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군이 이처럼 독특한 형태의 작통권을 가지게 된 것은 1950년 발발한 한국전쟁에 그 원인이 있다. 이승만 대통령은 6·25 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7월 14일 맥아더 국제연합군 사령관에게 작전권을 위임했다. 이 전 대통령이 당시 맥아더 사령관에게 보낸 공문서에는 “현 적대상태가 계속되는 동안 한국 육·해·공군에 대한 일체의 지휘권(command authority)을 이양… …”한다고 돼 있다.
이어 사흘 뒤인 16일 맥아더 사령관은 이 전 대통령으로부터 한국군의 작전권을 이양받았음을 확인했다. 당시 맥아더 사령관이 이 전 대통령에게 보낸 회신에는 “현 적대상태가 계속되는 동안 한국의 육·해·공군의 작전지휘권(operational command authority)을 위임한 귀하의 서신에 관한... ...용감무쌍한 한국군을 본관 지휘하에(under my command) 두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한다고 적혀있다. 이때 처음으로 한국군의 작전권이 외국 군대에 이양된 것이다.
이후 1954년 11월 한미상호방위조약이 발효되면서 작전권은 작통권으로 명칭이 전환됐고, 유엔군 사령관이 한국군에 대한 작전통제권을 계속해서 보유하도록 했다. 당시 상호방위조약을 보완하는 합의의사록에는 “국제연합사령부가 한국의 방위를 위한 책임을 부담하는 동안 한국군을 국제연합사령부의 작전 통제하에 둔다”고 명시하고 있다.
여기에서 주의할 것이 작통권(operational control)과 작전권(operational command authority)의 정확한 이해다. 작통권은 작전권의 하위 개념으로 관련 부대를 전개하고 전술적 통제를 가하거나 위임하는 권한이다. 일반적으로 작전권보다 권리가 제한적이다. 반면, 작전권은 작전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예하부대에 행사하는 권한으로 작전소요 통제, 전투편성, 임무부여 등의 권한이 있다.
1978년 11월 한미연합사령부가 창설되면서 한국군의 작통권은 다시 유엔군사령관으로부터 한미연합사령관으로 위임됐다. 당시 지미 카터 미 대통령의 주한 미 지상군 철수 계획에 따라 한국방위 작전의 효율화를 위해 창설된 한미 연합사는 1978년 7월 관련 약정과 전략지시 1호에 따라 유엔사의 작통권을 이양받았다.
한미 연합사령관은 양국 국가통수 및 군사지휘기구(NCMA) 하에 있는 한미 군사위원회(MC)의 지시를 받는다. 한미연합사 사령관은 통상적으로 미군 4성 장군(대장)이 맡고 있다. 미국은 한미연합사 사령관을 주한미군 사령관이 겸하도록 하고 있기 때문에 현재 한국군의 전시 작통권을 행사할 수 있는 사람은 바로 버웰 벨 주한미군 사령관 겸 한미연합사 사령관이다.
이 같은 작전 통제권이 다시 거론되기 시작한 것은 1987년 대선에서다. 당시 노태우 민정당 대통령 후보가 작전 통제권 환수 및 용산기지 이전 등을 선거공약으로 제시했고, 이 후 한미간 작통권 환수에 대한 공동 연구가 추진됐다.
1989년 8월 미 의회가 ‘넌-워너 수정안’을 상·하원에서 통과시키자, 미국은 한미연합사 해체와 주한미군 3단계 감축 등의 내용을 담은 ‘동아시아 전략구상’을 발표했다. 미국은 이와 관련, 1991년 1월 1일부로 정전시 작통권 전환 제안을 해 왔지만 우리 측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한미 양국은 1991년 제 13차 한미군사위원회(MC)에서 평시 작통권을 1993∼95년 사이에 전환하고, 전시 작통권은 1996년 이후에 전환하는 방안을 협의키로 합의했다. 이에 따라 양국은 작통권 환수 논의를 본격적으로 시작했고, 한국은 미측으로부터 1994년 12월 1일 평시 작통권을 환수받았다. 당시 논의 과정에서 한국군의 전쟁수행 능력이 대북 전쟁 억지력을 충분히 갖추고 있다고 보기 힘들다는 판단에 따라 전시 작통권은 그대로 한미 연합사령관에게 두게 됐다. 이정린 전 국방부 차관은 최근 문화방송(MBC) ‘100분 토론회’에 출연해 작통권과 관련, “처음엔 원래 작통권에 전· 평시 구분이 없었는데 양국이 논의를 하다 보니 한국군 전쟁 수행 능력에 부족한 점이 있다고 판단돼 고육지책으로 가르게 됐다”고 설명했다.
이우승 기자wslee@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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