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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월드] <기획> ‘한국영화계 책사’ 이승재 LJ필름대표의 아름다운 삶

입력 : 2006-04-29 11:48:00 수정 : 2006-04-29 11:4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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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계의 책사’ 이승재 대표(LJ 필름). 그는 저예산 예술 영화와 상업 영화의 중간자적 역할을 자임하며 한국 영화의 질적 발전에 혼신의 노력을 쏟고 있다. 그를 가리켜 영화계에서는 현실에 대한 갈증을 대중문화로 풀어가고 있는 ‘의식있는 지식인’, 해외시장을 겨냥한 영화계의 ‘핵심 브레인’ 등으로 부르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추구하고 있는 프로젝트나 한국 영화발전 계획은 모두가 국내 영화계의 든든한 발전 위에 해외를 겨냥하고 있기 때문이다. SW가 최근 햐얀 색 벚꽃과 붉은 색 철쭉이 화려한 군무를 펼치고 있는 서울 강남구 신사동 학동공원 부근 LJ필름 본사에서 이승재 대표와 인터뷰를 가졌다.

이승재의 삶

1964년 경남 함양에서 태어난 그는 옥당초등학교를 거쳐 울산에서 제일중, 학성고교를 졸업했다. 학창시절 뛰어난 감수성과 문학적인 기질로 인해 도내 백일장에서 장원을 하기도 했고, 교내 편집장으로 활약하며 의미있는 활동을 펼치기도 했다.
그는 뛰어난 머리로 인해 당시 세칭 일류대를 150명씩이나 보내는 학성고교에서 전교 14등으로 3학년에 진학했다. 하지만 그때 그는 많은 문제의식을 갖기 시작했다. 한때는 ‘유유자적 전국을 유랑하는 김삿갓’이 될 것을 꿈꿨을 정도로 그의 정신세계는 일반인의 그것을 능가했다.
‘대학은 왜 가야하나’란 관념적 의식에 사로 잡힌 그의 책가방 속에는 철학서적과 이데올로기 서적이 들어있었다. 83년 그는 마침내 고려대 철학과에 입학한다. 그리고 현실사회에 대한 고민에 빠져 대학 시절을 보내게 된다. ‘광주항쟁’에 대한 충격은 그를 사상서클로 이끌었고, 대학졸업 이후까지 현실문제의 대안을 찾기 위해 ‘숭고한 투쟁’을 이어갔다.
“90년이었죠. 결혼한 다음날, 고향 어른들이 신랑신부를 맞기 위해 마을 잔치를 준비하고 있는데 KBS 9시뉴스에 ‘기문노련’ 사건이 대대적으로 보도됐었죠. 바로 제 얼굴이 그 사건의 주범으로 TV에 나왔고요. 당시 저는 남산 대공분실에 있었죠.”
이 사건이 있기 전 그는 개혁성향의 기독교계 잡지에서 편집장으로 3년을 일했다. “당시 많은 분들을 만났고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한명숙 총리의 부군 되시는 박성준 선생을 그때 뵈었죠. 그분은 나에게 너무나 좋은 말씀을 많이 해주셨죠. 내가 영화 쪽으로 뛰어들 때 결정적인 말씀도 그분이 해주셨어요.”
박성준 교수(성공회대)는 당시 그에게 ‘남자는 세 번의 기회가 있다. 그러니 만약 네가 꼭 영화를 하고 싶다면 과감하게 저질러라’고 말했고, 이 대표는 과감하게 ‘영화로의 인생 전환’을 시도한 것이다.


“93년 나는 모든 일을 접고 6개월간 호남땅을 샅샅히 돌아다녔어요. 호남은 나에겐 ‘동경의 땅’이었고 ‘독재에 대한 극(克)의 땅’이었죠. 그리곤 다시 현실로 돌아와 영화쪽에 투신했습니다.”
그는 처음 이장호 감독 밑에서 1년간을 근무하며 많은 것을 배웠다. 그리곤 ‘신씨네’가 운영하는 영화아카데미에서 체계적인 공부를 하며 영화계의 흐름을 잡아갈 수 있었다. 그리고 95년 ‘은행나무’ 마케팅 팀장으로 활약하며 신철, 강우석, 김형준, 차승재, 오정완씨 등 쟁쟁한 영화계 인사들을 만날 수 있었다. 힘들고 어려운 시절이었지만 그에겐 꿈이 있었다. 한국영화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겠다는….
그러던 96년 영화 ‘인샬라’의 프로듀싱을 위해 프랑스로 떠났고, 현지에서 김기덕을 만났다. 바로 그가 추구하던 저예산 예술영화 제작의 기틀을 찾아낸 것이다. 그를 만남으로써 김기덕 감독은 세계적인 감독 반열에 오르게 된 것이다. 이후 그는 김 감독과 ‘나쁜 남자’ 등 5개 영화를 제작했고, 오늘날에 이르게 됐다.
“그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하면 된다’는 의지를 갖고 있습니다. 한국 영화의 새로운 패러다임은 글로벌화입니다. 우린 분명 해나갈 수 있습니다. 힘을 냅시다.” 글로벌화라는 새로운 명제를 제시한 이 대표의 새로운 도전이 지금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글 황용희, 사진 김두홍 기자
hee7@sportsworldi.com

김기덕 감독과 인연


김기덕 감독
이승재 대표와 김기덕 감독과의 인연은 매우 특별하다.
두 사람의 만남은 9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최민수, 이영애가 주연을 맡은 영화 ‘인샬라’의 준비를 위해 프랑스 파리로 날아간 이승재 대표는 당시 ‘야생동물보호구역’ 촬영 차 파리에 머물고 있던 김기덕 감독을 우연히 만났다. 파리의 어느 작은 호텔방에 앉아 살아온 인생이야기들을 주고받던 두 사람은 어느새 서로 ‘형 아우’ 하는 사이로 발전했고, 이승재 대표가 2년 뒤 ‘파란 대문’의 프로듀서를 하게 되면서 같은 배를 타게 된 것이다.
이후 이승재 대표가 지금의 LJ필름을 설립하면서 두 사람의 관계는 더욱 돈독해 졌다. 김기덕 감독은 LJ필름에서 2001년 ‘수취인불명’을 시작으로 ‘나쁜 남자’ ‘해안선’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까지, 2004년 김기덕 필름으로 독립하기 전까지 연속으로 4편을 이승재 대표와 함께 작업했다.
이승재 대표는 김기덕 감독을 ‘타고난 천재‘라고 표현한다. 회화적인 감각을 갖추고 있고 이야기를 풀어내는 능력이 누구보다 뛰어난 감독이라는 것. 게다가 시나리오 작업이 끝남과 동시에 장소 헌팅을 나가는 부지런함까지 갖춘 성실함이 지금의 김기덕을 있게 한 이유라고 말한다.
하지만 일부 김기덕에 대한 부정적 시각에 대해서는 “인간 김기덕은 사회적으로 아직 학습이 덜 된 것일 뿐이다. 소위 먹물들이 자충수를 두는 반면, 김 감독은 자기 생각을 그대로 표현하는 것뿐”이라며 “이러한 특징이 영화 속에 절묘하게 드러난다”고 설명했다.


영화 ''해안선''(왼쪽), 영화 ''나쁜 남자''


홍동희 기자
mystar@sportsworld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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