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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다는 것의 역사

입력 : 2006-04-08 12:14:00 수정 : 2006-04-08 12: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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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진진 독서의 역사 처음에는 소리 내어 읽었다. 띄어쓰기 없이 쓰여진 고대 그리스 문장은 그렇게 읽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기원전 3∼2세기 서양 세계의 보편적 독서 형태는 ‘소리 내어 읽기’, 즉 음독이었다. 그나마 읽을 수 있는 사람도 많지 않아 독서는 상류계급에 한정됐다. 읽는다는 것은 문자를 해독할 줄 아는 소수가 다수 문맹자에게 ‘글의 내용을 전달한다’는 의미도 가졌다. ‘음독의 시대’에 독자는 곧 낭독의 소리를 듣는 청중이었다. 그리스·로마 시대의 음독은 중세까지 이어졌다.
이 책은 ‘읽는다는 것’의 역사를 추적했다. 읽기의 역사에 관심을 갖는 것은 독서 방법이 정치·사회·경제의 다양한 요인만큼이나 인류의 역사와 문화에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저자 로제 샤르티에는“독서는 역사에서 분리된 인류학상 불변체가 아니다. 몇 가지 독서 관행이 지배했으며, 몇 차례의 독서혁명이 행동과 습관을 바꿨다. 이 책은 그런 혁명을 연구해 이해를 돕는 게 목적”이라고 밝힌다.
읽기의 역사 속으로 들어가 보자. ‘소리 내어 읽기’는 중세 초기에 이르러 ‘웅얼거리는’ 독서를 거쳐 ‘소리 없이 읽는’ 묵독으로 점차 옮아갔다. 묵독의 필요성이 처음 표면화된 것은 13세기 말. 책이 많지 않던 시절 사람들은 수도원과 학교 등 도서관에서 도난방지용 쇠사슬에 매달린 책을 주로 접했다. 어쩔 수 없이 다른 사람과 이웃해서 책을 읽던 독자들은 음독이 서로의 독서를 방해한다고 푸념하기 시작했다. 서서히 증폭된 묵독의 요구는 옥스퍼드와 소르본 등 대학 도서관에서 정숙하도록 하는 규정까지 만들며 15세기 독서법의 주류로 떠오른다.
음독에서 묵독으로의 변화는 ‘독서혁명’으로 평가된다. 묵독에 의해 보증된 독자의 프라이버시는 반체제 정신과 에로티시즘, 신앙심 고취 등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포르노가 금지됐던 15세기 프랑스에서 묵독 습관 때문에 외설 서적이 쏟아진다. 일부 종교 작품에까지 외설이 침투할 정도였다. 냉소주의도 함께 퍼지면서 귀족계급의 필사본 서적에는 폭군에 대한 야유와 왕가 권위에 대한 저항 표현이 넘쳐났다. 구텐베르크의 인쇄술 발명은 문헌 유통을 가속해 사상의 흐름까지 바꾸는 환경을 조성했다. 인쇄술은 루터의 사상을 확산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며 종교개혁까지 이끌어 냈다는 분석이 나올 정도다.
19세기 이후 또 한 번의 독서혁명이 불어닥친다. 정독에서 다독으로의 전환이었다. 제한되고 배타적인 책에만 접근해 읽고 기억하여 자기 것을 만들던 정독은 출판·인쇄물 홍수로 다독에 밀려났다. 보다 많은 정보를 가진 사람이 경쟁에서 이기는 정보 폭발 시대의 사람들은 다독을 통해 폭넓고 다양한 인쇄물을 탐독하며 필요한 것을 골라냈다. 이 때문에 ‘필독서’로 여겨지는 정전(正典)이 쇠퇴하고 신문과 잡지, 연애소설, 미스터리, 철학서 등 읽을 거리가 주류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차츰 거대 출판사들이 시장을 좌우하면서 독자들이 여기에 휩쓸리기 시작했다. 무질서하고 독선적이며 ‘원하는 것만 읽는다’는 개인중심적인 독서법, 소위 ‘대중적 독서법’ ‘포스트 모던 독서법’이 확산되기에 이른 것이다.
읽는다는 것의 역사는 앞으로 어떻게 쓰여질까. 이미 전대미문의 변화가 성큼 다가오고 있다. 책이 아닌 컴퓨터 모니터를 통해 보는 전자 텍스트 독서는 저자와 독자의 경계를 허물며 ‘독자’를 ‘사용자’로 만들었다. 독자는 텍스트를 자유롭게 발췌해 새로운 저작물을 만들고, 그 텍스트는 또다시 인용돼 새로운 글로 재생산된다. 읽는다는 것은 편집과 재생산의 의미를 포함하기에 이르렀다. 저자는 “이런 ‘무정부 상태’ 독서 질서가 가까운 장래에 독서 모델이 되고, 이 때문에 책의 위력은 약화될 것”이라고 말한다.
이 책은 서적사회학과 고문서학 등을 전공한 다국적 저자들의 오랜 노력의 산물이다. 13명 저자의 국적만도 프랑스 이탈리아 영국 미국 등 8개국에 이른다. 이들이 엮어 내는 고대에서 중세, 현대까지 시대별로 책과 독서에 얽힌 일화는 실로 방대하다. 그러나 서양에 결코 뒤지지 않는 화려한 독서와 기록문화를 가진 동양의 읽기 역사를 다루지 않아 아쉬움을 남긴다.
안석호 기자 soko@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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