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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수지에서 건진 치타'', 강자들 틈새에서 약자 스스로 선택하는 굴종

입력 : 2007-10-26 15:31:00 수정 : 2007-10-26 15:3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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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해훈 감독이 연출한 ‘저수지에서 건진 치타’는 재작년 윤종빈 감독의 ‘용서받지 못한 자’처럼 올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가장 많은 입소문을 타며 화제가 된 보석 같은 영화다. 강자들의 틈새에서 생존하는 약자의 심리와 습성, 생태를 제대로 그려낸 수작이다.

악인(강자)과 약인. 여기서 약인은 타고난 성격으로, 순둥이 아니면 거의 바보 수준이다. 강자와 함께 기거하는 닳아빠진 여자와 약자를 위로하는 보통 여자, 그리고 약인을 구하고 악인을 평정한 뒤 정의사회를 실현해 줄 ‘집행자’격의 인물이 등장한다.
국내에서 중고등학교를 나온 사람이라면 누구나 느꼈을 만한 분위기를 소재로 삼은 덕에 관객의 공감을 쉽게 얻어내는 것은 이 영화가 갖는 장점이다. ‘치타’는 ‘밀림의 왕’ 타잔을 따라다니는 침팬지 원숭이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한 학급 안에는 깡과 허세(행패)를 부리며 헤게모니를 주도하는 인물이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이들에게 복종하며 ‘쫄따구’를 자청하고 나서거나 아니면 재수없게 걸려들어 시달림을 당하는 ‘먹잇감’들이 있고, 이를 지켜보면서 ‘나는 걸리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하루하루 살아가는 대다수 약자들이 있다. 여기에 우수한 성적에 힘입어 이 같은 먹이사슬 구조의 사냥터와는 무관한 삶을 영위하는 몇몇 모범생들이 한 학급의 구성원을 이룬다.

영화는 우선 강자(악인)와 약자의 관계를 잘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약자의 생태와 본성을 보다 극명하게 그려내기 위한 장치에 해당한다. 인간 사회든 동물 세계든 강자는 쉽게 드러나 보인다. 이 영화가 지닌 매력은 잘 드러나 보이지 않는 약자에 대한 관찰이 실로 뛰어나다는 점이다.
불합리한 강·약 구조를 깨뜨리고 새 질서를 제시하면서 자신을 구제해 주는 ‘심판자’의 ‘집행’을 오히려 막고 나서는 것은 늘 약자들이다. ‘그놈의 타고난 약한 마음’ 탓에 스스로 복종을 선택하면서 이전의 강·약 구조 상황으로 사태를 돌이키고 마는 것이다. 약자는 자신의 운명과 죽음까지도 강자의 선택에 맡긴다. 약자가 가끔 도모하는 일은 ‘우발적’ 사고일 뿐 결코 ‘혁명적’ 행동일 수는 없다. 결국 약자가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은 없다는 얘기다.
사람보다 애완견을 소중히 여기는 대목은 우리 사회의 인권에 대한 값싼 정서를 꼬집는 조롱이다. 학대나 따돌림 등 괴롭힘 당하는 사람(약자 치타)에 대한 인정은 없고 ‘개새끼’를 더욱 소중히 여기는 온정은 있다. 약인이 하수구에 빠진 애완견을 찾아 건져올리는 시간에 악인(강자)이 약인 ‘치타’의 애인을 겁탈하는 시간적 배치는 이의 간명한 비교를 위한 감독의 계산된 배려다.
올해 29살 감독의 첫 장편이란 점도 놀랍다. ‘단편영화계의 박찬욱’이란 별칭답게 그의 영화는 탄탄하면서도 탄력적이다. 충무로와 평단은 천재 감독의 출현을 몹시 반기는 눈치다. 얼굴이 알려진 연기자가 없음에도 관객들이 재미를 느끼면서 쉽게 몰입해 볼 수 있는 작품이다. 신인들이지만 이들의 연기에는 어색함이 없다. ‘오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영화가 설득력을 갖는 가장 큰 이유다. 약인을 맡은 임지규도 뛰어났지만 악인(강자)을 연기한 표상우의 표정과 대사들은 보는 이의 몸을 타고 스멀스멀 기어오르듯 실제처럼 느껴진다.
김신성 기자
sskim65@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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