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구선생 피습 장소와 임정 청사 중국 내 항일운동 유적지 답사에 나선 취재팀을 처음 맞은 것은 짙은 안개였다. 지난달 2일 인천공항에서 비행기로 3시간을 날아가 중국 후난(湖南)성 창사(長沙)공항에 닿았다. 창사는 ‘모래의 바다’라기 보다 ‘안개의 바다’였다. 도시를 뒤덮은 안개 속으로 빗발이 뿌려지고 있었다. ‘1938년 백범도 짙은 안개를 뚫고 창사에 왔을까?’ 69년전 조국의 독립을 기약하기에는 너무도 불리한 국제정세 속에서 중국 남부 각지를 떠돌아야 했던 독립운동가들의 행로는 마치 안개가 낀 것처럼 막막했으리라는 생각에 마음이 숙연해졌다.
백범 김구 선생이 조선혁명당 본부에서 회의 도중 권총 테러를 당한 난무팅(楠木廳) 건물부터 찾았다. 현지인들과 택시기사는 “난무팅을 아느냐”는 질문에 모두 모른다고 했다. 하늘에서는 10여m 앞도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어지럽게 진눈깨비가 내려 위치 추적에 난항이 거듭됐다.
1932년 윤봉길 의사의 훙커우(虹口) 공원 의거 이후 상하이(上海)를 떠났던 임시정부가 항저우(杭州)와 전장(鎭江)을 거쳐 비옥한 곡창지대인 창사에 도착한 뒤 “우리 대식구들의 끼니 걱정을 덜 수 있게 됐다”는 백범의 말이 귓전에 맴돌았지만 독립운동가들의 자취는 쉽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수소문 끝에 난무팅 위치를 알고 있다는 한국 대기업 협력업체 현지 주재원 구자운씨를 만날 수 있었다. 그의 도움으로 다음날 답사에 나섰다. 창사 시내 번화가 뒤편 골목으로 들어서자 시골 장터 같은 작은 가게들이 즐비한 지저분하고 좁은 길이 이어졌다. 길을 따라 지은 지 20년이 지난 낡은 저층아파트가 양편으로 늘어선 골목 막다른 곳에 다다르자 오래된 2층 목조 건물이 나타났다. 취재팀이 그토록 찾던 난무팅 건물이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1800년대 청나라 고관대작의 대저택이었다는 난무팅 주변은 모두 재건축으로 인해 허물어졌고 조선혁명당 본부였던 난무팅 6호만은 1900년대 초반 건축 양식 그대로 남아 있었다.
창사 난무팅 6호 건물 외벽 |
1938년 중국 국민당 정부가 일본군의 진입 직전 초토화 작전을 위해 중요 건물과 문서 보관서에 불을 지른 와중에도 인근 높은 성벽으로 인해 건재했던 난무팅이 아직 남아 있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1938년 장개석 정부의 창사 초토화 작전에도 불구하고 난무팅 건물을 화마로부터 구한 성벽. |
하지만 역사적인 현장을 찾았다는 설렘과 기쁨도 잠시 뿐,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이내 씁쓸함으로 바뀌었다. 곧 허물어질 것 같은 낡은 목조건물에 어지럽게 널린 빨래는 내리는 비와 함께 음산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낡은 목조 건물 내 어지럽게 빨래가 널려 있는 창사 난무팅 6호 건물. |
삐걱거리는 2층 목조 계단을 올라 백범이 총탄을 맞았다는 방에는 주민이 살고 있었다. 초라한 세간살이가 들어서 있는 방의 왼쪽 벽으로는 옆 건물과 이어진 회랑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어둡고 칙칙한 집안 풍경은 백범이 총격을 받은 비극의 잔상을 여실없이 보여주는 듯했다.
허물어질 듯 낡은 창사 난무팅 6호 건물 |
다음으로 창사에서 8개월간 임정 청사로 사용된 시위안베이리(西圓北里)를 찾았다. 난무팅에서 1㎞가량 떨어진 그곳 역시 낡은 목조 건물이 늘어선 미로 같은 좁은 골목 막다른 곳에 있었다. 청사 건물은 사라진 지 오래였고, 대신 그 자리에 아파트 네 동이 세워져 있었다.
임시정부가 창사에서 머무르는 동안 청사로 사용했던 시위안베이리 8호(현재 2호) 자리에는 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
세월의 무게를 이겨내지 못하고 사라져버린 임정 요인들의 흔적을 찾을 길이 없어 황망한 느낌으로 아파트 주변을 배회할 수밖에 없었다. “10여년 전만 해도 당시 건물이 있었지만 재개발로 없어졌다”는 현지 주민들의 무심한 증언은 임정 요인들이 유적지 복원에 소홀했던 후손들을 질타하는 메아리로 되돌아 오는 듯했다.
철거되기 전 창사 임시정부 청사. |
*일부 사진은 다큐멘터리 작가인 이봉원씨의 협조를 받은 것입니다.
장원주 기자 strum@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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