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의 매스미디어는 슈퍼마켓과 다를 것 별로 없다. 인터넷이 ‘IT 산업’이라고 큰 소리치고 또 울력다짐을 해 보았자, 필경은 장삿속이다. 그러다 보니 사회 자체가 아예 시장으로 둔갑하고 말았다. 상품 시장이 되어버린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 인간은 누구나 상인이다. 파는 사람만이 아니라 사는 사람도 상업인이기 때문이다. 상품 보러 다니고 상품 찾아 헤매고 광고 들여다보고 그러면서 사들이고 하는 것이 일상 생활에서 차지하는 몫이 절대적이기 때문이다. 흔히들 살아 가는 일을 자고 먹는 일이라고들 해 왔다. 그러나 이제 말을 고쳐야 한다. 팔고 사고 하는 것, 그게 곧 사는 일이다. 인생이다.
‘죽느냐 사느냐 그게 문제로다’라는 햄릿의 독백은 이제 낡았다. 지금은 ‘사느냐 마느냐 그게 문제로다’라고 뇌까려야 옳다. 이 경우 ‘사느냐’고 말할 것도 ‘구매하느냐?’와 같은 뜻이다.
인생은 필경 ‘쇼핑 백’ 속이다.
한데 오늘날의 상품은 실용가치나 효용가치 위주로 사고 팔아지는 게 아니다. 그런 것은 이미 갖추어진 것으로 전제하고 그보다 더 높은 가치를 따라서 상품의 값이 매겨진다. 그것은 빛 좋고 모양새 좋은 것으로 결정된다.
오늘날 상품은 멋이다. 그나마 겉멋이 들어야 한다. 겉치레가 뛰어나야 한다. 남의 눈을 끌기 좋게 겉치장을 해야 한다. 보드리야르의 말대로 하면 그런 게 다름 아닌, ‘시뮐라크라’다. 그리스 시대라면 속은 텅텅인데 껍데기만 반질반질한 것, 심지어는 남의 눈 속임감, 그런 게 시뮐라크라이지만, 보드리야르는 오늘의 상품 가치가 누릴 최정상을 가리키면서 이 말을 썼다.
하지만 껍데기란 말에서 화투짝의 껍데기를 연상하면 안 된다. 상품가치에서 껍데기는 삼팔광땡이, 저리 가라고 으름장을 놓기 마련이다. 그러기에 시뮐라크라의 겉치레는 양귀비의 치장이고 클레오파트라의 화장이다. 장미의 이름다움을 두고서 그 속을 따지고 들면 장미가 가시를 내지를지도 모른다. 멍청한 그 사람의 눈을 찔러 놓자고, 아니 찔러서 파내버리자고 덤빌지도 모른다. 요컨대 오늘의 상품론 대 주제인 시뮐라크라는 패션이고 디자인이다. 여성으로 치면 화장이다.
하니까 오늘날은 목구멍으로 사람이 살고 있는 게 아니다. 다만 눈으로, 전적으로 눈으로 살고 있는 셈이 된다.
목구멍이 포도청이 아니다. 눈알이, 눈동자가 포도청이다. 그래서 오늘을 시각문화의 시대라고 하는 것이다. 사회가 그리고 세상이 다만 거대한 ‘비디오 장치’가 되고 말았다. 세상도 사람도 상품 닮아서 ‘볼거리’가 되고 그래서 크고 작고 간에 뭐든 ‘스펙터클’로 둔갑하고 말았다. 이럴 경우 한국말 ‘멋’은 시뮐라크라보다 훨씬 멋진 말이다. 뭔가가 멋지면 멋질수록 좋다. ‘멋쟁이’라면 사람 중의 초일류다. ‘멋들어지다’고 하면 그건 바로 찬사다.
한데 사람을 두고는 따로 뭔가를 말해야 할 것 같다. 상품과는 달리 사람의 경우라면 겉멋이, 그리고 겉치레가 멋쩍지 않도록 마음 써야 할 것이다.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고 한, 그 속담이 일러주고 있듯이 겉멋과 속멋이 두루 갖추어진 사람이라야 정말 멋진 사람일 것이기 때문이다.
김열규 계명대 석좌교수·국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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