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점에는 이와 비슷한 책 한 권도 보이지 않았다. 서점직원에게 안진호(安震湖)라는 저자 이름과 함께 발음조차 어려운 책제목을 또박또박 몇 번이나 일러줬지만 그런 책은 없다고 한다. 내가 이 책을 처음 본 것처럼 그는 이 책이름을 생전 처음 들어봤을 지도 모른다. 아무래도 ‘정선현토치문’을 구하기는 틀린 모양이다. 허긴 그 책이 있어도 전부 한문이니 모르는 글자가 많을 것이고, 옥편을 찾아서 읽는다 해도 글 해석은 또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두가 숙제이긴 하다.
그러나 나는 그 책을 꼭 읽고 싶었다. 그 책을 읽고 인간의 도리를 배우면서 한 여인의 정신세계와 그녀가 살아온 삶을 이해하고 싶었다. 소녀시절의 꿈을 접고 한순간에 마흔 살도 더 많은 스님에게 일생을 바쳐서 이날까지 그의 유지를 받들며 살고 있는 여인의 삶을.
채원화. 고 효당 최범술 스님의 부인이며 효당 본가인 반야로(般若露)차도문화원장이다(모두들 ‘茶道’를 ‘다도’라고 하는데 반야로에서는 ‘차도’를 고집한다). 그녀는 직접 염색을 했다는 잿빛 모시옷을 날아갈 듯이 입고 앉아서 차도(茶道)를 하고 있었다. 조용히 쳐다보는 눈빛이 사람들의 마음을 꿰뚫듯 예리하다. 내 나이쯤 되었을까. 더 먹었을까. 높은 도의 경지에 가 있는 분위기를 풍기는 그녀는 나이를 가늠할 수 없다.
누구나 다 사춘기가 있었고, 그 시절 우리 모두는 인생에 대한 고민으로 방황했다. 인간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하는. 그럴 때 그녀는 효당스님을 찾지만 만나지 못하고 수년 후 연세대 사학과 졸업 때 원효사상에 대한 졸업논문을 준비하면서 원효사상의 일인자인 효당스님을 만난다. 그 때 그녀는 일반인과는 무언가 다른 효당스님의 정신세계에 빠진다. 불교를 만나고, 효당스님의 부인이 되고, 효당의 반야로 차도를 계승한다. 그리고 스님 타계 후 지금까지 효당의 반야로 다도를 전하는 삶을 살고 있다. 35여 년을 그렇게 살았다.
효당 최범술 스님은 한국 최초의 차서인 ‘한국의 다도’를 펴냈고, 한국 최초로 차인들의 동호회인 한국차도회를 발족시킨 한국 현대차도계의 중흥조이다. 13세에 다솔사에 출가하여 60년간 다솔사에 기거한 그는 다솔사 주지였고 독립운동가였다. 다솔사 차가 유명한데 바로 이 다솔사 차의 주인이 바로 효당스님이고 그 차 이름이 ‘반야로’이다.
채원화선생은 지난 봄 한국에 나갔을 때 일당스님이 한국 최고의 다도선생이라며 소개를 했다. 일당스님은 학생시절 그녀의 남편인 효당스님이 독립운동을 할 때 독립운동자금을 운반한 소중한 인연이 있다. 인사동 반야로 차도문화원에서 만난 채원화선생은 처음 만난 나에게 독수선차(獨修禪茶:차실에 홀로 앉아 화롯불의 찻물 끓는 소리를 들으면서 차를 달여 마시며 심신을 수련하는 선차)를 보여주었다. 일반차도와는 완전히 달랐다. 숨소리조차 크게 낼 수 없는 고요 속에서 선생의 찻물 따르는 소리만이 맑게 들렸다. 차선일미(茶禪一味), 차선일체(茶禪一體)란 말이 조금도 틀리지 않았다. 보는 것만으로도 그 경지에 들었다. 일반차도의 밑바닥 흉내만 내면서 아무렇게나 쉽게 차를 마셔온 나는 그녀의 독수선차를 보면서 죄송하고 미안했다. 처음 죽비 한 대 치는 소리와 찻잔에 차 따르는 소리만 나는 그 고요, 선생이 손수 우려서 따라주는 선차 한잔 마신 일이 먼 신비의 세계에 갔다 온 듯 뉴욕에 돌아온 후에도 눈에 선했다.
몇 개월 후 두번 째 만났을 때 그녀는 주부들에게 서당식 교육을 시키고 있었다. 선생을 중심으로 여자들이 차상에 책을 펼쳐놓고는 공자 왈 맹자 왈 하며 소리 높여 하던 그런 공부였다. ‘精選懸吐緇門’(정선현토치문)은 내용이 전부 한문이었다. 선생이 한 문장을 읽으면 학생들이 따라 읽고, 선생이 해설을 했다. 그렇게 한 단락이 끝나면 학생 혼자 한문을 읽고 해설을 한다. 요즘 세상에 이런 공부도 다 하다니, 신기하고 희한했다. 이 공부가 차도와 무슨 상관일까, 의아스러웠다. 학생들은 모두 다른 곳에서 일반다도를 마친 차도강사 자격자들로 더욱 높은 수준의 차인이 되기 위해 2년 과정의 반야로 차도를 배우고 있다고 했다. 일주일에 한 번씩의 2년 과정 속에 이 현토치문 수업이 들어있었다. 유불선을 가르치는 반야로 차도문화원의 기본 교육인 것이다.
이 책은 중국 고승들의 어록을 엮은 경훈법어집(警訓法語集)으로 안진호 스님이 해설한 책이다. 이날 공부한 것은 면학 하(勉學 下)편으로 그 내용이 좋아서 내 이 책을 꼭 공부하리라 마음먹었었다. 그러나 서점에서는 책이름조차 모른다. 혹여 서천스님이 알까싶어 마하선원으로 전화를 해도 통화가 되지 않는다. 아마 뉴욕서는 구하기 힘들 것 같다.
채연화선생, 효당스님, 반야로 차도, 정선현토치문, 그리고 일당스님. 그 이름들이 끈끈한 줄이 되어 이어지고 있다. 한여름의 무더위가 한창이어도 차를 마시면서 치문(緇門)을 읊고 무언가 깨달을 수만 있다면 그보다 더 깊고 높은 차선일미, 차선일체의 경지가 또 어디 있으랴!
김옥기 스페이스 월드 관장
<전교학신문>전교학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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