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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종호 추억속 내 영화]<59〉잉마르 베리만 감독의 ''처녀의 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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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7-08-04 12:18:00 수정 : 2007-08-04 12: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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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판 ‘복수는 나의 것’“신이여 그때 당신은 어디 계셨습니까…” 지난달 30일 작고한 잉마르 베리만은 20세기 최고의 영화감독 중 한 사람이다. 형이상학적 주제와 인간 내면의 탐색이라는 면에서 독보적인 존재다. 외국 체류 때 ‘수치’ 등을 본 적이 있다. 특히 ‘수치’는 베트남에서 승려 분신자살 장면이 나오는가 하면 사랑도 예술도 불가능한 사회에서 인간의 타락상을 극단적으로 보여주어 충격이었다. 최근 DVD를 통해 ‘가을 소나타’를 보았는데, 모성과 여성 심리 천착이라는 베리만 특유의 주제의식이 엿보이나 조금은 단조한 편이다. 그래서 옛날 시사 주간지 ‘타임’ 영화란을 통해 처음 알게 되었던 ‘처녀의 샘’을 얘기해 보고 싶다.
1960년에 제작된 ‘처녀의 샘’은 시대 배경이 중세지만 13세기의 스웨덴 담시(譚詩)를 밑그림으로 하고 있다. 농장주인 집에서 잉그리가 불을 지피는 장면으로 영화는 시작된다. 주인집에서 사생아를 거두어들여 수양딸 겸 하녀로 잉그리를 부리고 있다. 어쩐지 야만인 같은 모습의 잉그리는 오딘 신에게 기도를 드리는데, ‘어서 오십시오, 도와주세요’ 하는 것이 기도 내용이다. 잉그리의 이교 성향은 ‘악의 유혹에서 우리를 구하시고 굴욕과 위협으로부터 저희를 지켜주소서’라고 기도하는 주인의 기독교와 대비된다.

주인 내외와 집안의 일꾼들이 식탁에 함께 앉아 식사를 하지만, 잉그리는 뒤쪽에 앉아 여주인 마레타가 주는 것을 받아먹는다. 딸 카린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주인은 성당에 초를 가져가야 할 테니 깨우라고 채근한다. 마레타가 몸이 성치 않은 모양이라고 하자 딸을 너무 감싼다며 엄격히 길러야 한다고 나무란다. 마레타는 딸의 방으로 가서 몸이 성치 않으면 안 가도 좋다고 말하지만 딸은 그런 것은 아니라고 대답한다. 노란 슈미즈와 주일용 가운과 파랑 망토를 입게 하면 성당에 가겠다고 말한다.
마레타는 딸이 원하는 대로 입게 하고 머리를 빗겨 준다. 그리고 빵을 준비하게 한다. 잉그리는 주방에서 발견한 두꺼비를 산 채로 빵 속에 집어넣는다. 카린이 잉그리와 함께 가겠다고 해서 두 사람은 각각 말을 타고 성당을 향해 떠난다.
그들은 농경지를 지나 산길로 들어선다. 자기를 임신시킨 사내와 춤춘 것을 두고 카린에게 잉그리가 억지를 부린다. 카린은 청하는 사람 모두와 춤을 추었다며 잉그리의 뺨을 때린다. 그다음부터 전개되는 상황은 단순하고 명쾌하다. 호화롭게 단장한 카린을 본 숲 속의 도둑 세 사람이 다가선다. 키다리 반벙어리, 보통 사내, 꼬마 등 세 사람은 형제임을 자처하는 염소지기 행색이지만, 사실은 도둑이다. 두 사내는 카린을 성폭행하고 죽인 다음 모조리 옷을 벗겨 챙긴다. 구경하던 꼬마는 카린의 시체로 다가가 몇 줌의 흙을 덮어준다. 그 사이 잉그리는 숨어서 자초지종을 목격하는데 애초엔 돌을 집어들었지만 슬며시 놓아버린다.

밤이 되자 농장주인 집에 세 도둑이 나타난다. 일자리를 구해 남쪽으로 간다며 주인에게 추위를 호소한다. 주인은 저녁을 대접하는데 식사 때의 기도가 카린의 그것과 같음을 알아차린 꼬마는 낮에 있었던 죽음이 생각나 구역질을 한다. 주인집에서 유하게 된 도둑은 죽은 여동생의 옷을 사달라고 마레타에게 말한다. 카린의 옷인 데다 피가 묻어 있어 사태를 짐작한 주인은 잉그리를 추궁해서 딸의 죽음을 알게 된다. 주인은 세 도둑을 모조리 살해한다. 그리고 딸의 시체를 찾으러 간 주인은 신에게 기도를 드리는데, 딸이 누워 있던 자리에서 샘물이 흐르는 것으로 영화는 끝난다.
참혹하기 짝이 없는 자초지종인데, 주인의 복수 행위도 도둑들의 소행과 진배없이 잔혹하다. 그것은 무고한 꼬마마저 태기를 쳐 살해하는 장면에 잘 드러난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말이 실감난다. 살해 전에 나무를 쓰러뜨려 가지를 쳐낸 후 나뭇가지로 몸을 치며 목욕하고 나서 복수 행위로 나서는 것에서 보복이 의식화되어 있음을 느끼게 된다.
카린에 대한 잉그리의 적의와 질투도 끔찍하다. 카린의 빵에 두꺼비를 집어넣는 것에도 드러나지만 성폭행과 살해 장면을 보면서도 돌을 슬그머니 내려놓는 장면에서도 잘 드러난다. 두꺼비는 그쪽에서 악과 성의 상징이었다.
카린의 죽음을 두고 소원성취했다고 생각하는 잉그리는 오딘 신에게 기도를 드린 것이 주효했다고 생각한다. 한편 마레타는 신보다도 딸을 더 사랑했고, 자기보다 아버지를 따르는 것에 질투를 느끼는 자기를 징벌하기 위해 딸이 죽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딸의 피살 장면에서 딸의 죽음을 허락한 신을 도저히 이해 못하지만 회개하겠다고 아버지는 외친다. 다른 방도가 없다며 딸의 주검을 두고 ‘석고와 돌로 된 교회를 이 손으로 세우겠다’고 맹세한다.
새로 생긴 샘에서 솟아나는 샘물로 마레타는 죽은 딸의 얼굴을 씻어준다. 잉그리도 제 얼굴을 씻는데 죄의 사면을 위한 것이겠지만, 우리가 느끼는 것은 인간의 한없는 잔학성이다. 중세의 궁핍한 생활조건은 이 잔학성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인간에 대한 환상이 없는 이 느린 템포의 영화는 삶의 가혹성을 전율적으로 보여준다.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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