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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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한류(韓流) 열풍이 거셉니다. 열풍은 TV 드라마·영화·가요 등 전방위로 확산되고, 일본을 넘어 중국 베트남 태국 등지로 폭넓게 번지고 있습니다. 세계일보는 26일부터 매주 수요일 홍윤기 교수(한국외대)의 ‘역사기행, 일본 속의 한류를 찾아서’를 연재합니다. 일본 속 백제문화의 자취 등 풍부한 사료를 통해 한일 양국 문화교류사의 심연을 들여다보고 한류의 역사적 근원을 살펴보는 좋은 기회가 될 것입니다. 관심과 성원을 바랍니다.

오사카(大阪)는 일본 제2의 대도시다. 일찍이 한반도 남쪽에서 배를 타고 거센 물결을 헤치며 열도로 건너간 백제인들은 이곳에 몰려 살면서 ‘백제주(百濟洲)’라는 새로운 삶의 터전을 만들기 시작했다. 일본어로는 ‘구다라스(百濟洲·くだらす)’라고 한다. 일본에서는 백제를 ‘구다라’로 부르기 때문이다. 지금도 오사카에는 창설 132년의 ‘구다라소학교(大阪市立南百濟小學校·1874년 창립)가 있으며 구다라역(〃驛), 구다라왕신사(〃王神社), 구다라사지(〃寺趾) 등등 백제 자취가 이곳저곳에 뚜렷하다. 지금의 오사카 평야는 본래 구다라노(〃野)였으며 히라노강(平野川) 역시 구다라강(〃川)이던 것을 일제 말기에 ‘구다라’라는 행정 지명들을 바꿔버렸다. 지금의 나라 땅 소가강(曾我川) 역시 고대엔 구다라강(〃川)이었다(‘일본서기’). 더구나 구다라스의 중심지인 지금의 오사카시 지역은 구다라군(〃郡)으로서, 지금부터 84년 전인 일제 하에도 이곳에는 남구다라촌(南百濟村)과 북구다라촌(北百濟村)의 행정구역이 존재했다. 현재 오사카 도심지의 구다라소학교는 당시 구다라군 남구다라촌 지역에 속해 있었다.


◇오사카의 ‘구다라절’ 특별 사적 공원의 가람 배치도 비석(왼쪽), 공주 무령왕릉 현실. 벽면의 전에는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다.

어째서 일인들은 백제를 구다라로 부르게 되었을까. 교도대 사학과 우에다 마사아키(上田正昭) 명예교수는 지난해 자택에서 직접 필자에게 “구다라라는 호칭은 백제의 고어(古語)로 ‘큰 나라’라고 하는 데서 연유된 것”이라고 말해주었다. 일본 쪽에서는 역사적으로 고대의 미개한 일본을 개발해준 선진국 백제를 ‘구다라’ 즉 ‘큰 나라’로 찬양했다 한다.
백제의 세 번째 왕도인 충남 부여 땅에는 ‘구두레’라고 부르는 큰 마을이 있다. 구두레는 큰 들 또는 큰 나라의 뜻을 가진 백제 고어인 것을 거듭 살피게 한다. 부여의 구두레라는 지명에서 백제를 구다라로 소리 내어 읽는 일본 만요가나(萬葉假名)의 음독(音讀)이 생긴 것 같다. 만요가나는 우리나라의 이두(吏讀)와 같이 한자어를 소리(音)와 새김(訓)으로 읽는 일본어 표현법이다. “만요가나는 이두의 영향을 받았다”(‘鄕歌及び吏讀の硏究’·1929)고 일제하 서울의 경성제대 교수를 지낸 도쿄대 오구라 신페이(小倉新平·1882∼1944) 교수가 지적했다. 실은 일본에서 이 만요가나를 가장 먼저 시작한 백제인은 왕인(王仁·5세기)이었다. 왕인 박사는 일본 최초의 와카(和歌)인 ‘난파진가(難波津歌)’를 짓기도 했다. 필자는 그 사실을 지금부터 30년 전에 18세기 일본 시문학자 에무라 홋카이(江村北海·1713∼1788)의 목판본(‘日本詩史’)을 발굴하여 확인했다.
한국 연예인들이 요즘 일본에서 ‘한류’의 물결을 이루고 있다. 영화뿐 아니라 TV드라마며 한국 노래, 한국어 강습도 한창이다. 그러기에 문득 떠오르는 것은 옛날부터 일인들의 ‘백제 칭송’이다. 일인들이 백제 문화를 입버릇처럼 찬양하던 “구다라나이(百濟無い)”라는 말이 일본 땅에서 오랜 역사 속에 이어왔다. 본래 이 말의 어원은 “이것은 백제 물건이 아니다(これは百濟の物では無い)”였다. 백제에서 일본으로 건너온 뛰어난 생산품이 아니면 가치가 없다는 말이었다. 요즘 흔히들 외제 명품을 따지는 것과 같은 찬사였다. 이렇듯 고대 백제 문화는 왜(倭)나라에 영향이 컸다.


◇스이코 여왕과 만조백관이 백제옷을 입었으며 구경하던 사람들이 기뻐했다는 내용이 실린 부상략기(13세기 간행) 관련 대목.

언제부터인가 “일본 천황은 밥 먹고 나면 숭늉을 마신다” 말이 항간에 번지기 시작했다. 조선왕조 말기의 영친왕비(英親王妃)였던 이방자(李方子·나시모토 마사코 1901∼1989) 여사가 생존 당시 창덕궁 낙선재에서 “일본 왕실에서도 숭늉을 마신다”는 사실을 이야기했기 때문이다. 이 여사는 본래 일본 왕실에서 자란 왕족으로 영친왕에게 시집왔으며, 숭늉을 마신다는 것은 그 당시의 히로히토(裕仁·1926∼1989 재위) 일왕을 가리켰다. 1985년 전두환 대통령이 한국 국가원수 최초로 일본을 공식 방문했던 당시, 히로히토 일왕은 “사실은 우리 조상도 한국인입니다”라고 만찬회 자리에서 발언했다고 일본의 한 학자(간다 히데카즈·神田秀一 오비린대학 교수)가 밝힌 일이 있다. 물론 히로히토 일왕은 한국인의 핏줄, 구체적으로는 ‘구다라 왕족’의 핏줄을 타고났다.
피는 속이지 못하는 법이다. 그러기에 지금의 아키히토(明仁·1989년 즉위) 일왕도 “내 몸에는 한국인의 피가 흐른다”고 공언했나보다. 그날(2001년 12월23일) 아키히토 일왕은 도쿄의 왕실에서 68회 생일을 맞으면서 기자회견을 갖고 다음처럼 말했다. “나 자신으로 말하면, 간무(桓武) 천황의 생모가 백제 무령왕(武寧王·501∼523 재위)의 자손이라고 ‘속일본기’ 역사책에 쓰여 있기 때문에 한국과의 혈연을 느끼고 있습니다.”(아사히신문 2001년 12월23일)
일왕이 한국인의 후손이라는 것을 더욱 구체적이고도 적극적으로 입증할 만한 매우 중요한 행사가 재작년 충남 공주에서 거행되었다. 일본 왕실의 왕자인 아사카노 마사히코(朝香誠彦)가 아키히토 일왕의 윤허를 받고, 그해 여름(2004년 8월3일) 공주에 있는 백제 제25대 무령왕 왕릉(송산리 제7호 고분)에 찾아와 제사를 지냈다. 그는 일본 왕실에서 가지고 온 고대 일본 왕실의 향을 향로에다 피우며 제삿술과 제사용 과자 등 제물을 진설하고 무령왕의 영전에 깊이 머리 숙여 절을 올렸다. 아키히토 일왕의 당숙인 아사카노미야 왕자는 공주시장에게 일본 왕실에서 가지고 온 향과 향로를 기증했다. 그가 기증한 향은 1300년 된 침향목(沈香木)으로 만든 매우 귀중한 일본 왕실 제사용이다.
침향목은 ‘백제옷(百濟服)’을 입었다(‘扶桑略記’·13세기)는 일본 제33대 스이코 여왕(推古·592∼628 재위)과 인연이 깊다. 스이코 여왕 재위 3년 4월 남쪽 바다 밤하늘에 큰 빛줄기가 뻗치면서 흡사 천둥소리처럼 요란한 굉음이 온 나라를 뒤흔들었다. 그 후 한 달 만에 드디어 구다라스 앞바다 아와지 섬으로 8척이 넘는 큰 통나무 침향목이 표착했다. 섬사람들은 그것을 건져 장작과 함께 불을 지폈더니 타오르는 연기와 더불어 그윽한 향기가 멀리 번져 나갔다. 섬주민들은 겁을 먹고 스이코 여왕에게 이 통나무를 갖다 바쳤다. 여왕은 기뻐하면서 이 침향목으로 왕실의 백제인 불공(佛工)에게 관세음불상을 만들게 했다. 이 불상을 요시노산의 비소사(比蘇寺)에 봉안했더니 이따금 광채가 번쩍번쩍 빛났다. 이어서 5월에는 백제로부터 고승 혜총(惠聰) 스님과 고구려 고승 혜자(惠慈) 스님이 함께 건너오자, 여왕은 몹시 기뻐하며 불심이 강한 젊은 쇼도쿠 태자(聖德太子·574∼622)의 스승으로 모시며 나라 땅 아스카(飛鳥) 왕궁 이웃에서 준공 직전인 7당 가람 법흥사에 모셨다. 스이코 여왕은 한창 법흥사를 창건하던 등극 원년(등극은 792년 12월이며, 793년을 원년으로 삼음) 1월에는 만조백관에게 백제옷을 입히고, 백제에서 보내온 부처님 진신사리를 법흥사 찰주에 봉안하는 법요를 거행했다(‘扶桑略記’).
동물자원 육종학자인 아자후대학 수의학과 다나베 유이치(田名部雄一) 교수가 필자에게 보내준 논문 ‘개로부터 찾아내는 일본인의 수수께끼’(犬から探る日本人の謎·1985)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눈길을 끈다. “한반도로부터 고대 일본으로 개가 건너왔다. 개는 사람이 데리고 왔다”고 했다. 개는 저 혼자 한반도로부터 먼바다 건너 왜섬 땅으로 갈 수 없다. 한반도에 사는 사람들이 건너올 때 개도 함께 데리고 왔다는 것. 그는 잇대어 쓰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2000년 전 무렵, 조선 반도에서 ‘야요이인(彌生人)’이며 ‘고분인(古墳人)’들이 건너오면서 새로운 개를 데리고 왔다. 그 이후로 인간은 혼혈하여 현재의 일본인들이 성립되었고, 그와 마찬가지로 개도 혼혈하여 대다수의 일본 견종도 성립되었다.”(다음주에 계속)

홍윤기(洪潤基) 교수는 한국외대 영어과를 졸업하고 일본 센슈대학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일국제왕인학회 회장을 지냈고, 현재 한국외대 교양학부에서 일본문화와 한국시를 강의하고 있다. 저서로는 ‘일본 천황은 한국인이다’(2000), ‘일본의 역사왜곡’(2001), ‘일본 속의 한국 문화유적을 찾아서’(2002) 등이 있다.

senshyu@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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