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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윤기의 역사기행]②구다라스의 백제인 왕과 왕인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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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6-08-02 13:26:00 수정 : 2006-08-02 13:2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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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왕족 ''오진 王''오사카 지역에정복왕조 기틀 일본에서 말하는 ‘야요이인(彌生人)’이란 서기 3세기 이전에 일본으로 건너간 한국인을 가리킨다. 3세기 이후엔 ‘고분인(古墳人)’으로 불렸다.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사람들과 선주민이 혼혈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한국 개도 일본에 건너가서 혼혈하였다는 것이 동물자원 육종학자인 다나베 유이치(田名部雄一) 아자부(麻布)대학 수의학과 교수의 연구 결과다. 그러나 고대 한국인들은 개만을 데리고 일본 열도로 건너간 것은 아니다.


약2000년 전에 일본으로 간 고대 한국인(야요이인)들은 ‘벼농사법’도 전수했다. 한반도 벼농사의 도래에 관해 가도와키 데이지(門脇禎二) 교토대학 사학과 교수는 고고학 측면에서 다루고 있다.
“모름지기 일본의 벼농사 문화는 한반도 남쪽인 한국을 거쳐 직접 전해졌을 가능성이 가장 크다. 한국 특유의 바둑판형 지석묘가 기타큐슈(北九州)의 조몬(繩文) 시대(BC 3세기 이전) 후기 말경부터 야요이 시대(BC 3∼AD 3세기) 전기에 만들어졌다고 하는 것과, 한국의 지석묘에 있는 특유한 마제석기가 기타큐슈의 야요이 시대 전기 유적에서도 발견되었다는 점 등은 야요이 문화 형성기에 한국과 기타큐슈 사이에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나가사키현의 시마바라(島原) 반도에 있는 하라야마(原山) 유적을 조사하였더니 조몬 시대 만기(晩期)의 토기와 함께 한국식 지석묘 무리가 발견됐다. 또한 시마바라 반도의 구레이시바루(礫石原) 유적에서는 벼와 직물이 짓눌린 흔적이 있는 토기가 발견됨으로써 이미 조몬 시대 만기에 한국 문화와 접촉이 있었으며, 야요이 문화의 주요 구성 요소 중에 벼와 직물이 조몬 만기의 사회에 전해진 것을 알게 되었다.”(‘체계일본역사’·1967)
오카자키 게이이치로(岡崎桂一郞) 교수가 1913년 저술한 ‘일본미식사’(日本米食史·1913)에는 일본 사람들이 어떻게 쌀로 밥을 지어 먹게 되었는지, 그 발자취가 잘 설명돼 있다. 이 책에서 오카자키 교수는 “우리 일본 사람들이 쌀밥과 야채를 주식으로 삼게 된 것은 한국으로부터 불교가 건너온 뒤부터다. 쌀은 불교 신앙과 연관이 크다”고 지적했다.



‘오진 왕’의 신상 구다라스의 ‘오진 왕’ 신상인 ‘팔만보살상’. 머리에는 옛날 조선 시대 방한모인 가죽을 댄 ‘남바위’를 쓰고 있어 고대 백제의 발자취가 엿보인다(왼쪽), ‘종요 천자문’ 왕희지 붓글씨의 ‘종요 천자문’


백제 제26대 성왕(聖王·523∼554 재위)에 의해 불교가 일본에 처음 전해진 것은 538년이다. 일본 불교 왕조 역사서인 ‘부상략기’(扶桑略記·13세기)에 보면, “긴메이 천황 당시인 신미년(551년) 3월에 백제 국왕(성왕·필자주)께서 보리 종자 1000석을 보내주셨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와 같이 성왕은 일본에 불교 전파뿐 아니고 보리 종자 1000석이라는 방대한 분량의 곡식을 보내주면서 일본 땅에서 쌀과 함께 보리도 경작하도록 가르쳐주었다.
고대 한국인들은 농기구와 함께 쇠로 만든 각종 생활도구며 대장간 시설까지 골고루 가지고 왜로 건너갔다. 그 때문에 일본 고대역사 기록에 보면 대장간을 ‘가라카누치’(韓鍛冶)로 써왔고, 땅 파는 삽을 ‘가라사비’, 타작마당의 도리깨를 ‘가라자오’(韓竿)라고 불러왔다. 가라사비의 ‘사비’는 한국어의 ‘삽’이라고 가나자와 쇼사부로(金澤庄三郞·1872∼1967) 국학원대학 국어과 교수가 밝혔다(‘廣辭林’·1925). 그러기에 일본 고대의 각종 농기구에는 ‘삼한(三韓)에서 새롭게 건너왔다’는 의미의 메이드 인 코리아, 즉 ‘한(韓)’자가 잇따라 달라붙었다.
한반도로부터 철제 농기구가 건너가기 전, “일찍부터 섬나라 일본에 살던 사람들은 원시 생활을 했다. 논 농사를 지었다고는 하지만 처음에는 골짜기의 물을 막아 쓰는 수준이었다. 농사는 나무로 만든 괭이나 삽으로 밭을 갈았다. 벼가 익으면 손이나 돌로 만든 칼로 벼이삭을 땄다”(門脇禎二, ‘古代國家と天皇’·1957)고 한다.
5세기 말경의 오진(應神) 왕은 왕자들에게 글을 가르치기 위해 백제의 젊은 학자 왕인(王仁) 박사를 왜 왕실로 초청했다. 왕인 박사는 우지노와키 이라쓰코(兎道稚郞子) 등 왕자들을 가르치는 구다라스 터전의 왕실 교육장관(西文首·가와치노후미노오비토)이 됐다.



광대한 ‘구다라스’ 터전 지금의 오사카부의 광대한 지역이 구다라스 터전이라고 기록한 11세기 말(1098년)의 고지도 ‘난파팔랑화도’(왼쪽), 왕인 박사 묘지 안내판 구다라스의 히라카타시 도로변의 왕인 박사 묘지 안내판.


그 무렵 백제왕족 오진 왕의 왕실은 현재의 오사카부인 구다라스 땅에 있었다. 필자는 지금의 오사카부 큰 지역은 본래부터 백제인들의 구다라스였다고 하는 11세기 말(1098·承德二年)의 ‘난파팔랑화도(難波八浪華圖)’를 일본에서 발굴함으로써 오사카 지역이 고대에는 ‘백제국’으로 불렸다는 것을 알게 됐다.
우선 오진 왕이 백제 왕족이라는 것에 관한 저명 사학자들의 연구를 밝힌다. 이노우에 미쓰사다(井上光貞·1917∼1983) 도쿄대 사학과 교수는 백제 사신으로부터 칠지도(七支刀)를 전해 받은 왜왕 오진이 백제 왕족이며, “천황씨(天皇氏·천황 가문) 자체가 조선으로부터 건너온 이주자였던 것”(‘일본국가의 기원’·1960)이라고 밝혔다.
미즈노 유(水野祐·1918∼2000) 와세다대 사학과 교수의 “오진 천황과 그의 아들 닌토쿠(仁德) 천황은 백제국 왕가로부터 건너와 정복 왕조를 이루었다”(‘일본 고대국가의 형성’·1978)라는 연구도 유명하다. 닌토쿠 왕은 오진의 제4왕자이다.
근년에는 일본 고대사학자인 이시와타리 신이치로(石渡信一郞·1926∼)의 저서 ‘백제에서 건너온 오진천황’(百濟から渡來した應神天皇·2001)이 일본 사학계에서 크게 주목받고 있다. 이시와타리는 책에서 오사카부 하비키노(羽曳野)시에 있는 오진 왕의 왕릉에 대해 “오진릉의 피장자는 5세기 후반에 건너온 백제의 곤지(昆支)왕자이다. 그는 5세기 말에 백제계 왕조를 수립했다”고 단정했다. 곤지 왕자는 개로왕의 제2왕자이다(‘삼국사기’).
오진 왕 당시 왕인은 백제로부터 천자문 등을 가지고 왜나라 땅 구다라스로 건너갔다. 5세기 말경이던 그때에 우리나라에는 문자가 한자 외에 다른 글자는 없었다. 조선 세종대왕 때 ‘훈민정음’이 나오기 전까지, 우리는 삼국시대부터 한자어로 소리(音)와 새김(訓)을 맞추는 이두라는 표기를 했다. 더구나 미개한 나라였던 왜국에 글자가 있을 리 없었다. 그 때문에 왕인은 사언고시(四言古詩) 1000글자로 엮은 한자 학습서인 천자문을 가지고 왜의 백제인 왕실로 건너갔다.
그러나 일부 일본 학자들은 “왕인이 일본에 올 때 천자문을 가지고 오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에도 시대(1607∼1867)의 국학자며 정치가였던 아라이 하쿠세키(新井白石·1657∼1725)는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왕인이 일본에 건너온 것은 5세기였다. 천자문은 6세기 때 양(梁)나라 주흥사(周興嗣·502∼549)가 쓴 책이다. 그런데 5세기 때 일본에 온 왕인이 6세기에 나온 천자문을 가져 왔다니 어처구니없는 말이다.”(‘同文通考’).
그러나 최초의 천자문은 서기 2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위(魏)나라 종요(鐘繇·151∼230)가 중국에서 가장 먼저 사언고시 천자문을 저술했다. 더구나 4세기 당시의 왕희지(王羲之·322∼379) 붓글씨의 ‘종요 천자문’도 알려지고 있다. 그러므로 5세기에 일본으로 건너간 왕인이 종요 천자문 필사본을 가지고 간 것만은 틀림없다.
종요 천자문의 첫 사언고시는 ‘이의일월 운로엄상(二儀日月 雲露嚴霜)’으로 시작된다. 즉 “하늘과 땅은 해와 달이요, 구름과 이슬과 된서리로다”라는 뜻이다.
(다음주에 계속)
홍윤기 한국외대 교수 senshyu@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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