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2일(현지시간) 오후 남극 사우스셰틀랜드 군도의 킹조지 섬. 전날 불었던 초속 15m의 거센 바람은 다소 잦아들었지만, 검은 구름 아래로 진눈깨비가 흩날리고 있었다. 킹조지 섬 바톤반도에 위치한 세종기지에서 해안가를 따라 남쪽으로 40여분을 걸어가자 ‘펭귄 마을’로 불리는 바위언덕이 나타났다.
“끼우∼욱! 끼우∼욱!”
낯선 이들의 출현에 가까이 있던 젠투펭귄 수십 마리가 괴성을 지르기 시작한다. 그 모습은 위협적이긴커녕 오히려 안쓰럽다는 말이 알맞다. 어떤 녀석들은 품고 있던 알을 내팽겨치고 도망치기도 한다. 키가 70㎝ 정도인 젠투펭귄은 온순하면서 겁이 많고, 새끼에 대한 책임감도 부족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때문에 젠투펭귄 무리가 있는 곳 주변에는 호시탐탐 알을 노리는 갈색스쿠아가 쉽게 눈에 띄었다. 깨져 버린 펭귄의 알은 자식을 잃은 어미의 슬픔을 의미하는 동시에 굶주렸던 스쿠아의 생존을 이야기한다. 스쿠아는 동료가 날개를 다쳐 약해지면 순식간에 덤벼들어 살을 뜯을 정도로 항상 굶주려 있기 때문이다.
◇퇴화된 날개로도 날 수 있을까. 먹이를 구하기 위해 남극 바다로 뛰어든 젠투펭귄이 수면 위로 솟구쳐 마치 물 위를 나는 듯한 모습을 연출하고 있다. 임완호 다큐멘터리 작가 제공 |
◇봄이 온 남극 세종기지 주변 펭귄마을에 번식을 위해 모여든 펭귄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
겨울동안 따뜻한 북쪽 바다로 올라가 배를 채우던 펭귄들은 여름이 시작되기 전 남극으로 돌아와 둥지를 튼다. 한 번 알을 품은 암컷은 여간해선 움직이지 않고, 용변 또한 앉은 자세로 해결한다. 그래서 둥지 주변은 배설물 흔적이 사방으로 뻗어 있다. 대부분 남극 동물들이 그러하듯 크릴을 주식으로 삼는 펭귄의 배설물은 주황색에 가까운 붉은 빛을 띤다.
펭귄사회에서도 주류에 속하지 못한 ‘왕따’들이 있는 모양이다. 무리에서 멀찍이 떨어져 둥지를 튼 녀석들이 있는가 하면, 뒤늦게 교미를 시도하는 ‘지각생’들도 보였다. 맥스웰만 건너편에 사는 아델리 펭귄 한 마리는 어찌하다 길을 잃어버렸는지 젠투펭귄 무리 사이에서 가족을 찾아 헤매고 있었다.
킹조지 섬의 또 다른 종인 턱끈펭귄(췬스트랩)은 보다 높은 곳에 자리를 잡았다. 이 펭귄은 젠투펭귄보다 덩치가 작지만 호기심이 많고 성격이 사나워 가까이 가면 물러섬 없이 공격을 감행한다. 수천마리는 족히 될 듯한 펭귄들이 요란한 고함을 질러대며 번식이라는 본능에 몰두하는 모습이란. 남극에서도 생명이 태어난다는 사실에 대한 신비함은 직접 현장을 목격하는 순간 경외감으로 변했다. 남극의 자연을 이해하고, 또 그 자원을 이용하려는 인간들에게 펭귄들은 ‘남극의 주인은 바로 자신들’임을 이렇듯 실감나게 일깨워주고 있었다.
여름 철새들도 곳곳에서 부모가 될 준비를 하는 중이었다. 날개를 펴면 1m가 넘는 큰풀마갈매기(자이언트 패트롤) 두 마리는 지난해와 똑같은 바위 틈에 둥지를 틀었다. 마침 세종기지 대원들이 탐사를 나갈 때 항상 다니는 길이라서 고경남(32·의료담당) 대원이 금방 알아본다. 높은 바위산에 둥지를 마련한 남극 제비갈매기들은 침입자의 머리 위에서 온 힘을 다해 울어댄다. 이 새는 몸집이 아주 작지만 워낙 협동을 잘하고 비행능력이 뛰어나 스쿠아들도 당해내지 못한다고 한다. 녀석들의 신경을 더 건드리기 전에 가던 길을 재촉하는 편이 상책이다.
‘펭귄마을’에서 30분을 더 걸었을까. 멀찍이 보이는 큰 나무토막 하나가 움찔거린다. 1t은 됨직한 수컷 코끼리해표였다. 단잠을 깨웠는지 사람들을 향해 상체를 벌떡 세우더니 10여㎝에 달하는 송곳니를 드러냈다. 타국 연구원들의 연구대상인지 오른쪽 몸통 부분에는 조그만 문신이 있고, 양쪽에 새겨진 ‘20’이라는 숫자는 멀리서도 보일 만큼 크다. 고 대원은 “암컷은 여러 마리가 붙어 다니기 때문에 이곳에서 예닐곱 마리가 줄지어 누워 있는 모습도 자주 보인다”고 알려준다.
코끼리해표와 20m쯤 떨어진 곳에는 같은 해표라고 하기에는 외모가 너무 다른 웨들해표 한 마리가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동글동글한 얼굴에 자신을 방어하기 위한 수단이라고는 코를 벌렁이며 거친 숨을 몰아쉬는 것밖에 할 줄을 모른다. 3∼4명이 한꺼번에 달려들어 셔터세례를 퍼붓는데도 몸 한 번 뒤집기조차 힘겨워했다.
반나절 동안 계속된 인간의 침입은 일단 이쯤에서 멈췄다. 남극의 주인들은 이제 낯선 경험을 잊고 또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터이다. 남극에 첫 발자국을 남긴 지 아직 200여년밖에 되지 않은 인간의 호기심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글·사진(남극 킹조지섬)=김창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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