복해요. 가수 남궁옥분으로 살아간다는 건 참으로 축복받은 일이에요. 그렇게 많은 시간이 흘렀어도 저를 기억해 주고 제 노래를 좋아한다며 함께 불러주는 팬들이 늘 곁에 있어서 감사할 뿐입니다.”
남궁옥분은 요즘 눈코뜰새없이 바쁘다. 지방자치단체와 기업체 등 전국 각지에서 출연해 달라는 요청이 많아졌다. 옆에 앉아 있던 매니저 김재균씨는 계속 걸려오는 휴대전화 벨소리에 신경이 쓰였던지 이내 자리를 피해 버린다.
“죄송해요. 인터뷰를 마치고 저녁식사 할 틈도 없어요. 미리 약속을 정해 놓은 사람을 잠깐 보고 바로 경기 용인시 수지로 가야 해요. 선배 가수가 라이브카페를 운영하는데 오라고 해서….”
작년까지만 해도 그는 금전적으로 많은 시련을 겪었다. 주위에서 누가 급하게 돈이 필요하다고 하면 남한테 꾸어서라도 빌려주는 성격 탓에 빚보증을 잘못 섰다가 큰 낭패를 봤다. 순진해서 1년에 한두 번씩 크고 작은 사기도 당했다.
“제가 아주 전형적인 A형이거든요. 운동 좋아하고 승부욕이 강해 남자다운 면도 있지만, 소심하고 꼿꼿한 성격에 마음 씀씀이는 영락없는 여자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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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궁옥분이 직접 시를 적어놓은 부채. |
그는 “정말 힘들고 어려울 때 혼자 극복하는 법을 터득했다”면서 “예전에는 남들 의중대로 살았는데 지금은 내 중심으로 바뀌었고 이젠 사람 대하는 것도 자신이 생겼다”고 강조했다. 그는 “올해 들어 고민거리가 모두 해결됐다”며 “최근까지 얽히고설킨 일들이 실꾸리처럼 풀려 홀가분해졌다”고 좋아했다.
그는 2년 전 마음을 비우기 위해 강원도 오대산에 있는 상원사로 무작정 들어간 적이 있다. 일주일간 템플스테이는 그에게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 그곳에서 세상에 자신이 왜 왔는지를 깨달았고, 10년간의 숙제가 풀리면서 인생의 전환점을 맞았다. 자신의 몸 안에 잠자고 있던 노래에 대한 열정도 생겨났고, 음악을 다시 해야겠다는 결심과 나이와 상관없이 음악에 미쳐 살겠다는 결론을 얻어냈다. 진정으로 박수를 보내는 최후의 한 사람을 위해서라도 즐거운 마음으로 무대를 지키겠노라고.
요즘 건강은 어떻게 유지하느냐고 묻자 그는 “예전엔 산을 바라보고만 있어도 그냥 좋았는데, 지금은 직접 등산을 하기 시작했다”며 “틈나는 대로 언니와 함께 청계산과 북한산으로 등산을 다닌다”고 답했다.
매일 아침 반포 한강둔치에서 달리기로 체력을 다지고 골프도 가끔씩 즐긴다. 1년에 한 번 정도는 언니와 함께 해외여행도 다녀온다. 골동품 구경을 하러 인사동에도 자주 나가고 뮤지컬과 오페라극장도 찾는다.
“내년 초에는 언니와 같이 앙코르와트에 가기로 이미 약속을 해놨어요. 저는 해외공연이 자주 있어서 괜찮은 편인데, 언니는 아이들 뒷바라지하느라 고생만 하니까 제가 위로해 주는 차원에서 함께 가는 거예요. 가까이 살면서 못했던 얘기 보따리도 여행 가서 다 풀어놓죠.”
집에 혼자 있을 땐 주로 책을 읽거나 초중등학교 친구들을 만나 옛날 얘기로 허전함을 달랜다. 지금까지 가깝게 지내는 동창생들만 해도 50여명에 달한다. 나이에 걸맞지 않게 인터넷 다루는 솜씨도 수준급. 예쁘게 단장해 놓은 홈페이지(www.okboon.com)에는 그가 살아온 인생역정이 한 권의 책처럼 소개돼 있다.
“제가 원래 통기타 가수였는데, 나중에 그냥 노래만 부르면서 이미지가 많이 왔다갔다했어요. 나만의 음악세계를 만들어 내지 못한 게 후배들에게 미안할 뿐입니다” 그는 조만간 자신의 색깔에 맞는 새 음반을 들고 방송무대에 다시 설 생각이다.
글 추영준, 사진 이종덕 기자 yjchoo@segye.com

남궁옥분은 누구?
가수 남궁옥분은 1958년 서울 양천구 목동에서 태어났다. 김포가도 인공폭포를 지나 왼편에 자리한 용왕산 중턱의 산동네가 그의 집이다. 대청마루가 넓은 한옥과 마당에 펼쳐진 꽃밭은 산을 오르내리는 사람들의 발길을 멈추게 할 정도로 커보였다.
2남2녀 중 맨 막내인 남궁옥분은 공무원이었던 아버지와 집안일만하는 어머니의 사랑을 독차지하며 유년기를 보냈다. 보통 아이들보다 키가 크고 남달리 달리기가 빨랐던 그는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육상선수로 뽑혀 운동을 시작했고 평소에는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다. 학창 시절 등에 떠밀려 성악 콩쿠르에 나갔고 교회에서 찬송가를 부르는 게 음악의 전부였다. 그가 나중에 유명 가수가 되리라곤 아무도 몰랐다.
남궁옥분은 1975년 포크동아리 ‘청개구리’와 쌍벽을 이뤘던 ‘참새를 태운 잠수함’에서 음악과 인연을 맺는다. 포크음악에 빠져 자신을 데리고 간 친구는 지금 화가가 됐고, 반대로 화가가 꿈이었던 남궁옥분은 가수의 삶을 살고 있다.
그는 포크동아리에서 강인원 등과 활동하다가 1977년 명동의 음악살롱 ‘쉘부르’ 노래경연대회를 거치며 본격적인 가수의 길을 걷는다. 당시 상금 3만원에 욕심이 생겨 출전했다는 그는 1등을 하고도 무대에 오르지 못한 설움을 겪어야만 했다. 쉘부르 주인이었던 이종환(현 라디오DJ)은 못생겼다며 자신을 무대에 세우지 않았다고 그는 전한다.
남궁옥분은 그때부터 이를 악물고 열심히 노래와 기타 연습에만 매달렸다. 혼자 연주법을 터득하는 속도도 빨랐다. 그 결과 첫 무대 반응은 뜨거웠다. 포크 2세대로 불리는 전영의 ‘어디쯤 가고 있을까’가 한창 뜨고 있을 때 목소리와 창법이 비슷해 모창으로도 많은 인기를 얻었다. 양희은과 이연실 노래도 무대에서 즐겨 불렀다.
그는 쉘부르에서 활동하며 3장의 앨범을 냈고 송창식 김세화 등이 소속된 오리엔트 프로덕션의 나현구 사장에게 발탁돼 1981년 발표한 ‘사랑 사랑 누가 말했나’로 일약 스타덤에 오른다. 이 곡은 처음에 통기타 포크가수가 부르기에는 너무 요란스럽게 느껴져 별로 마음에 와닿지 않았다고 하나, 듣는 대중의 반응은 의외로 폭발적이었다. 이 노래는 에어로빅 음악과 응원가 등으로 불리며 젊은 세대들에게 참신한 곡으로 받아들여졌다. 당시 음반에 수록된 ‘에헤라 친구야’란 곡도 대단한 인기를 얻었다.
그는 이어 ‘꿈을 먹는 젊은이’ (82년), ‘나의 사랑 그대 곁으로’(83), ‘설악산’(84) 등을 발표하며 최고의 전성시대를 맞는다. 그러던 중 방송 토크쇼에 자주 패널로 나갔다가 팬들로부터 “가수가 노래는 안 하고 말만 많이 한다”는 지적을 받으면서 슬럼프에 빠진다. 스스로 인기관리를 소홀히 한 결과였다고 인정하고 2년간 볼링과 윈드서핑 등으로 공백기를 극복했다.
그는 1987년 신곡 ‘재회’로 재기에 성공하며 꾸준한 활동을 보이다가 IMF가 터지면서 1997년 무대를 미사리 카페촌으로 옮겼다. 혼자 사회를 보고 노래하며 손님들과 대화하는 남궁옥분의 독무대는 미사리 일대에서 최고의 공연으로 꼽혔다.
지금은 7080 복고바람에 힘입어 방송 출연과 지방 행사 등으로 활발한 활동을 보이고 있다. 부모님과 오빠들은 이미 세상을 떠났고, 하나 남은 혈육인 언니와 반포아파트 같은 동에서 살고 있다.
추영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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