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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종호 추억 속 내 영화]롤랑 조페 감독의 ''주홍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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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7-09-29 19:33:00 수정 : 2007-09-29 19:3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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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산업 분야에서 미국의 특산품은 말할 것도 없이 서부영화다. 소재나 배경이나 인물설정에서나 미국 냄새가 물씬 풍기는 대중 소비용 오락물이다. 1926년에서 1967년에 이르는 40년간 할리우드 영화의 4분의 1가량이 서부영화라는 통계가 있다.
서부영화의 전성기는 1950년대로 800편이 넘게 제작됐다. 그 후 관객을 잃어가면서 “서부영화는 죽었다”란 말이 퍼지게 된다. 1990년대 들어서서도 이따금 괜찮은 서부영화가 나오긴 하지만 옛날의 태평성대 복원을 기대하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왜 이렇게 서부가 몰락하게 된 것일까? 소재가 탕진되었다는 국면도 있고 범죄수사 영화를 비롯한 타 분야의 전투적 진출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그런 가운데 베트남 전쟁을 소재로 한 영화가 서부의 영역을 병합해 버렸다는 관점도 있다. 이번에 ‘주홍글씨’를 보면서 서부영화의 부분적 흡수가 정통 서부영화의 쇠퇴와 연관된다는 생각을 확인하게 되었다.
이 영화 크레디트 타이틀에는 너새니엘 호손의 ‘주홍글씨’를 자유롭게 각색했다는 말이 나온다. 주인공인 헤스터 프린, 그녀의 동반자 죄인인 목사 아서 딤즈데일, 그들의 소생인 펄, 그리고 헤스터의 본 남편인 로저 칠링워스란 인물 및 정황 설정은 소설을 따르고 있지만 세목에서는 자유로운 가감승제가 두드러진다. 주요 작중인물 네 사람과 간통 및 그 뒷얘기라는 점을 빼고는 모두 각색이라 생각하면 된다.
17세기 미국 청교도 사이에서의 엄격한 도덕률과 마녀 사냥은 아서 밀러의 연극 ‘시련’에도 나온다. 그런 마녀의 모티프와 서부극의 요소를 합성하여 재미있게 만들려고 한 의도가 쉬 간파된다.

성격상 ‘주홍글씨’는 원작에 충실하려 할 때 영화 제작이 거의 불가능한 그런 작품이다. 미국의 비평가 라이어넬 트릴링은 호손과 카프카의 유사성에 주목하기를 촉구한 바 있다. 두 사람 모두 독자층과 괴리되어 있었고 개인적으로는 심약하고 부드러운 성품이면서도 작가로서는 까다롭고 고집불통이었다고 지적하고 있다. “생소한 세계에서의 인간의 캄캄한 편력”이라는 인생관으로 두 사람의 고정관념을 설명하는 게 아주 적절하다는 점도 지적한다. 카프카 소설의 영화화가 가능할까 하는 것을 생각해 본다면 ‘주홍글씨’가 원작에 충실할 수 없다는 것도 자명해진다.
영화는 난데없이 인디안 부족 추장의 장례로 시작한다. 화자 펄이 자기 부모의 삶의 역정을 들려주는 형식으로 영화는 진행되는데 장소는 매사추세츠주이고 때는 1666년이다. 젊고 발랄한 헤스터 프린이 공포와 박해가 없는 삶을 꿈꾸며 영국을 떠난 지 3개월 만에 미국에 도착한다. 그녀는 여성 혼자 살면 안 된다는 지역공동체의 규범을 어기고 혼자서 산다. 뒤따라 올 남편의 부탁에 따라 미리 집을 마련해야 한다는 이유였지만 이때부터 완고한 청교도들의 눈밖에 나게 된다.


안식일에 교회로 가던 헤스터는 마차가 진흙탕에 빠지는 바람에 어떤 남자의 말을 빌려 타고 교회에 가게 된다. 그 남자는 교회 목사였고 달변과 격정적인 설교에 헤스터는 강한 인상을 받게 된다. 주변 인디언족과 가까운 사이이고 열성적인 독서가인 목사도 교육받고 진취적인 생각을 가진 헤스터에게 끌린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사랑의 감정은 억제한다. 그러다 인디안족의 습격으로 배에 타고 있던 백인이 모두 살해되고 헤스터의 남편 유품이 목사의 손에 들어오게 된다. 헤스터와 목사는 이제 자기 제어의 구실을 잃어버리게 된 셈이다. 두 사람은 격정에 몸을 맡기게 된다.
공동체의 주류에서 동떨어져 사는 일단의 여성들이 있고 이들 가운데는 마녀의 혐의를 받는 여성도 있다. 헤스터는 이들과도 잘 어울리는데 그런 것이 주류에게는 눈엣가시다. 그녀의 발언이 빌미가 되어 이단으로 고소당해 심문을 받는다. 구역질을 한다는 소문에 대한 추궁이 있어 헤스터는 임신 사실을 시인한다. 아버지를 대라는 추궁을 거부하여 체포되고 5개월 동안 구금된다. 그 사이 양심에 가책을 받는 목사는 사실대로 실토하라고 권고하지만 헤스터는 그러면 모두 파멸이라며 거부한다.


딸아이를 출산한 후 교수대에 올라 심문을 받지만 헤스터는 끝내 아버지 이름을 대지 않는다. 그 결과 간통을 뜻하는 주홍글씨 ‘A’를 가슴에 차고 다니게 된다. 뿐만 아니라 북 치는 아이가 딸려 가는 곳 마다 헤스터를 따라와 북을 쳐댄다. 마녀로 고소되어 다른 여성과 함께 교수형에 처해질 순간 목사의 친구인 인디언의 협조로 원주민 부족이 달려와 총독을 살해하여 구출된다. 마지막엔 헤스터와 목사가 캐롤라이나로 가서 살다가 목사가 먼저 세상을 뜨는 것으로 얘기는 끝난다. 원작과 전혀 다르게 지순한 사랑이 승리하는 멜로드라마가 된 것이다.
원작에서나 영화에서나 헤스터의 전남편이 악역을 맡고 있다. 영화에서는 붉은 새가 에로스 충동 혹은 내면의 격정을 상징하면서 효과적으로 활용되어 있다. 데미 무어가 야무지고 아름답고 정열적이고 총명한 헤스터 역을 잘해내는 것이 영화의 강점이다. 그러나 죄의식의 내면극과 복수의 집념을 심도 있게 다룬 원작의 훼손이 워낙 심해서 께름칙하다. 멀쩡한 사람을 마녀로 몰아 처형하는 행태는 300년 전의 과거지사로 끝난 것은 아니다. 집단적 광기는 오늘도 여러 가지 형태로 서로 다른 명분 아래 세계 도처에서 피를 부르고 있다.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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