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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유명 대학을 가다](57) 중국 난카이대학

입력 : 2006-08-28 12:05:00 수정 : 2006-08-28 12: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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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우언라이 배출한 국가중점 대학 ‘상하이 푸둥에 뒤지지 않는 톈진(天津) 빈하이(濱海)를 만들자.’ 중국의 톈진이 환보하이만 경제권의 중심으로 떠오르고 있다. 톈진에는 고층 건물들이 즐비하게 들어서 있고, 톈진과 베이징을 잇는 고속철도가 건설되고 있다. 톈진을 북방의 금융·상업 중심 도시로 탈바꿈시키기 위한 새로운 프로젝트가 시작된 것이다. 그 중심에는 난카이(南開)대학이 배출한 인재들이 있다.

1904년 사립中서 출발… 1952년 종합대학으로 승격전임교수만 1600여명…


톈진은 수도 베이징의 관문으로 보하이만에 접해 있다. 예로부터 톈진은 강남의 물자를 북방으로 운송하기 위해 뚫은 운하를 비롯해 9개 하천과 도로로 7개의 성과 연결돼 있었다. 명나라 때 베이징에 근거를 둔 영락제가 난징에 있는 건문제를 폐위하기 위해 ‘정난의 변’이라는 정치 쿠데타를 일으켰을 때 영락제가 이곳을 거쳐 남하했다. 이때 ‘천자가 도하한 지방’이라는 뜻의 톈진이라는 이름이 생겼다.
필자는 한중 수교 전에 인천에서 배를 타고 산둥성 웨이하이를 통해 처음으로 중국 땅을 밟았다. 오성홍기가 나부끼고 인민해방군 복장을 한 군인에게 입국 심사를 받던 그때의 기억이 아직 생생하다. 보따리 화교 상인이 주로 이용하던 선박은 21시간 정도 걸렸다. 당시 난카이대학에는 아프리카와 사회주의 국가에서 유학 온 학생이 대부분이었다. 북한 유학생 50여명도 학교 기숙사에 있었다. 한국 학생은 사업하는 부모를 따라 오거나 혹은 홍콩을 경유해 온 10명 정도였다.

난카이대학은 1904년 설립된 사립중학교에서 출발했으나 실질적으로는 애국주의 교육자인 장보링이 문과·이과·상과를 중심으로 19년 난카이대학을 창설하면서 시작됐다. 이후 37년 일제 침략을 피해 후난성 창사, 윈난성 쿤밍 등으로 캠퍼스를 옮겼다가 46년 톈진으로 복귀하면서 국립대학이 됐고 52년 문과·이과 중심의 종합대학이 됐다.
현재 난카이대학은 문학원, 역사학원, 법학원, 경제학원, 컴퓨터, 생명과학, 저우언라이정부관리학원 등 21개 학원과 학과에 70여개 전공과정이 설치돼 있다. 200여개 전공의 석사과정과 100여개 전공의 박사과정도 있다. 또 국가급 중점학과와 중점실험실, 국가기초학과 인재배양 및 과학연구기지 등 100여개에 이르는 중점연구기관이 있다.
전임교수는 1600여명에 이른다. 박사생 지도교수 470명, 교수 570여명, 부교수 620여명이다. 여기에는 중국과학원 원사와 중국공정원 원사, 제3세계 과학원 원사 등 중국 최고 권위의 학자들이 포함돼 있다. 재학생은 3만6000여명으로 학사과정 1만2000명, 석사과정 7100명, 박사과정 2500명, 유학생 1000여명이 공부하고 있다. 난카이대학은 100여개 외국 대학과 자매결연을 맺고 있다.
난카이대학은 인문학과 기초과학, 생명과학, 공학을 중심으로 한 국가 중점대학으로, ‘공익을 위한 능력을 갖추고 나날이 새로워진다’는 교훈으로 국가 발전에 필요한 인재를 배출하고 있다.
중국인에게 가장 존경받는 정치가는 총리를 지낸 저우언라이(周恩來)다. 그는 1917년 일본 와세다대학에서 공부하고 돌아와 19년 난카이대학 문과 1기(학호 62호)로 입학했고, 5·4운동 때 애국계몽운동에 나서기도 했다. 저우언라이는 일본에서 돌아올 때 부산에서 기차를 타고 우리나라를 거쳐 중국으로 돌아갔다. 난카이대학은 저우언라이의 청년 시절과 뗄 수 없는 곳이며, 그의 정치사상이 형성되는 데도 큰 역할을 한 곳이다. 난카이대학 공원에는 ‘나는 난카이를 사랑한다’는 저우언라이의 글귀가 남아 있다. 저우언라이의 애교심을 이어받은 난카이인은 환보하이만 경제권의 중심이자 금융·상업의 중심 도시로 거듭나는 톈진의 중심세력을 이루고 있다.

오일환 난카이대학 역사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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