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흔하게 볼 수 있는 드라마와 영화의 로맨스 공식이지만, 원조는 약 200년 전 제인 오스틴의 소설 ‘오만과 편견(Pride and Prejudice)’이라고 할 만하다. 딱딱하고 진지한 제목이지만 내용을 살펴보면, 다소 ‘오만’했던 한 남자와 그 남자에 대해 ‘편견’을 가졌던 여자가 결국엔 자신의 오만과 편견을 접고 사랑에 빠진다는 달콤한 로맨스이다.
‘부자인 독신 남자에게 아내가 필요하리라는 것은 당연한 진리이다’라는 도발적인 문장으로 시작하는 ‘오만과 편견’은 셰익스피어와 함께 영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작가 제인 오스틴의 작품 중에서도 가장 인기 있는 작품으로 여러 번 영화화, 드라마화됐다.
영국의 BBC에서는 여섯 차례나 드라마로 만들어졌으며, 영화 역시 원작을 그대로 가져오거나 또는 변형을 거쳐 만들어졌다. 가장 최근에 영상화된 ‘오만과 편견’은 오는 24일 국내에 개봉하는 작품으로 키이라 나이틀리가 주연을 맡았다.
2005년 작인 이 영화는 과거 ‘오만과 편견’의 다른 버전들인 1995년 작 BBC의 드라마와 2001년 영화 ‘브리짓 존스의 일기’와 연결고리를 가지고 있으며 두 시리즈의 팬들에게는 비교의 즐거움을 주고 있다.
■ 드라마와 비교하기 (1995년 BBC의 6부작 오만과 편견)
우리나라의 ‘춘향전’과 같이 영국의 대표 로맨스인 ‘오만과 편견’은 BBC에서 1938년, 1952년, 1958년, 1967년, 1980년, 1995년 모두 여섯 번이나 드라마로 만들어졌다. 그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은 가장 마지막에 만들어진 1995년 작으로, 한 시간짜리 6회로 구성됐다.
제니퍼 엘이 여주인공인 엘리자베스 베넷(리지), 콜린 퍼스가 남자주인공인 피츠윌리엄 다아시 역을 맡았다. 당시 드라마는 영국에서 뜨거운 인기를 얻으며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다. 또 거만하게 보이면서도 미워할 수 없는 매력을 지닌 다아시를 연기한 콜린 퍼스는 이 드라마로 국민 배우가 됐다. 또 이 드라마는 몇 해 전 국내 케이블 방송과 EBS에서도 방송돼 마니아 층을 형성하며 인기를 끌기도 했다.
6부작으로 구성된 드라마가 원작을 좀더 세심히 반영했지만, 영화 역시 두 시간이 조금 넘는 짧은 시간 동안 압축적으로 러브 스토리뿐만 아니라 당시 사회를 잘 보여주고 있다. 당시 딸들은 재산을 상속받을 수 없었던 상황, 사랑 대신 사회적· 경제적 안정을 위해 결혼을 선택하는 모습 등 원작에서 날카롭게 드러낸 현실 역시 드라마와 영화에 잘 나타난다. 또 다섯 딸을 좋은 조건에 시집보내는 게 지상 과제인 베넷 부인의 극성스런 모습은 오늘날 드라마 속 자식의 결혼을 좌지우지하려는 부모의 모습과 닮았다.
영화는 또 드라마에 비해 주연들이 한층 젊어졌다. 제니퍼 엘이 연기한 리지는 원작처럼 재치있고 똑똑할 뿐만 아니라 진중하고 안정된 느낌을 주었다. 이에 비해 영화 속 키이라 나이틀리가 연기한 리지는 드라마 속 리지보다 더 많이 웃고 발랄해졌다. 또 똑똑하고 쾌활하지만 다아시 못지 않게 자존심이 세다. 키이라 나이틀리는 처음에 너무 예뻐서 영리한 리지 역에 어울리지 않다는 이유로 캐스팅에 어려움을 겪었다. 소설 속 리지는 매력적이기는 하지만 언니 제인보다 덜 예쁘고, 다아시 역시 그녀를 처음 봤을 때 “봐줄 만 하지만 반할 정도는 아니다”고 말한다. 결국 리지 역을 맡게 된 키이라 나이틀리의 과제는 안 예쁘게 보이는 것이었다. 어렸을 때 BBC 드라마를 보며 제니퍼 엘을 동경했다는 키이라 나이틀리는 결국 본인이 새로운 리지를 만들어내며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후보에까지 올랐다.
드라마에서 다아시를 연기한 콜린 퍼스는 ‘다아시= 콜린 퍼스’라는 공식을 성립시켰다. 그는 ‘브리짓 존스의 일기’에도 똑같은 캐릭터이자 똑같은 이름의 다아시 역을 맡아 펼쳐 팬들을 즐겁게 했다. 한 번의 드라마와 한 번의 영화를 통해 대중에게 각인된 ‘다아시 역에는 콜린 퍼스’라는 등식을 깨야 하는 무거운 임무는 배우 매튜 맥퍼딘이 맡았다. 그가 맡은 다아시는 리지의 경우처럼 드라마보다 젊어졌다. 다아시의 특징인 무뚝뚝하고 거만한 표정과 함께 사랑을 갈구하는 듯한 우수에 찬 눈빛을 잘 표현했다.
두 사람의 러브 신은 어떻게 다를까? 다아시가 예기치 않게 리지 앞에서 뜨거운 사랑을 고백하는 장면의 경우 드라마에서는 원작처럼 다아시가 리지의 방을 방문하면서 실내에서 이뤄진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빗줄기가 세차게 내리는 야외에서 더욱 격정적으로 이뤄진다. 영화에서는 또 마지막에 아름다운 팸벌리 저택에서 두 사람이 서로에게 사랑을 표시하는 장면을 보여준다. 하지만 드라마를 사랑하는 팬들은 영화에서 다아시가 가슴의 불을 못 이겨 호수를 헤엄치는 장면이 나오지 않아 실망할지도 모른다. 분명히 밝혀두지만 다아시의 헤엄 신은 원작에 없다.
■ 현대극과 비교하기 (2001년 영화 ‘브리짓 존스의 일기’)
헬렌 필딩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브리짓 존스의 일기’는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의 현대 버전이다. 르네 젤위거가 리지의 현대판인 여주인공 브리짓 역을 맡았으며, BBC 드라마에서 다아시 역을 맡은 콜린 퍼스가 이 현대 버전에서도 똑같은 성을 가진 마크 다아시 역을 맡았다. 또 원작에서 다아시에 대한 리지의 편견을 더욱 확실하게 해주는 인물인 악역 위컴은 ‘브리짓 존스의 일기’에서는 다니엘로 이름이 바뀌고 삼각 관계의 한 주축으로 역할도 더욱 커졌다.
‘브리짓 존스의 일기’ 개봉 당시에도 콜린 퍼스는 드라마에서와 똑같은 다아시 역을 맡는다는 점이 화제가 됐다. 저자인 헬렌 필딩은 자신의 소설이 소설 ‘오만과 편견’과 BBC 드라마 ‘오만과 편견’을 기초로 하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 또 그녀는 콜린 퍼스의 팬으로 그를 적극 추천했으며 이것이 콜린 퍼스가 또다시 다아시 역을 맡은 이유이기도 하다. 드라마와 영화의 연관성은 또 있었다. 드라마의 대본을 쓴 앤드루 데이비스가 이 영화의 극본을 썼다.
원작에서 지체 높은 가문의 재산가였던 다아시는 현대판에서는 인권 변호사로 바뀌었지만, 무뚝뚝한 성격과 어려울 때 여주인공을 도와준다는 점, 갑작스런 사랑 고백 등은 똑같다. 원작에서 재치있고 영리한 리지는 현대판에서 실수 투성이에다가 연애와 다이어트로 고민하는 노처녀로 완전 바뀌었다. 현대 버전에 맞게 여성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캐릭터로 바뀐 것이다. 이 영화로 살을 찌운 것으로도 유명한 르네 젤위거는 처음에 영국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캐스팅 논란을 일으켰지만, 완벽하게 브리짓에 어울리는 연기를 해내 찬사를 받았다. 또 원작에서 처음에 리지의 환심을 사고 다아시에 대한 악담을 했던 위컴은 ‘브리짓 존스의 일기’에서도 처음에 매너 있는 모습으로 브리짓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악역 다니엘을 연기한 휴 그랜트는 이전까지 제인 오스틴의 또 다른 작품인 ‘센스 앤드 센서빌리티’와 ‘노팅힐’ 등을 통해 소심한 젠틀맨을 연기했지만 이 영화에서 이중적인 바람둥를 연기하며 완벽한 이미지 변신에 성공했다.
영화 ‘브리짓 존스의 일기’와 이번에 개봉하는 ‘오만과 편견’은 똑같은 제작사인 워킹타이틀이 만들었다.
세계일보 인터넷뉴스팀 김지희 기자 kimpossible@segye.com
보도자료 및 제보 bodo@segye.com
[ⓒ 세계일보 & Segye.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