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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린 산책]''보랏-카자흐스탄 킹카의 미국 문화 빨아들이기''

입력 : 2007-01-19 00:30:00 수정 : 2007-01-19 00: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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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자흐 TV 리포터 기상천외 미국 문화 빨아들이기 내가 얼룩말에게 물었다. “넌 검은 바탕에 흰 줄이 쳐진 거니? 흰 바탕에 검은 줄이 쳐진 거니?”
얼룩말이 나에게 물었다. “넌 버릇이 나쁜 좋은 애니? 버릇이 좋은 나쁜 애니? 시끄럽게 조용하니? 조용하게 시끄럽니? 넌 슬프게 행복하니? 행복하게 슬프니? 넌 지저분하게 깔끔하니? 깔끔하게 지저분하니? …”
세상엔 본래 좋고 나쁨이란 게 있을 수 없다. 익숙한 것과 덜 익숙한 것만 존재할 뿐. 문화의 우월함과 열등함을 구분하는 건 마치 얼룩말에게 줄무늬를 묻는 셸 실버스타인의 시처럼 우매한 시도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현실은 어떠한가.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세상에선 강한 자의 모든 것이 늘 옳고, 본받아야 하는 것, 세련된 것, 좋은 것이 되며, 반대편에 선 자는 그렇지 못한 열등생으로 전락하고 만다. 이분법으로 질식하기 5분 전의 세계. 무엇이 옳고 그른가, 좋고 나쁜가는 잠시 잊고 엉망진창 뒤집어 섞고 무너뜨려 보는 쾌감. 그 통렬한 유머 속에 씁쓸한 뒤끝을 남기는 영화가 바로 ‘보랏’이다.
‘카자흐스탄 정보통신부 제공’. 영화는 시작부터 뻔뻔한 거짓말을 느물느물 늘어놓는다. ‘블레어위치 프로젝트’처럼 모큐멘터리(가짜 다큐멘터리) 형식을 취하는 것. TV 리포터인 보랏은 카자흐스탄에서 두 번째로 성공한 인물로, TV에 데뷔하기 전에는 집시 포주, 아이스 메이커, 컴퓨터 수리공으로 일한 경험이 있으며, 여동생은 전국에서 네 번째로 잘나가는 창녀이다. 마을 사람들은 소떼 몰이를 하듯 유태인 몰이를 즐기고, 유치원 꼬마들까지 기관총으로 무장한 나라 카자흐스탄. 이 나라의 TV리포터 보랏은 뉴욕에서 캘리포니아까지 미 대륙을 횡단하며 기상천외 난동 모험극을 벌인다.
원제는 ‘Borat: Cultural Learnings of America for Make Benefit Glorious Nation of Kazakhstan’. 즉, ‘영광스러운 카자흐스탄의 이익을 위해 미국 문화를 배우기’쯤 되겠다. 시종일관 뒤틀린 조크로 가득한 83분. 1800만달러짜리 R등급 모큐멘터리는 우리가 더 우월한 것이라 믿는 가치들이 단지 사회적 합의에 의해 유지되는 질서일 뿐, 사물의 본질엔 경중이 없다고 힘주어 강조한다.
미개국 리포터라는 자신의 신분을 십분 활용(?)해 미국 문화 속에서는 절대 용납되지 않는 말과 행동을 일삼는 주인공. 페미니스트 면전에서 서슴없이 ‘여자의 뇌는 다람쥐만 하다’며 모욕하거나 술을 마시며 운전교습을 하고, 흑인 정치인을 초콜릿 페이스의 노메이크업 사내라고 부르는 등 반유대주의, 호모포비아, 백인 우월주의를 넘나들며 민감한 이슈들에 천연덕스럽게 엿을 먹이고 일을 저질러댄다. 아무도 반겨주지 않는 미국 땅. 보랏은 좌충우돌 컬쳐쇼크를 겪고, 반대로 미국인들은 보랏에 의해 황당무계한 컬처 쇼크를 겪는다. 문화적 차이 때문에 끊임없이 오해받고 봉변당하는 보랏. 하지만, 실상 봉변당하는 것은 미국문화로 대변되는 가진 자의 질서다. 오물을 잔뜩 뒤집어쓴 채 난감해하는 건 우리가 목숨 걸고 사수하려는 자본주의요, 신처럼 떠받들고 있는 고매한 에티켓들이다.
무엇이 야만적인가, 무엇이 도덕적이고 윤리적인가. 다른 관점을 강요할 필요는 없다. 중요한 건 다른 관점이 존재할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반대편 저 너머를 존중하는 것. 내 것만이 옳다고, 내 세계가 유일하다고 우기지 않는 것. 그거면 충분하다. 그거 하나면 세상은 지금보다 열 배쯤 더 살기 좋아질 게다. 덜 퍽퍽하고 덜 차가울 테다.
김정아(이노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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