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 대관이구나. 지금 어딨니? 행사로 지방에 내려가 있다고? 내일도 바쁘냐. 그럼 어쩔 수 없네. 다음에 얼굴 한번 보자.”
지난 5일 오후 서울 송파구 오금동에 있는 예음음악신학교에서 가수 출신의 이 학교 총장 겸 목사 윤항기를 만났다. 환갑을 넘긴 나이에도 무척 정정해 보였고 목소리는 쩌렁쩌렁했다. 기름칠한 올백 머리에 금테 안경을 쓰고 검은 바지, 검은 남방을 입은 모습은 예전에 인식됐던 인기 연예인이 아닌 성직자의 근엄함이 느껴졌다.
총장실에서 인터뷰하기 위해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자리에 앉으려는데 그에게 휴대전화가 걸려왔다. 그는 부드러운 말투로 “미안합니다. 잠깐 전화 좀 받겠습니다”라고 양해를 구한 뒤 통화를 시작했다. 전화를 끊은 뒤 짐작 가는 게 있어서 “방금 걸려온 전화가 가수 송대관씨 아니냐”고 물었더니 그는 “후배 대관이가 맞다”고 알려줬다.
“사실은 내일 막내인 아들 결혼식이 있거든요. 어떻게 알고 연락이 왔는데 일 때문에 바빠서 도저히 직접 오진 못하고 대신 와이프가 가니까 서운해 하지 말라고 하네요. 허허허. 바쁘긴 나도 마찬가지요. 아직 결혼식에 입고 갈 양복도 못 샀거든요. 아내 성화가 대단해요. 지금 당장 집에 들어오라고.”
얼마나 바쁘기에 아들 결혼식 전날 인터뷰 약속을 할 수 있을까 속으로 의아해 했으나, 벽에 걸려 있는 그의 일정표를 본 순간 ‘그럴 수밖에 없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화이트 보드에는 10월 한 달간 전국의 교회 강연과 설교 초청 스케줄이 빽빽히 적혀 있었고, 사적인 경사로 여겼는지 정작 아들 결혼식 날짜인 6일에만 아무런 표시 없이 비어 있었다.
“매일 이렇게 살아요. 교회 담임을 맡으랴 학생들 가르치랴 정신이 없네요. 전국에 있는 교회에서 와달라고 요청해 쫓아다니다 보면 1년이 어찌나 빠르게 지나가는지 뒤돌아볼 시간적 여유가 없어요. 그나마 이달에는 해외 집회 초청 스케줄을 모두 뺐는데도(화이트 보드를 가리키며) 저 정도니, 허허허.”
그의 일상은 1970, 80년대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연예인 시절보다 훨씬 바쁘다. 최근 대한예수교장로회 개혁총연 총회장 1년 임기를 마치고 증경총회장 자리에 오른 그는 “지난 한 해는 교단 총회 일까지 보느라 더 정신없이 보냈다”고 전했다.
“가수로 활동할 땐 인기와 돈을 벌었지만, 지금은 돈도 안 버는데 더 행복하고 활기가 넘쳐납니다.”
그는 “가수로서 인기를 연장하려고 집념한다든가, 목회자가 돼서도 재산을 모은다든가 이런게 필요없으니까 현실에 만족하게 되고 매일 좋은 얘기만 하고 사는 게 건강비결”이라고 말했다. 평상시에 잘 먹고 잠도 잘 자고 항상 긍정적인 사고로 살면서 건강을 유지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골프는 3년 전부터 다시 시작해 쉬는 날인 월요일에 목회자골프동호회에 나가고 가끔 연예계 선후배, 그리고 아내와 함께 운동을 즐긴다고.
목사로 변신해 제2의 인생을 사는 그에게 국민애창곡 ‘여러분’의 탄생 배경에 대해서도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1970년대 말에는 가요제 붐이 일었어요. 윤시내, 박경애, 박경희 등 가요제를 통해 데뷔한 가수들이 많았죠. 우리 남매는 1979년 서울국제가요제에 나가 제가 지휘하고 동생 복희가 ‘여러분’을 불렀는데 대상을 받은 거예요. 그때 복희가 너무 기쁘고 감격해서 눈물을 펑펑 흘리며 울던 기억이 나네요.”
당시 동생이 가정적으로 아픔이 있었고, 오빠로서 위로하는 마음으로 성경에 있는 이사야 41장 10절 말씀을 가지고 기도하는 도중에 하나님께서 영감을 내려줘 ‘여러분’이라는 대곡을 만들게 됐다고.
“니가 만약 외로울 때면 내가 위로해 줄께/ 니가 만약 서러울 때면 내가 눈물이 되리/ 어두운 밤 험한 길을 걸을 때 내가 내가 내가 너의 등불이 되리/ 허전하고 쓸쓸할 때 내가 너의 벗 되리라∼”
그는 “가사에 나오는 ‘내가’라는 일인칭은 모두 하나님을 가리키는 말”이라며 “1절 한국어로 노래할 땐 종교적인 느낌을 배제했고, 2절을 영어로 부를 때 ‘갓(God)’이라 표기했는데 마침 외국인 심사위원들이 복음성가 같은 느낌을 받았는지 전원 만점을 줘 그랑프리의 영광을 안았다”고 설명했다.
요즘도 TV방송 열린음악회에 가끔 출연하는 그는 분당에서 신학교로 출퇴근하고 있으며, 동생 복희는 같은 동네에 살고 있지만 뮤지컬에 빠져 있어 못 본 지가 오래됐다고.
글 추영준, 사진 송원영 기자 yjchoo@segye.com
>>'장밋빛 스카프'의 주인공 윤항기는
윤항기(64)는 서울토박이로, 대중예술가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윤부길씨는 한국 최초의 유랑 악극단을 만들어 단장으로 활동했고, 어머니 고향선씨는 무용수였다. 윤항기는 어려서 악극단을 이끌고 전국 방방곡곡에서 공연하는 부모를 따라다니느라 어느 한 곳에 정착해 살지 못했다. 동대문초등학교 3학년 때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3년 후에는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나 세살 터울인 여동생 윤복희와 함께 고아 남매로 불우하게 자랐다. 일찍 부모를 잃은 남매는 기거할 집도 없이 이곳저곳 떠돌다 거지깡통도 차보고 고아원과 남의 집 머슴 신세를 지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는 스무 살 되던 해인 1963년, 그룹사운드 ‘키보이스’에서 드럼 연주자로 음악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가수 차중락과 김홍탁(현 서울재즈아카데미음악학원장) 등 5명의 멤버로 결성된 이 밴드는 당시 미8군 클럽 등에서 활동하던 밴드와 달리 TV방송 전파를 탄 국내 최초의 그룹으로 가요사에 기록되고 있다. 이듬해 키보이스는 ‘정든 배’라는 자작곡으로 첫 음반을 발표하고 정식 데뷔했으며, 국내 처음으로 ‘오빠부대’를 거느릴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윤항기는 1973년 팀에서 나와 ‘윤항기와 키브라더스’라는 밴드를 새로 결성해 리드싱어로 활동했으며 당시 불렀던 ‘무지개 빛’이란 노래를 히트시켰다. 이듬해에는 직접 작사·작곡한 ‘나는 어떡하라구’로 솔로가수 데뷔에 성공하면서 싱어송라이터로서 실력을 인정받기 시작했다. 이 외에도 ‘별이 빛나는 밤에’ ‘이거야 정말’ ‘노래하는 곳에’ ‘장밋빛 스카프’ ‘다 그런거지’ ‘나는 행복합니다’ ‘친구야’ 등 다수의 히트곡을 냈다.
그는 1979년 열린 서울국제가요제에 직접 작사·작곡한 ‘여러분’이란 곡을 들고 나와 교향악단을 지휘하고 동생 윤복희가 노래를 불러 대상을 수상했다. 이듬해 ‘하와이 세계음악제’에서도 ‘나는 당신을’이란 참가곡으로 대상을 받았다. 당시 윤항기·윤복희 남매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다.
윤항기는 1986년 ‘아시안게임’에 맞춰 직접 만든 ‘웰컴 투 코리아’란 노래를 끝으로 가요계를 떠났다. 마음먹기가 쉽지 않았지만, 최정상의 인기와 명성을 하루아침에 내팽개치고 이듬해 서울찬양신학교에 들어갔다. 당시 교회음악을 가르치는 유일한 학교였으며, 처음에는 정통 클래식을 배우려고 입학했다가 나중에 목사가 됐다. 변신의 결정적 이유는 1976년 폐결핵으로 1년 이상 살 수 없다는 사망선고를 받은 후 가족의 기도 덕분에 기적적으로 완치됐다고 생각하는 강한 믿음 때문이었다.
그때부터 하나님을 위해 살겠다고 결심했고, 실천에 옮겼다. 그는 1989년 미국으로 건너가 일리노이주 세인트루이스 소재 미드웨스트 신학대에 입학해 목사 안수를 받았고 교회음악으로 박사학위까지 취득했다. 현재 4개과에 학생정원이 150명 정도 되는 예음음악신학교 총장과 교내 예배당 담임목사를 겸하고 있다. 부인 정경신(60)씨와 1남4녀를 뒀다. 딸은 모두 출가했고 막내인 아들(33)도 최근 결혼했다.
추영준 기자 yjchoo@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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