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관 부서마다 영어이름 짓기 유행
한글단체 "이해 안가"...소송준비도 서울 노원구에서 식당을 운영하는 A씨는 최근 구청으로부터 황당한 말을 들었다. 국제외국인학교 주변 업소는 모두 간판에 영어를 함께 표기하라는 것이었다. A씨는 “8년 동안 우리 식당에는 외국인이 들어온 적이 한 번도 없고 앞으로도 외국인이 찾을 만한 곳이 아닌데도 억지로 영어 간판을 달라고 한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최근 공공기관의 영어 사용이 도를 넘고 있다는 지적이 일고 있다. 기관 홍보물에 영어를 사용하는 수준을 넘어, 시민에게 영어를 강제로 사용하게 하거나 기관이나 부서 이름을 별다른 설명도 없이 영어로 바꾸는 사례가 속출하고 있다.
노원구청은 이달부터 관내 국제외국인학교와 지하철 노원역 주변 상가 간판에 한글과 외국어를 함께 표기토록 하는 ‘외국어 표기 병행 의무화 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서울 마포구청도 최근 관내 20개 동을 4개 권역으로 구분해 동사무소를 없애고 구와 동의 중간 성격인 ‘타운(town)’을 만들겠다고 발표했다.
이들 지자체뿐 아니라 공공기관에서도 특별한 이유 없이 기관이나 부서 이름 등을 영어로 바꾸는 일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지난 7일 한국철도공사는 그동안 ‘한국철도공사’와 ‘코레일’(KORAIL)로 함께 써오던 법인 명칭을 코레일로 일원화했다. 계열사 이름도 코레일유통(전 한국철도유통), 코레일트랙(전 한국철도시설산업) 등으로 모두 바꿨다.
경찰청은 최근 경찰서에 신종 절도나 조직적·국제적 절도범죄를 수사하는 전담부서로 TSI(Thief Special Investigation·절도특별수사)팀을 신설했다. 한국수자원공사는 지난해부터 K-water(케이워터)로, 농수산물유통공사는 2005년부터 aT(에이티)로 부르고 있다.
이 밖에 서울시도시개발공사와 서울시지하철공사는 각각 SH공사, 서울메트로로 이름을 바꿔 쓰고 있다. 지방의 행정기관들도 해피(happy) 수원, 드림베이(dream bay) 마산, 플라이(fly) 인천 등 영문 글자를 지자체 이름에 붙여 쓰고 있다.
이들 기관은 영어 명칭 변경에 대해 한결같이 “영어 이름이 국제화 시대에 맞춰 세계무대에서 경쟁력과 이미지를 높이는 데 도움을 준다”고 강조한다. 하지만 철도공사나 수자원공사, 경찰 등은 주로 내국인을 상대로 한 공공기관인데 굳이 예산을 낭비하면서까지 영어 명칭을 사용할 필요가 있느냐는 지적이 제기된다.
서울의 한 경찰서 TSI팀장도 “강력팀에서 이름만 영어로 바뀌었을 뿐 하는 일은 예전과 달라진 게 없다”며 명칭 변경을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한글 관련 단체에서는 노원구청을 상대로 행정소송을 준비하는 한편 공기업의 사명 변경 실태를 점검해 종합적인 문제 제기를 할 방침이다.
한글문화연대 김영석 운영위원은 “최근 몇 년 사이에 공공기관에서 마치 영어 이름을 쓰지 않으면 시대에 뒤떨어지기나 하는 것처럼 앞다퉈 영어 이름으로 바꾸고 있다”며 “내용을 고민하지도 않은 상태에서 이름만 바꿔 세대 간 언어단절 등 사회 문제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백소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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