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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문화파워엘리트]트로트계의 미다스 정의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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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로트계의 미다스 정의송. 그는 송대관 김혜연 소명 박현빈에 이르기까지 ‘요즘 뜬다’하는 트로트가수의 상당수를 프로듀싱했다. 그래서 그의 일거수 일투족은 한국 성인가요계에 항상 화제다. 그가 말하는 트로트가수의 성공전략은 무엇일까. SW가 정신없이 바쁜 정씨를 만나 성인가수의 성공방정식을 찾아봤다.
편집자주

“탄탄한 홍보력과 근성은 필수!”
정의송은 트로트 가수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탄탄한 홍보력이 뒷받침돼야 한다고 봤다. 정의송은 “작곡가가 이름을 알리기 위해서는 홍보를 잘할 수 있는 가수에게 곡을 줘야 하는 것이 현실”이라며 “아무리 좋은 곡을 줘도 홍보가 잘 안되면 성공하기 힘들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러한 현실은 작곡가의 승부욕을 자극하기도 한다.
이미 유명한 가수에게 곡을 주면 홍보가 잘되니까 성공이 쉬운 편이다. 정의송은 그래서 “잠재력 있는 신인과 함께 작업해 인기를 모으면 훨씬 더 보람이 느껴진다”고 말했다. 무명가수를 띄워낼 수 있을 정도라면 충분한 실력을 검증받은 셈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사례는 거의 없었다는 것이 정의송의 설명이다.
홍보보다 중요한 것은 가수의 마음자세다. 1999년 데뷔 앨범 ‘못 잊을 사랑’을 냈던 정의송은 당시의 실패 요인을 ‘가수로서의 근성 부족’으로 꼽았다.
송대관으로부터 ‘네가 대한민국에서 노래를 제일 잘한다’는 칭찬까지 받았던 정의송은 앨범 발매 1년6개월 만에 모든 활동을 접어야 했다. 노래에 목숨을 걸지 않았기 때문. 정의송은 “가수 안하면 곡을 쓰면 된다는 생각을 무의식 중에 한 것 같다”면서 “가수라는 직업이 얼마나 끈질기게 매달리고, 노력해야 하는지 알게 됐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그동안 총 50 여명의 가수가 정의송의 곡을 받아갔다. 하지만 그 성적은 제 각각. 정의송은 “근성이 충분한 사람만이 살아남았다”고 설명했다.
그는 자신의 노래 ‘서울 대전 대구 부산’으로 스타덤에 오른 김혜연을 예로 들며 “김혜연과 같은 악바리는 본 적이 없었다”면서 “지금 생각해보면 김혜연은 성공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라고 평했다.

황용희 이혜린 기자
rinny@sportsworldi.com



●정의송이 말하는 박현빈
박력있는 창법 매력만점




정의송이 발굴한 스타중에 첫번째로 꼽으라면 당연히 요즘 신나게 인기질주인 ‘트로트 핵심동력’ 박현빈이다.
정의송은 가수 박현빈의 등장을 ‘트로트계의 새로운 바람’으로 해석하고 있다. 지난해 장윤정의 성공으로 자칫 ‘이례적인 대박’으로 머물 수 있었던 ‘젊은 트로트 열풍’이 박현빈에 이르러 하나의 트렌드로 자리잡았기 때문이다.
“이런 케이스가 없었죠. 단번에 성장했잖아요. 트로트 하면 한 곡 뜨기까지 2∼3년 걸리는 것이 정설인데 그 룰을 박현빈은 완전히 깨버렸죠.”
박현빈의 성공을 정의송은 두가지로 압축했다. 바로 가수의 뛰어난 능력과 소속사인 인우프로덕션의 치밀한 기획력이 그것.
“현빈이는 아주 뛰어난 가수입니다. 못하는 음악이 없어요. 그의 울림에는 혼이 담겨있지요. 그리고 ‘인우’의 능력은 무한정인 것 같아요. ‘인우’의 홍익선대표는 불도저예요. 한번 마음먹은 일은 단번에 해버리죠. 그가 현빈이를 처음 봤을때 두말하지 않더군요. 그냥 자신이 매니지먼트를 하겠다고 했어요. 그리고 데뷔 4개월도 안돼 그를 오늘 이 자리까지 올려놓았어요. 그냥 놀랍기만 합니다.”
정의송이 추계예술대학 성악학과에 재학 중인 박현빈을 만난 것은 2년전이었다.
당시 박현빈은 기존 성악 창법과 달리 마지막에 울림 현상이 있어 고민 중이었는데, 정의송은 이러한 ‘성학도로서의 고민’을 트로트 가수로서의 잠재력으로 봤던 것이다.
“노래도 잘하고, 얼굴도 잘 생겨서 ‘남자 장윤정’ 감으로 최고라고 생각했죠. 그래서 1년여간 피눈물나는 훈련을 했어요. 그리고 홍대표에게 소개해줬습니다. 박현빈과 홍대표, 모두에게 박수를 보냅니다.”
정의송이 꼽은 박현빈의 강점은 역동성이다. 신인임에도 무대에서 힘있게 노래하는 모습이 마음에 들었단다. “노래하는 것 보면 박력 있잖아요. 가수로서 자질이 충분하죠. 다만 세월이 해결해줘야 할 부분은 있어요. 트로트는 맛있게 불러야 하는데, 그게 조금 부족하죠. 시간이 지나면 나아질 겁니다.”
정씨는 “앞으로 박현빈이 ‘남자 장윤정’이라는 기획성을 넘어 ‘제2의 나훈아’로서 자리매김할 것”이라며 기대감을 드러냈다.
이혜린 기자 rinny@sportsworldi.com





●정의송의 인생 스토리
가수 출신… 트로트계 미다스의 손


“가난했지만 음악과 함께할 수 있어서 좋았다.”
어린 시절 작곡가 정의송은 늘 음악과 가까이 지냈다. 1965년 강원도 삼척 태생인 정의송은 8남2녀 중 7째로 자랐다. 초등학교에 입하기 이전부터 어머니의 영향으로 트로트를 듣고 자란 그는 자연스럽게 트로트를 따라부르게 됐다.
초등학교 4학년 때는 큰 형이 연주하는 아코디언 소리에 심취했고, 중학교에 입학해서는 기타에 미쳐 책보다 기타를 가까이했을 정도다.
정의송은 “단지 음악이 좋았을 뿐”이라며 당시를 회상했다. “원래 꿈은 문학가나 시인이 되는 거였다”는 정의송은 “중학교에 입하니까 부모님이 기타를 하나 사줬다”며 “그때부터 기타와 함께 지냈다”고 말했다.
정의송이 가수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건 고등학교 2학년 때 ‘창밖의 여자’로 인기를 누리던 조용필을 보고나서부터.
“저렇게 사는 사람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 나도 가수를 하자. 그렇게 마음먹은 거죠.”
집안 형편상 대학 진학을 일찌감치 포기한 정의송은 어머니가 쥐여준 5만원을 들고 혈혈단신 무작정 상경했다. 당시가 1984년이었다.
그는 통기타 업소를 전전하며 근근이 생활을 이어갔다. 당시 통기타 가수 하면 포크를 주로 불렀지만, 정의송만큼은 트로트를 고집했다.
하지만 손님이 없으면 노래도 못하고 하루 겨우 5000원을 받으면서, 그는 ‘이렇게 살다가는 평생 무명에서 벗어나지 못하겠다”고 생각을 했고 그때부터 시작한 것이 작곡이었다. 당시 그의 나이는 28살.
1995년 김혜연에게 작곡해준 ‘서울 대전 대구 부산’이 큰 히트를 하면서 정의송에게도 기회가 찾아왔다. 이후 정의송은 김혜연의 ‘간 큰 남자’, 소명의 ‘빠이빠이야’, 송대관의 ‘사랑해서 미안해’, 박현빈의 ‘빠라빠빠’ 등 히트곡을 내놓으며 트로트계의 신흥 명작곡가로 부상했다.
지금까지 곡을 준 가수만도 어림잡아 50명을 넘을 정도다.
“아직 못다 이룬 꿈이 있어요. 아직 가수의 꿈을 접은 게 아닙니다. 언젠가 꼭 그 꿈을 이룰 거에요.”

글 홍동희, 사진 김두홍 기자
mystar@sportsworld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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