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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서 잊혀진 존재, 비류의 나라 인천

입력 : 2006-10-20 00:00:00 수정 : 2014-03-23 00:0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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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류의 나라 인천, 그리고 21세기 .

역사가 중요하고 의미있는 것은 과거의 찬란한 영광과 실패의 처참함을 환기시키는 활동사진이 아니라 바로 현재와 미래의 우리 삶을 규정하는 틀과 방식을 찾아내는 생명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인천의 첫 탄생이고 원형인 비류국의 존재와 의미를 찾는 것은 매우 필요하다.

한 나라의 도읍이 된다는 것은 크고 작건 간에 그 만큼 의미있고, 중요한 공간이라는 또 다른 표현이다. 인천사람들을 빼고는 잘 모르고, 인천에서도 그다지 많이 알려진 사실은 아니지만 인천은 고대 비류국이었다. 그 당시의 소국가들은 도시나 그 주변을 포함한 지역이므로 현재의 인천시 중심부가 비류국이었으며 궁궐은 문학산성과 그 아래 주변지역이었을 것이다. 이 海港도시와 동생인 온조가 한강가에 세운 河港도시가 합해져서 우리가 알고 있는 백제가 된 것이다. 그런데도 역할과 위치에 비하여 알려진 바가 적고, 특히 비류에 관한 자료는 거의 없다보니 역사적으로 실존했는가의 여부도 의심받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나오는 기록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朱蒙이 졸본부여로 피난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沸流와 溫祖이다. 그런데 유리가 찾아와 태자가 되자 비류와 온조는 어머니인 召西奴와 따르는 신하들을 거느리고 남으로 이동하였다. 이 때 비류는 彌鄒忽에 가서 살았으나 땅이 습하고 물이 짜서 편하게 살 수 없었으며, 결국 죽고 그 백성들은 온조에게 복속하였다. 그러니까 비류는 분명히 역사적인 존재이고, 그가 세운 나라가 우리 역사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소서노를 위시한 비류집단은 어느 곳을 출발하였을까? 졸본부여는 현재 압록강 중류와 혼강 유역에 있었다. 당연히 강상에서 수상활동을 많이 해서 능력을 충분히 갖추고 있었으며, 신속하게 도망하는 상황이었다면 일단은 압록강 수로를 이용하는 것이 바람직했다. 압록강은 일찍부터 상업교역의 중요한 통로가 되었음을 알려준다. 통항거리가 길고(750km) 큰 규모의 선박이 航行할 수 있고 많은 선박들이 동시에 운행할 수가 있다. 주변지역에서 발견되는 명조전 같은 유물로 보아 선사시대부터 해양교통이 발달하였고, 후에는 고조선이 해양문화를 발전시켰다. 위만조선 역시 남쪽에 있는 한의 소국들과 교섭을 할 때는 이 항로를 이용했을 것이다. 이른바 황해연근해항로이다. 그 후에도 고구려는 압록강 河口의 서안평을 점령하려는 노력을 필사적으로 벌인다. 3세기 전반에 동천왕이 吳나라와 군사동맹을 맺고, 교역을 하는 교섭창구도 이곳이었다.

비류와 온조집단은 육로를 사용할 수가 없었으므로 압록강 하구의 해상세력과 결탁하거나 도움을 받아 압록강 하구유역을 출발하였을 것이다. 물론 항로와 목적지점을 어느정도는 파악한채 출발하여 준왕과 마찬가지로 선단을 이루면서 남진했을 것이다.

< 이동경로와 경유과정>

비류집단이 남천하는 기사는 너무나 단편적이어서 그들의 항해과정과 도착에 대하여 언급이 없다. 물론 기록 자체에도 문제가 있었지만, 갈등이 없었거나 미약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온조가 처음의 국명을 十濟로 했다는 표현은 사람들이 적고 대규모의 군사를 거느리지 않았음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그들은 일단 소규모의 선단을 구성하여 압록강 하구유역을 출발하여 의식적으로 연근해항해를 하다가(필요에 따라서는 연안항해도 병행하였을 것이다.) 도중에 몇 군데에 상륙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낙랑세력이 장악하고 있었을 대동강 하구유역은 멀리서 우회한 다음에 경기만의 가장 한 지점으로 상륙하였을 것이다.

경기만은 황해도와 충청도 사이에 있는 한반도 최대의 만으로서, 동아지중해에서 일본열도를 출발하여 압록강 하구와 요동반도를 경유하여 산동까지 이어지는 남북연근해항로의 중간깃점이고, 동시에 한반도와 산동반도를 잇는 동서횡단항로와 마주치는 해양교통의 結節点이다. 또한 강화도를 거쳐 해주지역이나 옹진지역으로 북상하고, 남으로는 남양만 아산만을 지나 충청도 지역으로 내려가는 서해연안항로의 중간경유지이기도 하였다. 더구나 농경지가 발달하여 경제적으로도 매우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만약 이 해역과 지역을 장악한다면 한반도 중부전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을 갖춘 것이 된다. 이러한 지리적인 위치로 인하여 정치세력들이 일찍부터 터를 잡았었다.

새로운 국가건설을 꿈꾸는 비류집단들이 이 경기만을 목표로 항진하였을 것은 자명하다. 그런데 이들의 이동경로를 구체적으로 알려주는 유일한 표현이 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異說에는 비류가 동생과 따르는 무리들을 이끌고 패수와 대수를 건너서(‘渡浿帶二水’) 미추홀에 정착하였다고 하였다고 하였다. 패수는 예성강이고, 대수는 임진강 혹은 그 주변지역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 그렇다면 비류와 온조 집단은 상륙하고, 내륙으로 진출하기에 유리한 황해도 지역에 일시 거주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그 곳에서 한산 혹은 미추홀지역으로 처음부터 각각 따로 갔거나, 아니면 함께 움직이다가 어느 한쪽이 결별하고 새로운 곳으로 떠났을 것이다.

<정착과정과 지역>


비류가 정착한 지역은 어디일까?
본문에는 海濱으로 갔는데, 땅이 습하고 물이 짜서 정착에 실패한 것으로 되어 있다. 미추홀은 기록과 역사전개과정, 그리고 해양환경 등을 고려할 때 현재 인천의 한 지역이다. 삼국사기의 지리지에는 인천을 가리키면서 (一云 慶原 買召一作彌鄒) 󰡔삼국사기󰡕 권 35 지리지라고 하였고, 광개토대왕릉비문에는 丙申年에 친히 수군을 이끌고 점령한 58성 700여촌 가운데 彌鄒忽로 추정되는 彌鄒城이 있다. 이 지역은 장수왕 대에 들어와 완전하게 고구려의 영토가 되었다. 󰡔三國史記󰡕󰡔세종실록지리지󰡕 󰡔동사강목󰡕󰡔여지도서󰡕 󰡔大東地志󰡕에는 仁川이 미추홀임을 밝히고 있다.
그러면 비류는 왜 온조와는 달리 인천지역을 선택 하였고, 역사의 경쟁에서 패배하였을까?

이는 국가발전의 지향점과 정책의 집행방향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비류집단은 해양교통의 유리함을 활용하여 초기국가로 성장하려고 했을 것이다. 인천은 해안선의 굴곡이 매우 심한 리아스식 해안이며, 만의 안 밖으로 큰 섬이 있어 파도의 흐름을 안정시키고, 항구로서의 양호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

반면에 물길이 매우 복잡하여 현지의 해양민들이 아니면 거의 알 수가 없다. 이러한 조건은 해상토착세력의 등장과 성장을 가능하게 한다. 또한 염전이 발달하였으며, 물길을 장악하면서 物流體系를 영향권 아래에 넣고 갖가지 경제적인 이익을 챙겼을 것이다. 더구나 육지나 바다, 어느 방면에서도 공격과 토벌이 불가능하다. 국가가 발달하기 이전에 이러한 지역에서 소국들이 발전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더욱이 지금도 그렇지만 인천 지역은 서울과 관련성이 깊어 발전에 도움이 된다.

인천만에서 朱安으로 상륙하여 시흥과 부천사이로 빠져나가 光明을 지나 한강 이남의 서부지역으로 들어가는 길이 있다. 이렇게 인천은 소위 해항도시로서 발전의 조건을 갖춘 곳이다. 적어도 해양을 지향하고, 상업을 중요하게 여긴다면 경기만에서 가장 유리한 조건을 갖춘 지역이 현재의 인천지역이다. 비류가 세운 소국이 언제 온조의 백제에게 병합되었는지 단정할 수 없지만 그 당대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온조의 소국보다 더 정치 경제적으로 유리한 환경에 있기 대문이다.

비류가 도읍했던 미추홀은 인천지역에서도 문학산 지역에 비정하고 있다. 현재의 인천은 매립이 되어 과거의 모습과 매우 다르다. 해안가에 가까운 저지대는 대부분이 바다였다고 생각하면 별 무리가 없다. 문학산성은 인천시 남구 문학동과 청학동의 경계인 문학산 위에 있다. 해안가에 솟아올라서 ‘배꼽산’이라고 불렀으며, 봉화가 있었기 때문에 ‘봉화뚝산’이라고도 하였다.

󰡔世宗大王實錄󰡕 󰡔新增東國輿地勝覽󰡕 등에 이 성에 대하여 비교적 상세하게 기록이 나와 있다. 그런데 문학산성의 이름을 彌趨忽古城이라고 하였다. 󰡔仁川府邑誌󰡕 墳墓 조에 의하면 미추왕릉이라고 하는 고분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연수동에서 삼국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고분이 2기가 발견되었다. 이 조사에는 이형석씨가 참여하였다. 경기일보 1999년 12월 1일, 2일 자 참고.

문학산성 혹은 미추성은 현재 알려진 문학산의 정상부만으로 한정된 것은 아니다. 韓宗燮은 󰡔위례성 백제사󰡕 집문당.1994에서 계양산에 비정하고 있다.
문학산성 주변지역과 계양산 주변지역 등의 역사지리적인 검토 (해방체제와 관련하여)에 대해서는 필자가 󰡔고구려산성과 해양방어체제󰡕(신형식 윤명철 등 공저) 백산, 2000,에서 상세하게 다루고 있다.

인천지역의 중심부에 위치한 중심성으로서, 동쪽의 목쟁이 일부분 만을 제외하고는 사방이 해안과 밀접하고 심지어는 거의 마주치는 곳도 있다. 그러므로 산군 전체가 하나의 통일된 시설이 되지 않으면 안된다. 왕궁이 아닌 수도라면 적어도 이 지역 전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 후에도 미추홀은 백제의 역사에서 한성지역을 수호하는 해방체제란 면에서 매우 의미있는 역할을 하였으며, 고구려 신라를 거쳐 고려시대에도 해양방어나 해양교통 , 교역이란 측면에서 중요하였다.

맺음말

비류와 그의 나라는 역사에서 잊혀진 존재이다. 그가 정착한 인천지역은 작은 규모의 해양폴리스가 아닌 고대 국가의 중심수도로서는 불리한 환경이었다. 그러므로 해항도시국가로서 출발한 비류세력은 하항도시국가인 온조 세력과의 대결에서 패배하고 흡수되었다. 하지만 인천지역을 선택한 것은 그 집단의 성격과 시대상황을 고려할 때 불가피했고, 현명했다고 판단된다.

21세기 들어서 해양의 역할이 강조되면서 동아시아가 만남과 교류의 공동체를 지향하고 있다. 영종도 국제공항 송도경제특구 등에서 나타나듯 동아지중해의 중심은 경기만이고, 인천은 그 중에서도 중심핵이다. 비류의 역사가 다시 부활하고 있다. 왜 그가 이곳을 선택했고, 왜 국가경쟁에서 패배했으며, 또 인천지역이 역사에서 주변부로 맴돌았는가를 진지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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