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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예기획1]유승준·박지윤 프로듀서 윤일상 그는 누군가

입력 : 2006-05-20 13:20:00 수정 : 2006-05-20 13: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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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곡가 윤일상을 제외하고 한국의 대중음악을 논하기는 어렵다. 그는 1992년 열아홉살의 나이로 데뷔한 이후 무수한 히트곡을 쏟아내며 이른바 ‘히트 메이커’로 자리잡았다. 쿨, 터보, 이정현 등의 댄스가수가 윤일상의 손을 거쳐 톱스타로 거듭나는가하면, 이승철, 김범수 등도 윤일상의 곡으로 서정적인 노래를 선보였다. 그야말로 장르를 넘나드는 저력을 발휘하고 있는 것. 최근에는 음악레이블 ‘내가 네트워크’를 통해 작곡가들의 권익보호에도 앞장서고 있는 윤일상이 SW를 찾아 음악에 대한 열정 하나로 지내온 지난 날의 이야기를 풀어놨다.

윤일상은 1974년 서울, 음악가 집안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외가쪽 가족들이 모두 클래식을 전공해 윤일상에게 있어 음악은 상당히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4살 때부터 피아노를 배운 그는 여동생이 태어나던 초등학교 3학년때 처음으로 작곡을 시작했다. “너무 기쁜 나머지 영감이 떠오르더라고요.(웃음) 그 일을 시작으로 중학교 때는 200여 곡을 만들었어요. 학창시절을 비틀즈, 레드 제플린 등에 흠뻑 빠져서 지냈죠.”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는 혈혈단신 음악계로 뛰어들었다. 물론 처음부터 쉬운 길은 아니었다. 당시에 아르바이트 하느라 끼니도 제대로 못챙겨 허리 사이즈가 26인치까지 줄었다고. 고생 끝에 처음 발표한 노래는 1992년 박준희의 ‘오, 보이’. 이후 DJ DOC의 ‘겨울이야기’가 밀리언셀러를 기록하면서 윤일상은 성공가도를 달리기 시작했다. 1996년엔 쿨의 ‘운명’ 영턱스클럽의 ‘정’ 터보의 ‘러브 이즈’가 동시 히트, 당시 가요차트는 그야말로 ‘윤일상 천하’를 이루었다. 10위권 안에 그의 노래가 8곡씩 포진되는 경우도 다반사였다.
“‘정’이 히트하니까 날 두고 ‘뽕 댄스의 창시자’라고 하더라고요.(웃음) 사실 제가 처음에 댄스음악에 트로트를 가미해보자고 제의했을 땐 주위 반응이 안좋았어요. 4∼5번 퇴짜 맞고 어렵게 발표했는데 그게 성공한거죠. 하지만 이후엔 그게 트렌드가 돼서 제 자신도 식상해졌어요. 애즈원의 ‘너만은 모르길’을 시작으로 음악 색깔에 변화를 주려고 노력했습니다.”
작곡가로 성공하자 곡 섭외부터 경제적 문제까지 신경써야 하는 부분이 너무 많아졌다. ‘음악 하는 사람은 음악만 해야 한다’고 생각한 윤일상은 지인들과 뜻을 모아 2003년 ‘내가 네트워크’를 창립했다. “‘내가 네트워크’는 ‘내 자신이 네트워크다’라는 의미예요. 음악가들이 한데 뭉쳐서 제대로 된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돕고, 음악 외적인 부분을 매니지먼트 해주는 곳입니다. 자체적으로 신인을 키우기도 하고요. 또 나날이 커져가는 온라인 음원시장에 탄력적으로 대응하려고 노력 중입니다. 한마디로 음악 관련 콘텐츠를 다루는 회사죠.”
자신을 두고 한 말은 아니지만 음악가를 “자질 중 70% 이상은 타고나야 하는 엔터테이너”로 정의하는 윤일상. 지금은 음반시장이 어렵긴 해도 음악가들이 더 분발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그야말로 ‘천상 음악가’의 모습이었다.



글 이혜린, 사진 김두홍 기자
rinny@sportsworldi.com

프로필
▲1974년 2월 21일 서울 출생
▲경희대학교 포스트모던음악 전공
▲1996년 SBS 최고 작곡가상
▲1997년 SBS 최고 작곡가상
▲1998년 유승준 2집 앨범 프로듀싱
▲1999년 박지윤 3집 앨범 프로듀싱
▲2000년 최근 10년 넘버원 최다 히트 작곡가로 선정
▲2002년 독집앨범 ‘IS-Soulist’ 발표
▲2003년 ‘내가 네트워크’ 창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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